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세리아는 그가 다분히 정상이 아니란 걸 깨닫곤 이전보다 더 힘을 주어 확실히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밀리긴커녕 되레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돌연 빗장뼈 근처에서 예상치 못한 감촉이 느껴졌다.
쪽- 하는 소리도 얼핏 들린 것 같았다.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 세리아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걸 인지해야만 했다.
“뭐, 뭐 하는 거, 야…….”
하도 놀란 탓에 말도 뚝뚝 끊겼다.
유엘이…… 난데없이 키스했다.
물론 키스라고 하기엔 다소 애매하지만……. 아무렴 입술에 한 게 아니라 다행이라 여기기에도 어색한 위치인 건 틀림없었다.
그래서였다. 세리아는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고개를 낮춘 뒤,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해 은밀하게 속삭였다.
“……너 미쳤어?”
“…….”
당연하게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기야, 미쳤냐고 물었는데 그렇다고 대답하면 진짜 제정신이 아닌 거겠지.
세리아는 허, 하는 헛웃음과 함께 몸을 비틀었다. 한 번, 두 번, 시도가 더해지자 그건 곧 몸부림에 가까워졌다.
‘무슨…… 꿈쩍도 안 하잖아.’
바위를 민다면 이런 느낌일까. 남들이 본다면 앙탈이라도 부리는 줄 알 법한 우스운 몸부림일 것이다.
세리아는 밀려오는 무력감에 전략을 바꿔야만 했다.
그녀는 어깨를 밀던 손을 뻗어 유엘의 귀를 붙잡았다. 그리고 회심의 눈빛으로 쭉쭉 잡아당겨 봤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엔 목표를 머리카락으로 바꾸어 꽤 세게 당겼는데도 그는 여전했다.
“읏…… 간지러워!”
그러는 동안에도 검은 머리통은 눈치 없게 비비적거렸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게 예민한 피부를 쓸어 대니 몸이 절로 비틀렸다.
“왜 이러는 거야?”
간지러움을 참느라 찌푸려진 미간을 한 채 묻자, 유엘이 움직임을 멈췄다.
다만 그는 전처럼 다시 세리아와 눈을 맞춰 왔다. 덕분에 서늘해진 눈동자에 푸른 욕망이 일렁이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참기 힘들어.”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무겁게 움직였다. 느릿하게 이어지던 문장은 결정적인 단어를 맥없이 빠트렸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 것만 같았다. 그야 저 푸른 눈이 빠트린 말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일까. 세리아는 충동적으로 되물었다.
“……참지 말라고 하면?”
그가 원하는 게, 원하면서도 이토록 인내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후회할 거야?”
별다른 기대 없이 넣었던 열쇠가 자물쇠를 딴 것처럼, 목석같던 그의 어깨가 덜컥- 눈에 띄게 들썩였다.
여린 양팔을 붙들던 손에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불시에 힘이 다시 가해졌다.
“으…… 유엘.”
생리적인 고통에 미간이 자연히 찌푸려졌다. 막상 유엘은 본인이 힘을 준지도 모르는 기색이었기에 더 황당할 노릇이었다.
물론 참을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이긴 했으나 얌전히 참을 이유는 없었다.
벗어나려 노력하자 그가 다시금 단단히 붙잡았다. 힘에 부쳐 포기하면 그도 힘을 풀었다.
희한하게도 유엘은 밀어내면 필사적으로 붙들려 하고, 막상 붙들고 나면 그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으려 했다. 지금처럼.
“이러지 마.”
덤덤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퍽 절절했다. 세리아 자신도 놀랄 정도로.
스스로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니었던 걸까.
혼란스러움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하기야,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유엘이 낯설게 행동할수록 외면하고자 했던 불안이 자꾸만 마음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유엘의 변화는 언제나 그녀와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으니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성장을 겪을 때마다 그는 불안정해졌고 당연하다는 듯 자신으로부터 멀어졌었다.
3차 성장까지 끝마치고 저택에 함께 지내게 될 땐, 그간의 불안이 모두 기우에 불과할 거라 믿었는데, 도리어 유엘의 행동은 더욱 묘연하기만 했고.
그런 그가 점차 변해 간다는 걸 느끼지 못할 리가.
지금만 해도 말없이 훌쩍 사라지곤 하는데, 유엘이 어느 날 홀연히 자신의 곁을 떠나진 않을까 불안하지 않을 리가.
“……유엘.”
날 불안하게 하지 말아 줘.
간절한 바람을 담아 세리아는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엘 리커드!”]
그러자 고장 난 수레가 덜컹거리며 출발하듯 유엘은 화들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진심을 담아 부른 게 통한 걸까. 세리아는 감성적인 눈빛으로 그를 봤다. 비틀거리며 정신을 추스르는 그 모습을.
당황한 유엘은 한순간에 세리아에게서 떨어지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쿵. 얼마 안 가 침대 프레임이 그의 등을 받쳐 준 덕에 완전히 넘어가진 않을 수 있었다.
“너 요새 이상해. 알아?”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세리아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로 뜨여진 눈매는 꽤 싸늘했지만, 그것보단 애처로움이 더 느껴졌다.
“네가 그러면 나는…….”
“……세리아?”
딱히 뒷말을 완성할 생각이 없던 차에, 유엘이 적절하게 말을 끊어 냈다.
그는 놀란 낯빛으로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막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없이 물었다.
“네가 왜 여기에…….”
“……뭐?”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곧장 세리아의 황당한 반문이 돌아왔다.
그야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정말로 기억조차 못 할 정도였다니.
말을 잃은 입술이 두어 번 달싹이다 결국엔 맞물렸다.
세리아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고 그건 유엘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은 맹렬했고 한쪽은 혼란했다.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각자 다른 이유로 말문이 막힌 둘은 나름의 정리 끝에 다시금 서로를 마주했다.
“설마 기억 안 나?”
“……이제는 나.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유엘은 여전히 황망해 보였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거칠게 쓸던 그는 이내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미안해. 그러니까…… 많이 놀랐지?”
아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유순한 음성이었다.
그래서일까. 세리아는 조금 누그러진 기색으로 답했다.
“……그렇게 놀라진 않았어.”
딱히 말을 잘 듣진 않았지만, 아예 안 듣지도 않던걸.
들으라는 듯 뒷말을 중얼거리며.
“혹시 뭐, 몽유병 같은 거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건 아닌데.”
고개를 비스듬하게 튼 그가 손끝으로 입술을 훑었다.
몽유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좀 전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까지 도달해야만 했다.
왜 그가 잠시 이성을 잃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가장 큰 이유는 보석을 잃어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려 줘야만 할 테니까.
“……아니야. 미안해, 세리아.”
그래서 유엘은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어물쩍 넘어가는 건 정말 싫었지만, 당분간은 그래야만 했다.
“미안, 꼴사나운 모습 보여서.”
언제까지 이 덧없는 사과와 거짓 행동이 이어져야 할까. 절로 고개가 떨궈졌다.
“……이만 돌아가 줘.”
비참함마저 엿보이는 목소리였다.
세리아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이내 가늘게 눈을 떴다.
영락없는 고양이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세리아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그렇게 필사적이니까, 나도 속아 줄게.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힘없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한 세리아는 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돌리기 전, 잠시 멈춰 섰다.
하고 싶은 말들이 수도 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중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일지 몰라 갈피를 못 잡은 손이 허공에서 삐끗했다.
“나는 네 편이야, 유엘.”
결국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다소 뜬금없는 진심이었다.
마음은 가라앉았으나 낯부끄러움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시에 후련한 감정마저 들었다.
세리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 * *
다음 날, 방에서 나오던 세리아는 뜻하지 않게 유엘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찾아다닐 땐 안 보이고, 어색할 땐 만나게 되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일까.
세리아는 찰나에 인생을 깨우치며 뻣뻣하게 몸을 움직였다.
“좋은 아침, 세리아.”
“어? 응, 너, 너도 좋은 아침.”
녹슨 이음쇠처럼 부자연스럽게 답한 세리아는 뻘쭘하게 그 앞에 서 있다가, 곧 부모님을 뵈러 자리를 떴다.
‘……아니, 근데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해?’
뒤늦게 그런 생각과 함께 묘한 억울함마저 들었지만, 딱히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리아의 데뷔탕트를 앞두고 저택이 분주하여 어색함을 길게 느낄 새도 없었다는 점이랄까.
오늘만 해도 데뷔탕트와 관련해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신경 쓰이는 게 많네.’
여러모로 말이지.
하아, 절로 한숨이 흘렀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세리아의 데뷔탕트 날이 다가왔다.
세리아는 치장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늘 전담 시녀 한 명이 그녀를 담당해 왔었는데, 오늘은 서넛이 그녀의 치장을 맡게 됐다.
그뿐 아니라 뒤로도 십여 명이 넘는 시녀들이 드레스를 비롯해 각종 장신구를 줄줄이 들고 서 있었으며 밖은 마차를 꾸미고 말 상태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날이 날이니만큼 모두가 심혈을 기울였다.
“다들 유난이라니까.”
마치 남 일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세리아라고 긴장이 안 될 리가.
“세리아가 단연 눈에 띄겠군.”
“누구 딸인데.”
한편, 평소보다 더 주책맞게 말을 주고받던 그녀의 부모는,
“날 닮아 그런 거 아니겠어?”
흐뭇하게 웃으며 동시에 그 말을 했고 그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맞닿았다.
“세리아는 날 닮았지.”
공작부인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고,
“그래도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던데.”
공작은 그 불꽃 같은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면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런 기세가 바로 옆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공작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애처롭게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다행히 오늘의 주인공이 가까이서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얘기 하고 계세요?”
“무엇일 것 같니?”
“뭐겠어요. 뻔하지.”
그렇게 말하며 입술 양 끝을 부드럽게 말아 올린 세리아는 눈치껏 한마디 거들었다.
“오늘 가장 주목받을 사람에 대해서 아니겠어요?”
호호 웃음을 터트린 어머니는 실없이 맞장구를 치고 있는 남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얘 좀 봐. 가끔 느끼지만, 이런 뻔뻔한 모습은 당신을 쏙 빼닮았다니까.”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퍼질수록 공작은 흐음, 억지로 인정하는 듯한 신음을 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치 ‘꼭 이런 것만 닮았다고 하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래도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해가 높이 뜨기 전엔 출발해야 해서요.”
“그래, 잘 다녀오렴.”
다정하게 말한 공작부인은 마지막으로 세리아의 머리를 가볍게 매만져 주었다.
딸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빛은 점점 깊어지더니 종래엔 감동이 들이찬 것처럼 열렬했다.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다 컸을까.’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세리아는 좀 전에 공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둘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서서히 뒷걸음질을 쳐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다시금 남편 어깨를 툭 치며 “저 봐, 당신이랑 똑같잖아.”라고 속삭였다.
“세리아, 올해 데뷔탕트는 네가 주인공이란다.”
마차를 타기 위해 멀어져 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공작은 담백하게 사랑을 전했다.
“정말 그래 보여요?”
“그렇고말고.”
“그러면 됐어요.”
덤덤하고도 깊은 애정에 세리아는 잔잔하고도 환한 미소로 보답했다.
“전 그거면 충분해요.”
이미 데뷔탕트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