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세리아는 다음 날 곧장 유엘을 찾았다.
감기는 어떠냐고 묻자 그는 잠시 갸웃거리더니, 곧 아, 하는 짧은 반응과 함께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그래도 그는 한동안 비가 쏟아지니 조심하라, 창문은 절대 열고 자지 말라는 애정 섞인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다행히 장마는 오래가지 않았다. 수로가 넘치기 전, 여름날의 뙤약볕이 반짝했으나 이전만큼 기온이 높진 않았다.
그리고 그맘때쯤 세리아 앞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아가씨, 황실 의상실로부터 물건이 왔습니다. 시종 하나가 이곳까지 직접 들고 왔더군요.”
“발신자는 칸?”
“알고 계시는군요.”
집사의 푸근한 말에 어깨를 으쓱한 세리아는 곧장 소포를 풀어냈다.
“와아……!”
그 안엔 곧장 감탄이 터질 정도로 아름다운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바로 세리아의 데뷔탕트를 위한 드레스였다.
“시녀를 불러 줘. 당장 입어봐야겠어.”
“그러겠습니다.”
집사는 자신이 더 몽글몽글한 표정을 짓더니 곧장 나가 금세 시녀를 불렀다.
세리아는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고 간단한 치장까지 끝마친 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봤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시녀의 진심 어린 칭찬에 세리아는 “역시 그렇지?”라며 발랄하게 대꾸했다.
초가을에 치러지는 데뷔탕트에 맞춰 드레스는 가볍고 산뜻했다.
색상은 눈동자 색보다 더 밝은 금빛이었고 발목 부근에선 물결이 치듯 풍성하게 레이스가 표현되었다.
‘이런 색 옷은 처음이네.’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았으며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드레스였다.
무엇보다 세리아와 놀랍도록 어울리는 것이, 보통 안목이 아니었다. 아무리 유명한 디자이너라도 이 정도의 기량은 발휘하긴 힘들 터.
‘이게 카네리 롱샤의 실력.’
그리고…… 어쩌면 칸나의 실력일지도 몰랐다.
어릴 적 맺어졌던 특별한 후원 관계를 상기하자 가슴이 기분 좋은 설렘으로 콩콩 뛰었다.
“아가씨, 구두도 착용해 보시겠어요? 소포에 함께 들어 있었어요.”
그때 시녀들이 구두를 비롯해 장갑과 장신구들을 건넸다. 모두 드레스를 만들 때 같이 만든 듯, 디자인이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좋아.”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은 세리아는 즐겁게 나머지 복장도 착용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보던 세리아는 돌연 방을 나가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서일까,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유엘!”
마침 세리아는 찾고자 했던 상대를 바로 마주칠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유엘은 익숙한 부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
“어때?”
눈부신 자신의 고양이 친구가 있었다.
세리아는 보란 듯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끼를 부렸다. 그 장난스럽고도 매력적인 몸짓, 말갛고 순수한 미소가 너무도…….
“유엘?”
표현 가능한 모든 언어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유엘은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리다 금세 포기한 채 꾹 다물었다.
대신 그는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감췄다. 그건 순수한 감탄의 표현이었으며 본능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
차마 시선도 못 마주친 채 눈만 느리게 깜빡이던 그는 잠시간의 정적 후에야 떨리는 눈동자를 그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와 청초한 표정이 수줍어하는 소년 같기도 했으며 사랑에 빠진 모든 생명체가 지니는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척.”
애써 힘겹게 뗀 말이었으나 쉽게 이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 깊은 눈동자 이면의 것을 눈치챈 세리아는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두근거리는 기분 좋은 전율이 전신으로 퍼져서 꼭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으, 응. 디자이너가 잘 만들었더라고.”
때문에 세리아는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쑥스러운 듯 몸을 꼬듯이 흔들다가, 민망함에 괜스레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맞다, 유엘. 혹시 기억나?”
쾌활한 물음에 그제야 유엘도 손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완전히 갈무리된 건 아니었기에, 세리아는 멋쩍은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왠지 죄짓는 기분…….’
실로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유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또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꼭 성자가 유혹을 못 이기고 타락했을 때의- 그 복잡한 감정과 눈물이 뒤섞였을 때의 표정 같았으니까.
“나 예전에 후원했었잖아.”
아무렴 세리아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으려 애썼다. 갑작스러운 그의 눈빛이, 달라진 분위기가 낯간지럽기만 했다.
“후원?”
“응, 칸나라는 아이.”
“……아, 기억나.”
기억을 더듬던 유엘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에겐 세리아가 벅찬 표정을 지으며 신나 했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했다.
“어쩌면 이 드레스, 그 아이가 만들어 준 걸지도 몰라.”
“황실 디자이너가 만들었다지 않았어?”
“응. 그 디자이너가 칸나가 아닐까 싶은데…… 아직 확실하진 않아.”
세리아는 왠지 모를 쑥스러움에 볼을 긁적였다. 꼭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모를 뿌듯함이 마구 밀려왔다.
“아마 데뷔탕트 이후엔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자세히 말해 줄게.”
“그래, 나중에라도 말해 줘. 꼭 듣고 싶어.”
그때까지 잘 참아 볼게.
뒷말을 삼켜 낸 그는 어딘지 묘연한 시선을 던졌다.
다가올 모든 것이 해진 과거의 일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 * *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오던 때. 세리아에게 정체를 들킬 뻔했던 그날, 유엘은 처음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최후의 변화까지 일어나기 전, 가까스로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대신 반인반수의 모습을 해야만 했다.
피가 들끓었으며 리커드 가문의 자랑거리라 할 만한 특별한 인내심과 차분함마저 전부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팔다리에는 검푸른 비늘이 그물처럼 드러나더니 이내 갑옷처럼 단단하게 신체를 덮었다.
고양이 때의 귀와 꼬리는 사라졌지만, 거대한 꼬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마저도 반인반수의 형태라 그 정도 크기를 유지했던 거지, 완벽한 드래곤으로 변했다면 드넓은 방도 그를 품지 못했으리라.
겨우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되돌아왔던 날로부터 며칠 후, 채 안심하기도 전 유엘은 또다시 육체의 극심한 변화를 느껴야 했다.
본능적으로 위험함을 알아챈 그는 창문을 통해 탈출했다. 그 순간 폭풍과도 같은 거대한 바람이 불고 천둥보다 섬뜩한 울음이 저택을 뒤흔들었다.
“젠장, 설마!”
저택에 남은 형제들이 급히 달려갔으나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혹여나 유엘이 폭주할 때를 대비해 알아 뒀던 비밀 근거지로 빠르게 이동했고 그곳에서 블랙 드래곤을 마주하게 됐다.
강인하기로 소문난 케스터 공자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강력하고도 서늘한 위용. 그것이 ‘그 존재’와의 첫 대면이었다.
다행인 건 그날 세리아가 레이디들과의 사교 모임이 있어 곯아떨어진 상태였다는 거다. 물론 큰 소리가 났을 땐 흠칫 놀라 깨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그날 이후 케스터 공자들은 유엘의 폭주를 막고 말이 새지 않기 위해 힘썼다.
그의 폭주가 빈번해질 우려에 골치 아픈 건 어쩔 수 없었으나, 책임을 다할 수밖에.
* * *
며칠 후, 가벼운 외출을 하고 온 세리아는 새삼 저택 내부를 찬찬히 훑어봤다.
‘이상하네.’
날 때부터 자란 집이었으나 근래 들어 이상하리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집안이 어수선해진 게 체감될 정도였다.
전에는 안 그러는 것 같더니 시종들은 꼭 네다섯 명씩 짝을 이뤄 조심스레 움직였고, 거의 모든 말을 귓속말로 주고받는 것 같았다.
‘뭔가 숨기는 것 같단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침 지나가는 시종 한 명을 살펴보자, 그 따가운 눈초리에 놀란 시종은 진땀을 흘리며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물어도 제대로 답도 안 해 주고.’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으나 막상 그에 관해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하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렇다 한들 집안사람들이 자신을 골리기 위한 일을 꾸미진 않을 테니 그저 믿고 기다릴 수밖에.
그렇게 저택을 살펴보던 세리아는 시종들이 유독 분주하게 어딘가로 움직인다는 걸 깨달았다.
‘저긴 마롱 오빠 방인데.’
호기심에 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재빨리 움직여 시종들 틈에 파고든 세리아는 단숨에 마롱의 방에 침범했다.
“세, 세리아?!”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적잖이 놀란 마롱이 턱을 늘어트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다가 황급히 옷을 입으려 했으니까.
그러나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세리아는 마롱의 다친 상처를, 그 위를 두른 붕대들을 이미 봐 버렸으니까.
“그 상처는 뭐야?”
낮게 깔린 목소리엔 상대가 누구든 혼쭐을 내겠다는 살벌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봤자 마롱에겐 영 어려 보이는 막내이자 귀여운 고양이일 뿐이었지만.
‘세리아가 날 지켜 줄 것처럼 굴다니!’
마롱은 감동한 속내를 숨기며 밝은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마롱이 유엘도 아니고, 그런 미소로 넘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걱정된단 말이야.”
막내의 걱정은 실로 대단했다. 한순간에 사르르 녹은 마롱은 마음이 약해져 “음…….” 하며 뜸을 들이다가, 세리아가 작정하고 매달리자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드래곤을 막고 있어.”
“드래곤?”
“응, 원래 갓 성장한 드래곤들은 난폭하거든. 기억해? 우리도 갓 성장했을 때 그랬잖아. 드래곤은 더 심하지. 그래서 형들이랑 막고 있었어.”
“고양이는 안 그래. 하여튼 그걸 왜 오빠들이 책임지는 건데?”
“어…… 그, 그건.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또 우리가 워낙 강해야지. 그리고 본보기도 될 테고…….”
“사람들도 알아?”
“원래 미덕은 요란스레 떠벌리고 다니는 게 아니야.”
오빠들이 언제부터 그런 걸 챙겼다고?
못 미더운 눈빛엔 의구심이 가득했으나, 마롱은 서둘러 대화를 끝내 버렸다.
“아무튼, 리리는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지?”
그렇게 말했대도 걱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드래곤이라니. 그것도 난폭하게 날뛰는 드래곤이라니!
가리 오빠만 봐도 드래곤이란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데, 대체 그걸 왜 오빠들이 막아야 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세리아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 ‘갓 성장한 난폭한 드래곤’에 대한 안 좋은 감정만 쌓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