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유엘?”
“마침 내가 도서관에 왔으니 망정이지.”
탄식을 삼켜 낸 그가 품에 안긴 세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비록 그가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세리아는 어쩐지 혼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칠 뻔했잖아.”
“그 전에 고양이로 변했을 테니까 다치진 않았을걸.”
하여튼. 뒤따른 말은 타박과는 다른 애정 섞인 무언가였다.
그래서 세리아는 얄쌍하게 눈가를 휘며 속삭였다.
“그래도 고마워.”
잠시 후 유엘은 그녀를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세리아가 떨어트린 책들을 주워 줬는데, 그런 모습과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어서일까.
세리아는 킥 웃으며 불시에 유엘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윽…… 세리아.”
어릴 적 그때와 비슷한 눈빛으로 세리아를 본 유엘은 곧장 물러났다. 반사적인 반응이었으나 어째선지 고양이 귀는 나오질 않았다.
“어라, 너 이제 귀 안 나오네?”
세리아가 묘하게 아쉽다는 기색으로 묻자, 유엘은 애써 눈을 피하며 답했다.
“……하도 당해서 이 정도로는 안 나와.”
후후, 그럼 다음엔 더 강력한 걸 해야겠군.
선명한 금안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유엘은 슬금슬금 물러나며 경고 아닌 경고를 했다.
“그렇다고 더한 건 하진 말고.”
아쉬운 입맛을 다신 세리아는 얌전히 유엘의 뒤를 따랐다. 자연스럽게 책 읽는 곳으로 그가 인도해 준 덕분이었다.
세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그러니까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큰 키와 눈에 띄게 좋아진 체격, 왼쪽 귀에 달린 기다란 귀걸이 등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불현듯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 유엘이 날 받아 낸 게 언제였지?’
그건 정말 문득 깨달은 위화감이었다.
‘분명 떨어지자마자 안았던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하나?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홀로 조금 전 일을 되새겨 보던 세리아는 순간 알 수 없는 섬찟함에 고개를 획 돌렸다.
책이 있던 자리와 사다리의 위치를 보자 더욱 등골이 서늘해졌다.
상식적으로 사다리를 밟지 않으면 자신을 받아 내기 힘든 높이였기 때문이다.
‘저 정도 높이면 날아야 가능하지 않나?’
혹시 유엘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온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자신을 잡았던 자세라던가 안정감이라던가- 하여튼 말이 되질 않았다.
혼란한 눈으로 그를 좇던 세리아는 참지 못하고 불시에 물었다.
“유엘, 혹시 점프력이 좋아졌어?”
“응?”
“아니, 나 떨어질 때 바로 받았잖아. 어떻게 그랬나 싶어서.”
뜬금없는 물음이어서일까. 우뚝 멈춰 선 유엘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다시 발걸음을 떼며 자연스럽게 답했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도약했나 봐.”
유엘이 정면만 응시했기에 세리아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평온했기에, 곧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다시 안정을 찾은 세리아가 답했다.
“하긴, 나도 요새 이상하리만큼 체력이 좋더라고.”
그 말에 유엘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체력이 좋은 이유는 그의 보석을 지닌 덕이겠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세리아는 발랄하게 외쳤다.
“아무리 고양이라도 3차 성장까지 하면 달라지긴 하나 봐!”
그 표정이 하도 신이 나 보여서, 유엘은 홀로 심각한 와중에도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유엘, 혹시 이런 쪽으로 연구하는 건 어때? 연구 제목은 ‘고양이들이여, 기죽지 마라. 최종 성장 후 달라지는 놀라운 신체 변화!’.”
책을 내려놓은 그가 선선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건 어린이 잡지에 더 어울리는 제목인데.”
“요지가 그렇다는 거지.”
귀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와 함께 세리아는 책상에 자리 잡았다.
“같이 책 읽을래?”
“응, 나도 골라 올게.”
도서관까지 들른 마당에 자리를 피하는 건 노골적으로 보이기 때문일까.
유엘은 책을 고르겠다며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조심해야겠어.’
그리고 세리아와 거리를 두자마자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너무 가까이 있는 바람에…….’
시선을 내린 그는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팔찌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팔찌 모양을 한 마속구였고, 그것은 예상했던 대로 금이 간 상태였다.
아주 잠깐 껴안았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감정이 크게 동요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마속구가 자신의 힘에 비해 월등히 약한 걸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주의할 필요가 있었기에, 유엘은 다소 참담한 심정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나 보석을 다시 받아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세리아에겐 아직 자신의 보석이 필요했으니까.
* * *
‘얘네 둘은 운명 공동체라도 되는 걸까.’
까딱까딱. 구두를 반쯤 벗은 채 소파에 편안하게 기댄 세리아는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며, 동시에 옆방의 소녀를 생각했다.
저번부터 두 사람의 방문 시기가 묘하게 겹친 탓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그때 내내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던 제이든이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삐친 조랭이떡은 평소보다 더 뚱해 보이는 것 같았다. 세리아는 대답 대신 갓 구운 빵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제이든은 콧바람을 세게 내쉬더니, 돌연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성장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저는 만나 주지도 않으시다니! 유엘 님도 마찬가지예요. 원래 수인들은 다 그러나요?”
“모든 수인이 그렇진 않은데, 우리는 그래.”
그 말엔 정말이지. 제이든은 왈칵 눈물이라도 터트릴 기세였다.
‘하기야, 내 말이 냉정해 보일 법도 하지.’
세리아는 이해한다는 듯 쿠키를 손수 건넸고, 그는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사실 3차 성장형도 고양이인 수인이 이토록 오래 성장통을 겪는 건 극히 드물었다.
그렇다 보니 제이든에겐 해가 바뀔 동안 방문을 금지한 세리아와 유엘이 성장통이라는 ‘핑계’를 댔다고 여길 법도 했다.
‘하지만 사실인걸.’
그렇다 한들 수인도 아닌 데다 곁에서 둘을 직접 보지 못한 제이든이 이 일을 곧장 이해하기엔 힘들 수밖에.
때문에 세리아도 그저 다른 화두를 제시할 뿐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이야, 제이든. 이렇게 보니까 좋네. 그나저나 전보다 차분해진 것 같은데.”
“그럼요. 저도 이제 열여섯이니까요.”
살짝 운을 띄우기 무섭게 제이든은 침착하게 안경을 고쳐 쓰며 답했다.
목소리 톤이 급작스레 낮아지며 차분해진 게 다소 우습기도 했으나, 세리아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엘은 만났어?”
“아뇨. 이곳은 케스터 가문의 영역이니, 세리아 님을 먼저 봬야죠.”
“그래야지. 역시 깍듯하구나.”
만족스럽다는 듯 흠, 소리를 낸 세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넌지시 물었다.
“사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정확히는 수인이고.”
“……제게 말입니까?”
“뭐, 어쩌다 보니.”
초롱초롱해진 제이든의 눈망울을 피하며, 세리아는 남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정확히는 제이든에게 소개하고자 데려온 사람이 아니었다.
엊저녁 시엘에게서 방문 의사가 담긴 편지가 도착했고, 오늘 아침 시엘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다.
아주 제집 드나들듯이 오지. 그런 타박과 함께 시엘의 이마를 꽁 때렸는데, 도리어 시엘은 당당하게 나왔다.
“오빠만 언니랑 노는 건 부당해. 그리고 언니 집이 남의 집이야?”
그런 맹랑한 말과 함께 시엘은 본격적으로 집 안을 누비고 다녔고, 오후엔 미리 약속을 잡은 제이든이 도착했던 거다.
그러고 보면 전에도 이런 식으로 둘이 만나지 않았던가.
‘꼭 둘이 짜기라도 한 거 같다니까.’
그렇다 보니 세리아로서도 황당할 수밖에.
“제이든, 아마 너도 친해지고 싶어 할 상대야. 유엘의 동생이거든.”
“유엘 님의 동생분이라면…… 설마 저번에 뵈었던 귀엽고 깜찍한 검은 고양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잘 아네.”
뭐라 더 해 줄 말이 없었다. 세리아는 곧장 문 쪽을 향해 넌지시 소리 냈다.
“같이 놀아도 된대-!”
공허한 외침과도 같은 말이었으나, 놀랍게도 잠시 후 시엘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딱히 같이 놀자고 한 적은 없는데.”
“심심하다고 울상이던 게 누군데.”
세리아에겐 씨알도 안 먹힐 새침함으로 무장한 시엘은 도도하게 걸어 들어왔다. 어째 흥, 하는 콧소리도 낸 듯했다.
그러고선 쓰지도 않는 부채를 촤르륵 펼치더니, 긴 속눈썹이 돋보이도록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초면이군요.”
“둘이 구면이지?”
어라.
어쩌다 세리아와 시엘은 동시에 입을 열었는데, 하필이면 두 말이 정반대를 향했다.
어색한 침묵이 짧은 시간 내 감돌았으나, 시엘은 괘념치 않다는 듯 세리아 곁에 앉았다.
“……처음 보는데?”
그러고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세리아의 귓가에 소곤댔다.
덕분에 조금 황당했지만 시엘이라면 확실히 그럴 법도 했다.
벌써 그녀를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줄을 선다는데, 만난 지 한참 된- 그것도 아주 잠깐 봤던 제이든을 기억하긴 힘들 수밖에.
세리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제이든을 보자, 내내 얼빠진 표정을 짓던 그가 버벅거리며 입술을 뗐다.
“죄, 죄송하지만 저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이든, 너마저!
하지만 제이든 역시 시엘이 고양이일 때 봤으니 지금 모습은 초면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엘이 그 고양이인 건 알고 있으면서.’
희한하네. 그런 생각과 함께 제이든의 얼굴을 봤는데, 하얀 떡 같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딸기잼이라도 펴 바른 것처럼 벌게지는 걸 관찰할 수 있었다.
‘덥나?’
세리아는 그런 반사적인 생각과 함께 재빨리 중재했다.
“시엘, 여기는 제이든 브레일. 수인은 아니야. 제이든, 이쪽은 시엘 리커드. 말 안 해도 어느 정도 알지?”
“네, 네! 여, 영광입니다.”
당혹스러울 땐 말을 버벅거리는 제이든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그 빈도가 심했다.
게다가 부산스럽게 안경을 계속 고쳐 쓰는 건 물론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말이다.
‘……쟤 왜 저래.’
그런 순수한 의문과 함께 시엘을 흘긋 보자, 그녀는 평소보다 배로 도도하게 행동했다.
‘……얜 또 왜 이래.’
다소 까칠하게 보일 정도로 차갑게 구는 모습에 세리아는 좀 전에 했던 생각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사춘기인가.’
확실히 시엘이라면 그럴 나이가 되긴 했다. 구애하는 남성이 하도 많다 보니, 저런 도도함이 자연스레 나올 법도 했다.
“고, 고양이일 때와 비슷…….”
“아, 네.”
“그때처럼 귀…… 아, 아니. 그보다 더…….”
세리아는 측은한 눈으로 여전히 뚝딱거리는 그를 응시했는데,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곤 침묵.
“…….”
세리아는 둘을 흘긋 번갈아 보며, 쓰지도 않은 차에 괜히 설탕을 더 탔다.
챙- 티스푼과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색하게 공간을 감쌌다.
‘쟤도 사춘기인가.’
난감한 표정으로 둘을 살피던 세리아는 피곤한 한숨을 삼켜 냈다.
나도 이제 동생들이 버거운 나이라도 된 걸까.
지금 그녀에겐 또래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