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시엘이 그런다는 게 퍽 당황스러워서일까, 세리아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를 쭉쭉 뻗어 성큼성큼 움직이자 곧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근처까지 다가가자 시엘의 긴 흑발이 찰랑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가까이 왔는데도 알은체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시엘?”
생각에라도 잠긴 걸까. 좋게 생각해 보려 했으나 이 행동은 너무도 명백했다. 아무래도 시엘은 지금…….
“오랜만이야.”
“그러게.”
……토라진 게 확실하다.
처음 듣는 쌀쌀맞은 말에 세리아는 그만 다리를 휘청였다.
……뭐지?
머릿속에 물음표를 백 개는 더 띄운 채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세리아는 곧장 정신 차리고 얼른 나란히 보폭을 맞췄다.
“시엘, 무슨 일 있니?”
“딱히.”
세리아는 평소에도 느꼈지만, 시엘은 자신과 여러모로 닮은 부분이 많았다.
그러니 지금 이 행동은 모로 보아도 저가 삐쳤을 때 하는 행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혹시 화났어?”
“아니.”
“내가 뭐 잘못했어?”
“글쎄.”
사춘기…… 어렵다.
말문이 막힌 세리아는 괜스레 앞의 풍경을 감상했다. 통로 끝에 있는 정원은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웠다. 고즈넉한 저녁과 어울리는 그런 편안함.
‘여기는 완전 냉랭…….’
반면 이곳의 분위기는 겨울을 방불케 했다. 세리아는 후작 부인이 시엘과 차 한 잔 마시기 어렵다고 했던 말이 왠지 모르게 떠올랐다.
‘이유가 뭘까.’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맞춘다는 건 생각보다 더 어색한 일이었다.
세리아는 아닌 척, 곰곰이 떠올려 봤다. 시엘이 자신에게 실망할 법한 일이라면 역시 유엘과 관련된 일뿐이겠지.
그리 생각하자 시엘이 이렇게 구는 것도 이해가 됐다.
평소에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게 오빠라지만, 막상 무슨 일이 닥치면 마음 아픈 건 당연했다.
‘나는 가리 오빠가 출가할 때만 해도 허전했는데, 시엘 마음은 오죽할까.’
하나뿐인 형제가 하루아침에 낯선 존재였다는 걸 깨닫고 충격받을 시간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 것도 모자라 곧장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곳으로 떠나 버리다니.
세리아 못지않게 시엘의 감정 역시 복잡할 것이다.
“유엘 일은 유감이야. 미안해, 시엘. 내가 원망스러울 법도 해.”
게다가 시엘은 아직 어렸다. 후작 부인처럼 포용력을 갖추기엔 아직 미성숙했기에, 세리아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린 것이다.
자신의 오빠가 그녀 때문에 집에서 함께하지 못했고, 그녀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뭐…….”
그러나 진솔한 사과를 받자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세리아의 탓이 아니라는 건, 시엘도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저 슬프고 외롭고 두려워서. 그래서 누군가를 탓해서라도 이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을 뿐.
“일주일 뒤면 괜찮아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그 전에 떠날 텐데, 아쉽네.”
“……그럼 나흘 뒤.”
“많이 앞당겨졌네? 고마워.”
“애 취급 하진 마. 오늘만 이러고 말 거니까.”
비죽 튀어나온 입술과 빵빵해진 볼. 애 취급을 안 하기도 힘든 얼굴이었지만, 세리아는 큭, 웃음을 삼켜 낼 뿐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말대로 시엘은 머잖아 괜찮아졌다. 세리아를 원망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감정을 토로했다.
그렇게 서로 위로하다가 농담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시엘도 세리아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던 중 세리아에게 편지가 하나 도착했으니.
“어, 조랭이네.”
잠시 잊고 있던 존재가 착실하게도 연락을 취해 온 것이다.
원래는 케스터 저택으로 보내진 편지는 발신자가 부재중이란 이유로 다시금 여러 경로를 거쳐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온통 유엘 얘기뿐이네……. 하긴, 조랭이가 유엘을 존경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혼잣말로 중얼거린 소리를 들은 건지, 마주 앉아 있던 시엘이 호기심 담긴 눈으로 질문했다.
“조랭이? 먹는 거 아니야?”
언젠가 제이든을 조랭이떡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관해 얘기했던 것 같은데…….
아예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 같은 시엘을 잠자코 바라보던 세리아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든은 여전히 시엘에게 진심인 거 같던데.’
게다가 둘은 나름 또래니 같이 얘기하면 좋은 기회가 될 터.
“뭐, 뭔데? 왜 그렇게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새침하게 답한 세리아가 모르쇠 태도를 유지하자 시엘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실소했다.
이러한 상황에 제이든을 당장 부르긴 어렵겠지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둘을 함께 만나게 해도 즐거울 것 같았다.
‘오랜만이겠네.’
그러면 나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세리아는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함께할 사람이 곁에 있어 든든했다.
* * *
세리아는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후작저에서 지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달리 표정도 밝아지고 기운을 차린 모습에 가족들은 안도와 함께 그녀를 반겼다.
저택에 돌아온 세리아는 가장 먼저 초대장들을 정리하고 답변을 보냈다.
아무래도 유엘과 친밀했던 사이였기에 걱정 어린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모임에 참석해야겠지. 차라리 직접 주최하는 것도 괜찮겠어. 다들 유엘에 관한 정보를 앞다퉈 알아 오려고 할 테니까.’
외부 소식에 의존하기엔 정보가 너무 느렸다. 시종이나 정보 길드원에게 의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상류층 사이에서 퍼지는 말은 그 안에 소속돼 있을 때 가장 빠르고 편안하게 얻을 수 있는 법이었으니.
‘우선 당분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만 지금으로선 새로운 소식도 없을 것이며, 괜히 위로의 말을 듣다가 겨우 잠잠해진 슬픔을 건드릴 가능성이 컸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담담해진 건 아니었기에 다음에 직접 초대하겠다는 말로 적당히 거절하고자 마음먹을 때였다.
‘이건 뭐지?’
세리아의 눈에 돌연 색다른 편지가 들어왔다.
눈길을 끌기 위해 가문의 인장을 크게 찍거나 심지어는 초대장에 금테를 두른 것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게 보통의 경우.
그러나 그 사이에 단출한 편지 봉투 하나가 수수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신자는 호저 레스먼.
“레이디 호저?”
익숙한 이름이었으나 인물이 곧장 떠오르지 않았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치열하게 떠올리자 웬 여성의 목소리가 힌트를 던져 주었다.
“누가 잡상인 딸 아니랄까 봐요.”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도 같았다.
거대 상단주이자 신흥 귀족의 딸, 레이디 호저.
‘참, 약물 관련 일이 있었지.’
카멜레온을 소개해 줄 땐 순수하게 기뻐했으나, 사업에 관련해서는 굉장히 민감했던 기억이 났다.
아무래도 상단주 집안의 딸답게 자신의 사업 계획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단숨에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린 세리아는 곧장 편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레이디 세리아. 개인적인 감사 인사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십사 이렇게 편지를……?”
차근차근 따라 읽던 세리아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감사 인사라니, 계약과 관련된 일이 잘 풀리기라도 한 걸까?
간만에 호기심이 동했다. 곧장 펜을 든 세리아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호저의 답장은 시원하게 왔다.
곧장 약속 장소와 일시가 정해졌는데 호저는 세리아를 배려해 케스터 저택 근처의 카페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마침 레이디 호저가 이 근처를 구경하고 싶다고도 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한 세리아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장소에 도착했다.
“아, 세리아 님!”
그러나 호저는 그보다 더 빨랐다.
세리아가 저도 모르게 회중시계를 확인할 정도였다. 언제 왔냐는 물음에 호저는 방금 막 도착했다는 뻔하고도 호쾌한 대답을 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까지 온 건 호저 양인 걸요. 그리고 말 편히 하세요.”
“그럼 그러도록 할게요. 혹시 드시고 싶으신 차가 있으세요? 제가 디저트류는 미리 주문해 뒀어요.”
신이 나 조잘거리는 모습을 보니 활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성급한 걸 알지만 물어볼 수밖에.
“계약 건은 잘 되셨나 보네요. 참, 저는 캐모마일 차로 할게요.”
“전부 세리아 님 덕분이죠.”
능숙하게 주문한 호저는 벅찬 표정으로 손을 비볐다. 그러고선 뒤늦게 “아, 습관이 참.” 따위의 혼잣말과 함께 손깍지를 꼈다.
“아버지께서 손을 비비는 건 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늘 지적하시거든요. 사실 억울한 점도 있어요. 저는 아버지의 행동을 따라 한 거거든요.”
가벼운 농담에 세리아는 소리 내 웃었다. 그에 탄력받은 호저가 몇 가지 유머로 세리아를 즐겁게 해 줄 때쯤 주문한 차와 디저트가 나왔다.
“슬슬 본론을 말씀드릴 때가 됐군요. 편지에서도 밝혔듯,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약물 사업과 관련된 일인가요?”
“네, 모두 세리아 님 덕분이죠. 하지만 저는 어리석게도 세리아 님께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에요.”
호저가 못내 머쓱하고도 미안한 눈치로 말하자 세리아는 가볍게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지 않아요. 충분히 당혹스러우셨을 테니까요. 이해해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당시의 저는 성급하고 무지했어요. 사업을 성공시켜서 보란 듯이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었거든요.”
“호저 양은 가업을 잇고 싶으신가요?”
“아직은 능력 부족이라 그렇게 큰 꿈을 꾸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지처럼 저만의 사업을 운영하고 싶기는 해요.”
조금 쑥스러워하는 낯으로 밝히는 포부가 대단했다. 세리아는 손가락 끝으로 입가를 가리며 그녀를 격려해 줬다.
“대단하네요. 응원해요, 호저 양.”
“가, 감사해요. 하지만 정말로 아직은 부족해요. 특히 이번 일을 통해 더욱 뼈저리게 느꼈지요. 겸손하지 않으면 눈먼 계약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요.”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세리아 님의 말씀이 맞았어요. 약물에 교묘한 속임수를 썼더군요. 저들은 거짓말한 게 없다지만, 그게 사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기겠어요?”
흥,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친 호저는 순식간에 눈을 반짝이며 세리아를 빤히 봤다.
“덕분에 무리한 사업도 막을 수 있었고 저도 많이 깨우쳤답니다. 세리아 님과 같은 분을 만나게 되어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었어요.”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눈빛, 감탄 어린 시선에 세리아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호저는…… 정말 여러 측면에서 열정적이구나.
“그러니 언제든 좋으니 제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시겠어요? 미약한 힘이지만, 무엇이든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세리아가 머뭇거리자 호저는 급히 말을 이었다.
“실은 이번 기회에 아버지를 따라 타국으로 견학을 가기로 했거든요. 아버지 곁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차근차근 배우려고요.”
“그거 정말 잘됐네요. 멋진 일이에요.”
“제겐 굉장한 기회죠. 혹시 세리아 님께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화장품? 목욕제? 무엇이든 좋아요. 타국에서만 나는 것들은 더 환영이에요. 비록 제국에서 개인 무역은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도록 막아 놓았지만, 소량을 구매하는 건 가능하거든요.”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게 없네요.”
“이해해요. 사실 케스터 공작가에서 구하지 못한 물건이라면, 제가 아무리 동분서주한다 한들 구경조차 하기 힘들 법하죠. 그치만 언제든 떠오르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호저 말대로 세리아가 원하는 것을 못 구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넉살 좋게 말했다.
활짝 웃는 얼굴이 티 없이 맑아서일까, 덩달아 미소 짓던 세리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나지막이 소리 냈다.
“호저 양, 혹시 마속구에 관해 알아봐 줄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