52화
‘내 초상화라도 보내서 미리 준비하게 했나?’
알 수 없는 호의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결국, 세리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황녀님께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지 아니?”
그러자 칸은 고개를 들어 세리아를 마주했다. 베일 너머로 생긋 미소 짓는 게 얼핏 보였다.
“제 드레스를 입고 데뷔탕트를 치르면 알게 되실 거랍니다.”
여전히 의뭉스러운 말이었다. 세리아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차자, 칸은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언제든 세리아 님의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촤르륵. 이내 줄자를 정리한 그녀가 한 발 물러나며 말했다.
“조금 더 극적인 연출을 위해선 말을 아끼고 싶네요.”
그러고선 잠시 침묵하며 세리아를 바라봤다. 마치 저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듯, 어딘지 필사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세리아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도 섬세하게 정보를 기록했다.
키, 생김새, 머리 모양, 체형, 분위기와 색상, 심지어는 어울리는 향기까지.
세리아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그녀가 워낙 작업에 몰두하는 바람에 차마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말한다고 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묘한 신뢰가 가는 게, 참 특이한 여인이었다.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아.’
독특하면서도 이질적이지 않은 게 신묘했다.
혹시 어디서 만나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사람을 본 적 있을 리 없었다.
‘그랬더라면 단번에 알아봤을 테니까.’
세리아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홀로 하고 있을 때, 칸은 작업이 끝난 건지 종이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드레스는 완성되는 대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받으신 후 의견이 있다면, 제게 연락해 주세요.”
“그러도록 할게. 드레스도 기대하고 있어.”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고요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어투였다.
세리아는 그 덤덤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잠자코 듣다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럼, 다시 뵐 날을 기다릴게요.”
그에 화답하듯 칸이라는 여성 역시 입술을 호선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건넨 뒤, 마지막까지 의문스러운 말을 했다.
“방을 나오면, 뜻밖의 인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의아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던 세리아의 눈이 한순간에 크게 뜨였다.
‘……방을 나오면?’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저편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구석을 나가 너와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리리-」
순간 특정한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면, 그건 그저 우연인 걸까.
‘칸나?’
너무도 예상치 못한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왜냐면 그건 지금으로부터 벌써 몇 년도 더 된, 어느 날의 편지 내용이었으니까.
후원하던 소녀가 살롱에 스카우트되며 자립하던 날, 세리아가 마지막 선물과 함께 보냈던 마지막 편지.
‘……설마.’
확신까지 가지 못한 마음이 붕 뜬 채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순간 몸을 돌려 나가는 칸의 목에서 무언가가 반짝 빛났다.
‘저 목걸이…….’
연분홍색의 작은 목걸이였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이것 역시 우연인 걸까.
세리아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칸은 예의를 갖춰 떠났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던 세리아의 가슴이 전보다 빠르게 뛰었다.
모든 추측이 하나의 가정으로 귀결됐다.
세리아는 차마 잡지 못한 여인의 이름을 홀로 중얼거렸다.
“칸나…… 정말 너야?”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머지않아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때가 되면 많은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겠지.
세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환히 밝혔다.
데뷔탕트가, 그리고 그 이후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세리아는 작게 콧바람을 내쉬며 온실 밖으로 나왔다.
데뷔탕트는 걱정거리를 덜었으니, 이제 남은 건 사냥제였다.
왜 한창 더울 때 사냥을 즐기는 걸까. 세리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사라며 저 홀로 흉보며 햇살을 느꼈다.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온실과 달리 바깥 날씨는 다소 무더웠다.
여름이 다가오는 건지 부쩍 따가워진 햇빛 아래서 그녀는 팔다리를 쭉쭉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물론 지금은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어째 그 유연한 행동은 꼭 고양이가 어설프게 사람 흉내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둘째 제리가 세리아 곁으로 다가왔다.
“오빠 안녕.”
그에 세리아가 손가락을 성의 없이 까딱이며 인사하자 제리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는데, 그게 꼭 뭘 새삼스레 인사하냐는 듯싶었다.
나제리는 다섯 형제 중에서도 유독 차분하고 무덤덤한 편이었는데, 그게 심하면 간혹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안경을 껴서 그런가.’
난데없는 생각과 함께 그를 면밀하게 관찰하자, 그 따가운 시선에 제리가 느닷없이 안부를 물었다.
“세리아, 요새 어때?”
“응? 어떠냐니?”
“여러 가지로.”
아무래도 사냥제와 데뷔탕트 등 커다란 행사가 남아 있어서일까. 제리도 아닌 척하지만, 못내 신경을 쓰는 듯했다.
그 마음을 이해한 세리아는 부러 더 괜찮다는 듯 나긋하게 말했다.
“괜찮아, 문제될 것도 없고. 아, 물론 이상한 게 있긴 해. 따지자면 이상한 건 아니지만.”
다소 두서없이, 편안하게 말한 거였으나 제리의 표정은 점차 심상치 않아졌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러나 정면을 응시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세리아가 무어라 운을 떼기도 전.
“모르겠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는데, 요새 몸이-”
“몸이 왜. 혹시 안 좋아? 어디가, 어떻게? 어지럽진 않고? 일단 햇빛부터 피하자. 내가 의원을 부를 테니까 진찰이라도-”
말하기 무섭게 엄청난 말들이 와다다 쏟아졌다.
덕분에 기분 좋게 생긋거리던 세리아는 한순간에 정색하며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차분하고 무덤덤하고 차가운 거 다 취소.’
그녀는 조금 피곤해지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힘없이 말했다.
“……아니, 몸이 너무 좋다고.”
그제야 아, 하고 탄성도 탄식도 아닌 영문 모를 소리가 터졌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응, 그렇지.”
멋쩍은 반응이 뒤따르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즐거운 표정으로 제리를 바라보던 세리아는 다시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요새 이상하리만큼 힘이 넘친다니까.’
정말로 ‘이상하리만큼’이었다. 활력이 전보다 넘치는 건 당연했고, 이젠 쉽게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설령 그리된다 한들 금방 회복되니, 자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나 사실 대단한 고양이가 된 거 아닐까.’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게 됐다.
‘고양이 중에서 제일 강한 고양이라든가!’
시답잖은 가정을 세우던 세리아는 일순 급격한 허탈함을 느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봤자 고양이가 고양이지.’
뭘 또 좋다고 기뻐하는 거람.
딱히 침울하지 않은 표정으로 울적한 생각을 하던 세리아는 돌연 고개를 틀며 물었다.
“그나저나 유엘은?”
“글쎄, 또 어딘가에서 책이나 보고 있겠지.”
“그래? 같이 지내는데도 잘 안 보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제리의 몸이 미약하게 움찔했다.
“요새 외출도 자주 하는 것 같고. 혹시 들은 말 없어?”
“……딱히. 그리고 원래 리커드는 성실하잖아. 가만히 있질 못하겠나 보지.”
“그런가…….”
제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유엘이 케스터 저택에 오래 머무는 것도 희한했는데, 굳이 이곳에 머물며 급한 일을 처리한다는 점은 더더욱 의아한 일이었다.
‘물론 가까이 있으니까 좋기는 한데.’
문제는 가까이 있어도 마주치기가 힘들다는 것 정도려나. 근래의 유엘은 꼭 그림자처럼 움직였으니 말이다.
‘그렇다 한들 붙잡고 뭐라 할 수도 없고.’
애초 애매한 심증만 가지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당장에 떠오르는 말 혹은 하고 싶은 말이라고는.
너 왜 자주 안 보여? 왜 나랑 안 놀아 줘? 고백은 언제 할 건데? 내가 먼저 해도 돼?
-정도지만.
‘……미쳤다고 그런 말을 할 순 없잖아.’
제아무리 유치한 마음이 든다 해도 유치하게 굴고 싶진 않았다.
끙, 미약하게 신음한 세리아는 슬슬 햇빛 아래 서 있기 힘들었는지, 제리에게 처음 인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의 없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가 볼게.”
“어디로?”
“도서관. 이거 다 읽었거든.”
“책 반납은 시종에게 시키지.”
“겸사겸사 다른 책도 보려고.”
두꺼운 책을 양손으로 쥐고 좌우로 두어 번 흔든 세리아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제리 역시 익숙하다는 듯 입술을 비틀며 웃다가 자리를 떠났다.
‘덥다, 더워.’
잠시 후 종종걸음으로 도서관에 도착한 세리아는 이마에 맺힌 땀을 쓸었다.
‘계절은 정말 급작스럽게 바뀌는구나.’
이제야 여름이 실감 나네. 그런 혼잣말과 함께 세리아는 반납용 테이블에 책을 올려 두었다.
사서는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보이지 않았다.
‘다음 책은…….’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직접 책을 찾아 나섰다.
거대한 책장 사이에 파묻힌 세리아는 고개를 뒤로 꺾어 가면서까지 열성적으로 책을 노려봤다.
“누가 서지 번호를 저런 식으로 해 둔 거야.”
하필 찾는 책이 책장 꼭대기에 있어서일까. 괜한 툴툴거림과 함께 사다리를 끌고 왔다.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붕 떠 있는 기분과 함께 묘한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높은 곳의 책을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어쩔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세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책을 빼냈다.
“이거랑…… 옆의 것도 재밌어 보이는데.”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을 보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책을 한 권, 두 권 꺼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총 세 권까지 꺼내자 느껴지는 두꺼운 책들의 묵직한 무게감에 몸이 절로 휘청였다.
‘너무 욕심 부렸나.’
뒤늦게 짧은 후회가 스쳤으나 그것보단 번거롭게 한 번 더 올라가는 게 더 싫었다.
세리아는 책을 든 채 아슬아슬하게 사다리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휘청이는 다리로 겨우 발을 내딛길 잠시.
“……꺅!”
발을 잘못 디딘 세리아는 그만 몸이 기우뚱하며 뒤로 넘어갔다.
어어……. 당혹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자, 손에서 놓친 책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세리아는 찰나에 고민했다. ‘귀찮지만 고양이로 변해야겠지?’ 따위의, 답이 정해져 있는 고민을 말이다.
그러나-
“조심해.”
누군가 등허리를 탁 받아 낸 덕분에, 세리아는 고양이로 변하지 않아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