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황녀의 말대로 닷새 뒤, 유엘은 출정했다.
마물과의 전쟁이니 출정이라는 표현은 적절했다. 비록 지원되는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도저히 전쟁에 나가는 모습 같지 않아서 그럴 뿐.
‘정말 최소한의 인력만 보내는구나.’
구색만 겨우 맞출 뿐, 모든 건 유엘에게 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괜찮아. 유엘은 유해 보여서 그렇지 원래 뭐든 잘 해내니까.’
아무리 황실이어도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니 유엘에게 맡기는 거겠지. 설마 리커드 후작가의 장남을 사지로 내몰 리가.
‘그리고 블랙 드래곤은 아주 강하다잖아.’
세리아는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또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한순간의 위안은 정말 한순간으로 끝나 버려서, 그녀는 유엘이 떠난 이후 며칠간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 보니 얼굴이 전에 비해 수척해지는 건 당연했다.
처음 가족들은 세리아를 위로했으나 이제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보석이 없으니 또 아파지는 건 아니냐.’라는 말을 저들끼리 하며 우려했기에, 세리아는 억지로라도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젠 어느 정도 힘도 났고.
“자료가 여기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기운을 차린 세리아가 가장 먼저 한 건 전에 찾아 뒀던 자료를 다시 보는 거였다.
블랙 드래곤, 각인, 그리고…….
“드래곤 룰러…….”
보다 말았는지 펼친 페이지는 깨끗하기만 했다. 세리아는 멀뚱히 단어를 바라보다가 이내 집중해서 파고들었다.
「드래곤 룰러.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며 다르게 불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통된 특징이 있으니, 모든 드래곤들의 가장 위에 군림하는 자, 바로 드래곤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란 거다.」
……드래곤을 다룰 수 있다고?
세리아의 눈이 단숨에 커졌다.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문장이 심장을 세차게 두드린 탓이다.
정지된 것처럼 숨조차 미미하게 쉬던 그녀는 서둘러 다음 문장을 읽었다.
「드래곤을 통제하기 위해선 룰러만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따르면, 룰러의 언어에는법칙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극히 드물게 룰러로 타고나야 하며, 타고난다 해도 그들 스스로도 통제 방법을 뚜렷이 모른다는 게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게다가 개인마다 언어의 발현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일부는 신의 영역이라 칭해 이를 ‘신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런 그들이 수천 년 전의 전설로 남은 이유는 신전의 지탄을 받아 마녀로 몰렸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가설도 존재한다.」
두 번째 대목을 읽었을 땐 약간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결국엔 타고나야 하는 것이며, 그마저도 극소수이고, 룰러로 태어난다 한들 드래곤을 통제할 이렇다 할 방법은 전해지는 게 없다는 뜻이니까.
세리아는 허탈한 마음을 누르며 다음 문단을 읽어 내려갔다.
「일각에선 룰러의 수명을 지적한다.
옛 기록상 룰러는 대체로 수명이 짧은 경향을 보여 줬다.
과거의 수명이 지금에 비해 짧았다는 걸 고려해도 룰러의 수명은 비정상적으로 짧았다.
기록이 믿을 만하다면, 룰러는 그 자신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자멸한 게 아닌가 하는 주장도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룰러에 관한 내용은 거의 다 끝이 났고 이후로는 주제에서 벗어난 사사로운 얘기가 이어졌다.
단숨에 책을 덮은 세리아는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순간적으로 치솟은 기대감이 와르르 무너지자 크나큰 실망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하아, 속에서부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룰러로 태어났다면 유엘과의 관계도 극복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가 룰러와 비슷한 점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룰러는 아주 강하고 나는 그저 약한 고양이지.’
미련을 버리고자 한 생각이었으나 더한 씁쓸함이 몰려올 뿐이었다.
세리아는 한숨을 두어 번 더 푹푹 내쉬다가 뭉그적뭉그적 몸을 일으켰다.
‘자세한 건 앞으로 더 찾아봐야겠지.’
우선은 약속 장소로 떠날 시간이니 준비부터 해야겠다.
그리 생각한 세리아는 시녀에게 간단하게 짐을 싸라고 한 뒤 며칠간의 여정을 떠날 준비를 했다.
곧 마주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절로 떨려 왔지만, 반드시 마주해야 할 문제니 망설일 순 없었다.
결심한 세리아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 * *
“이곳에서 나이트 요새까지는 쉬지 않고 가도 꼬박 보름 정도 걸립니다. 그 안에 마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게 포착된다면 드래곤으로 변해 먼저 출발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식량 조달은 근처 마을을 통해 신속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만일 정상적인 속도로 가게 된다면, 전략은…….”
기사단장이 요새의 지리적 요건과 대략적인 전술에 관해 설명했다.
유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위선 같아 우습기만 했다.
‘결국엔 전적으로 내 책임이란 뜻이지.’
당사자도 아는 문제인데 뭘 그리 에둘러 말하느라 고생인 건지. 비웃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나.’
나도 모르게 삐딱해진단 말이지.
가벼운 반성과 함께 유엘은 토벌에 떠났다. 기사단장의 말처럼 부지런히 가도 꼬박 보름은 걸릴 만큼 긴 거리는 무료하기만 했다.
출발할 때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따분함만이 남을 정도로.
‘세리아는 잘 지내려나.’
시간이 많으면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법이다. 유엘은 그간 의식적으로 덮어 두려 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시작은 버려진 광산 옆, 작은 집에서 칩거할 때부터였다.
소문은 알음알음 퍼진다.
사실 검문관이 케스터 저택을 방문하기 전부터 유엘은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시종 두어 명과 함께 숨어 지낼 때도 그들이 구해 온 신문으로 밖의 소식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자신에 관한 소식은 애써 찾지 않아도 자연히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건 사교계 신랑감 후보 1, 2위를 다투는 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라고 할 만했다.
“유엘 리커드를 제치고 올라선 남자, 요한 칼시스……?”
그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땐, 황당함에 헛웃음부터 튀어나왔다지. 요한을 직접 만나 축하해 주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반응을 만족스럽게 해 줬을 것 같은데.’
그래도 나쁘지 않은 드래곤이 세리아의 근처에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게 느껴졌다.
유엘은 언제나 보석을 가져간 후의 그녀가 걱정됐으니까.
“도련님, 공자님께서 보낸 것입니다.”
다만 예상보다 더 이르게 닥친 문제가 그의 마음을 다급하게 했다.
“……마물?”
어느 날 밤에 도착한 케스터 공자의 서신을 통해 마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과 그에 황실이 개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소식을 전해 받은 유엘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에 관해 어렵잖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마물 봉인이 풀릴 때마다 역사적으로 제국은, 황실은 어떻게 대응했던가.
국가적으로 대응하기엔 여러모로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원인 제공자에게 해결을 맡기고 일을 잘 해내면 보상을 주는 게 그들로서는 최선의 방안일 터.
문제는 황실이 끝까지 그 힘을 톡톡히 이용하려 한다는 것 정도랄까.
그리고 유엘은 직감했다. 자신의 말로도 비슷할 것이다.
블랙 드래곤이 귀족 가문 출신이라 해서 황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귀족 가문은 기본적으로 황실에 충성을 보여야 했으니까.
유엘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치열하게 고민했다. 여전히 심란한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알려야 해.’
토벌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마음이 심란하긴 하지만, 그것에 새삼 당황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세리아가, 진실을 깨우친 그녀가 받을 충격이 걱정될 뿐이었다.
‘세리아를 속였으니까.’
그 변하지 않는 사실이 버티고 있는 한, 이제 와 상처 주지 않고 싶다는 건 욕심일지도 몰랐다.
우선, 세리아가 사실을 깨닫기 전에 먼저 찾아가 알리는 게 최선이었다.
질타를 받더라도 그건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
적어도 외부의 소식을 통해 알리고 싶진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출발해야겠어.’
밖을 보니 벌써 어둠이 내려앉은 상태였다.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드래곤으로 변해 날아가면 새벽엔 도착할 수 있겠지.
그런 희망과 함께 간 것이건만.
“……유엘?”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리아와 마주하는 바람에 미처 드래곤 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세리아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끝내 놀라 주저앉을 땐, 고요한 낯으로 얼마나 좌절했던지.
그러나 불안한 육체가 삿된 짓을 벌이기라도 할까, 차마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흔들리는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는 눈빛.
그 눈을 마주하자 유엘은 돌연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좋든 싫든 우리는 각인된 대상을 평생 잊지 못하지. 너는 그런 상대를 네 손으로 죽여 버리는 고통 속에 살고 싶나?”
저보다 먼저 예정된 길을 걸은 자. 각인된 배우자를 죽이고 뒤늦게 후회하는 블랙 드래곤, 게시펠.
“상대를 도망치게 해라. 상처를 줘야만 해. 목숨을 살리려면, 마음에 상처를 줘야 한단 말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올수록 입안이 바짝 말라 가는 게 느껴졌다.
“너의 정체를 드러내고 위협해라.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공포심을 심어 줘. 한 치의 망설임도, 한 치의 애정도 남지 않도록.”
“아주 두렵게 해야만 해. 네가 어떤 존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도록. 그리하여 멀리 도망가도록…….”
점차 몸집을 키워 간 환청은 마침내 그가 결론을 내리게 했다.
자신은 세리아를 위협해야 한다.
선한 척은 다 하던 자신의 속내가 실은 얼마나 시꺼먼지, 그것을 꽁꽁 감추고 여전히 친구인 척 구는 자신이 얼마나 비열한 놈인지…….
그걸 알리면 세리아는 자신을 향한 마음을 접고 도망칠 것이다.
세리아 케스터가 좋아하는 유엘 리커드는 이런 음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세리아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토록 쉬운 길을 두고도 그간 자신은 그렇게 고민했던 거였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세리아 곁에 있을 수 없어.’
자신은 결국 그녀를 떠나야만 했으니까. 세리아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럴 바엔 겁을 줘서 스스로 떠나도록 하는 거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상처를 줘야겠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세리아는 안전해.’
미련 없이 떠나고 나면, 나를 향한 감정도 금방 옅어지겠지.
세리아는 괜찮을 거다. 나와 함께 있다가 해를 당하는 것보다는 더한 최악도 없을 거다…….
게다가 자신 말고도 좋은 드래곤은 분명 있을 테니까. 그중 상성이 맞는 자와 사랑하면 될 것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와…….’
거기까지 생각이 뻗치자 세상이 왈칵 뒤집히는 것만 같아서 막무가내로 입을 맞췄다.
이 순간에도 널 욕망하는 나를 혐오해 주길.
그리고 널 온전히 놓지 못한 탓에, 결국 널 도망치게 하는 나를…….
‘평생 용서하지 마.’
저조차도 모를 혼돈이 피를 들끓게 했다. 이윽고 가슴속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듯이 절박해졌다.
갈증인지 뭔지 모를 감정들이 곧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정신을 놓아 버릴 것만 같이.
“어…….”
정신이 들었을 땐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한쪽 뺨에서 따끔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