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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78화 (78/116)

78화

큰 소리를 낼 때는 반응도 없던 그녀가 혼잣말과도 같은 작은 소리에 발이 묶인 듯 우뚝 멈춰 섰다.

“제가 아직도 형의 자리를 위협하는 배은망덕한 아우 같습니까? 어머니께선 정녕 그리 느끼신단 말입니까?”

울분이 쌓인 목소리엔 원망도 분노도 느껴졌으나 얼핏 들으면 처절하다고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건 요한 칼시스답지 않게 음정이 흔들려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하란 대로 한 게 죄입니까? 그러면 제가 대체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이제 와 지난 일을 시시비비하는 건 의미 없는 짓입니다.”

“아뇨! 저는 늘 곱씹었습니다. 형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처음엔 그리 생각했었습니다.”

으득 이를 갈며 말하는 모습이 맹수와 닮았으나 그의 앞에 있는 건 사냥감이 아닌 자신을 버린 어미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토록 저를 경계하고 미워하시는 게…….”

헛숨이 들이켜졌다. 선뜻 뒷말이 바로 나오지 않는지 목울대를 크게 꿀렁이며 감정을 추스르던 그가 마침내 선언하듯 말했다.

“꼭 친자식이 아닌 것처럼 대하시잖습니까.”

“……당분간 자숙하도록 하세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허망하리만큼 냉랭했다.

“어머니! 말씀해 주시죠!”

끝까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그녀를 향해 항의하듯 목청껏 소리 내 봤으나 굳게 닫히는 문소리만이 유일한 대꾸일 뿐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막고 가두는 저 문.

단 한 순간도 열리지 않은 문과 같은 어머니.

“제가…… 당신의 아들인 건 맞나요.”

허탈하게 중얼거리던 그는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부질없는 질문이었다.

언제나처럼.

* * *

호저와의 만남 이후 일주일 뒤, 세리아는 한 백작 가문에서 연 티 파티에 참석했다.

‘오랜만에 참석하는 거라 약간 긴장했었는데…….’

다행히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외부 사람과 교류하며 새로운 소식도 듣다 보니 머리도 한결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집에만 있으면 내내 유엘이 생각났고, 그렇다 보면 걱정이 되고 또 괴로웠으니까.

밖에 나오니 어느 정도 환기가 됐다.

“참, 그러고 보니 다들 그 소식 들으셨어요? 요한 경 말이에요.”

“혹시 드래곤이 된 것 말인가요? 그 소식이라면 귀를 막고 있어도 들릴 정도인걸요.”

“네, 한창 떠들썩했었죠. 그런데 요새 얌전히 지낸다던걸요? 그 요한 칼시스가 말이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에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무얼 그렇게까지 놀라느냐는 듯 다들 즐거이 반응하던 때, 한 레이디가 넌지시 말했다.

“글쎄요, 심경의 변화라도 겪으셨나 보죠.”

“어머, 제가 들은 건 그 반대인걸요. 맞선을 주기적으로 본다던데요?”

“그 칼시스 경이요? 물론 지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신부를 구할 수 있는 때긴 하겠지만…… 뭐랄까, 상상이 잘 안 되네요.”

확실히 그렇긴 했다.

격식 차린 옷을 입고 나와 상대 여성 앞에서 뻣뻣하게 굴 요한이라니.

상상만 해도 괴상해서 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다.

‘뭐, 뻣뻣하게 굴 것 같진 않네.’

세리아는 피식 웃으며 이상한 상상을 떨쳐 냈다.

“그런데 아무래도 가문의 압박이 있던 것 같아요. 만나는 영애마다 울린다고 하더군요.”

“……울린다고요?”

“혹은 모욕을 주거나요. 대부분 둘 다인 것 같지만요.”

그야 긴장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나 막상 무례하게 행동한다고 하니 다소 놀라웠다.

‘재수 없긴 해도 못된 사람 같지는 않던데.’

욕인지 칭찬일지 모를 생각과 함께 세리아는 잠시 요한을 떠올려 봤다.

“전 떠날 계획입니다.”

그러고 보니 떠날 거라고 했던가.

굉장히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것 같은 이미지인데, 꼭 처음 여행 가는 사람처럼 설레어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었지.

‘비장하달까, 비밀스러웠달까.’

희한하긴 했으나 세리아가 신경 쓸 영역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디로 갈 거냐는 물음엔 “어디든.”이라는 애매한 대답만 내놓지 않았던가.

덕분에 금세 흥미를 잃은 세리아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주제는 어느덧 다른 데로 튀어 있었다.

“참, 황실 수호대 말이에요.”

동시에 세리아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그녀가 심란한 와중에도 사교 활동을 하는 이유가 바로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해서였으니까.

세리아는 오늘 티 파티를 주최한 레이디의 아버지가 황실 근위대 소속 기사라는 걸 알아냈다.

레키네 황녀가 종종 토벌대와 관련된 소식을 전해 주긴 했지만 서신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리다 보니,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으려 하는 세리아로서는 이번 티 파티가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지금, 세리아는 티 파티에 참석한 보람을 느꼈다.

“듣자 하니 철수했다죠?”

그러나 예상치 못한 말이 날아왔다.

“철수요?”

세리아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이며 관심을 보이자, 그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이유를 알겠다는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네, 나이트 요새에 지원됐던 수호대가 전원 철수했다네요.”

“저, 전원요? 혹시 언제 철수했는지 아시나요?”

“저도 어젯밤에 아버님께 막 들은 소식이니…… 글쎄요, 아마 사흘 전쯤 명이 떨어지지 않았을까요?”

토벌을 지원하기 위해 나선 소수의 기사마저 도움을 끊었다니.

세리아의 얼굴이 파리해지자, 말을 꺼낸 레이디는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전투에 휩쓸릴 우려가 있어 복귀시킨 거라고 해요.”

“수호대면 이미 휩쓸릴 각오를 했을 텐데, 왜 도망을 친 거죠?”

“마물 때문이 아니니까요.”

“……네?”

“드래곤의 전투에 휘말릴 인력 손실이 염려됐다더군요.”

상황을 가늠하듯 눈이 가늘게 뜨였다.

깜빡깜빡. 두어 번 느리게 속눈썹을 깜빡이던 세리아는 그제야 이해하며 아, 하고 낮게 탄식했다.

“걱정은 더셔도 될 것 같네요.”

블랙 드래곤이 어찌나 강한지, 황실 수호대가 도리어 다칠까 봐 -혹은 방해만 될까 봐- 철수시켰다는 건 놀랍기만 했다.

청아한 목소리가 세리아를 짐짓 위로하듯 친절하기만 했다.

“친우분이시니 못내 염려되시겠지만요.”

“네, 유엘은…….”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세리아는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투로 고백했다.

“제게 가장 소중하니까요.”

어머나- 순식간에 열띤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담백한 발언은 세리아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줬다. 더불어 눈빛, 음정, 숨소리 하나마저도 열렬하게 속내를 알려 줬다.

방 안의 레이디들이 몽롱한 듯 흐뭇한 시선으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정작 세리아는 유엘 걱정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엘이 떠난 이후로 한동안 그의 소식만이 오르내렸었다.

입에서 입으로 혹은 활자로.

그러나 이제는 그 자리를 케스터 가문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유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체적으로 광고를 한다는 점일까.

그도 그런 게, 케스터 가문의 행보는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실로 요란하게 누군가를 찾는 것도 모자라 포상도 두둑하게 해 주니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요새 얼굴이 창백해진 거 모르니?”

“딱히 모르겠는데…….”

“세리아 리리 케스터. 나중에 또 쓰러져서 가족들을 놀라게 할 심산이니?”

“미들네임에 애칭 넣지 마세요. 요새 누가 미들네임 쓴다고.”

“말 돌리지 말고.”

“……알겠어요.”

케스터 부인이 엄한 표정으로 딱 잘라 말하자, 세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너그러이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장단을 맞춰 주는 게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대비하는 것도 좋고, 나를 위해 고생해 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렇다 한들 너무 소란스레 일을 벌이는 것 같다는 생각은 차마 지워지질 않았다.

“그럼 손님 맞을 준비를 하렴. 반 시진 뒤에 도착한다는구나.”

“이번에는 어떤 분이시죠?”

“헤너스 영주의 다섯 번째 아들이란다. 올해 기사 작위를 하사받았어.”

“드래곤이라서요?”

“그래, 드래곤이라서. 이번에야말로 상성이 맞으면 좋겠는데.”

케스터 일가가 애타게 찾는 이는 다름 아닌 드래곤이다.

확실히 세리아는 보석을 지녔을 때 더없이 건강했다. 하지만 보석이 없는 지금은?

아직 이렇다 할 증상은 없다지만 그간 겪은 게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드래곤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혹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을까 싶어 혈안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겨우 찾아낸 드래곤을 이제껏 몇몇 불러 봤으나 모두 세리아와 상성이 맞질 않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가리도, 유엘도. 가장 가까운 사람과는 상성이 그렇게 잘 맞았는데 막상 찾으려 하니 상성이 맞는다는 건 여간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드래곤을 찾아내고자 요란하게 홍보하기 시작했다. 숙소는 물론 마차비는 기본으로 지원해 줬으며 방문만 하더라도 소정의 사례금까지 주었다.

만일 세리아와 상성이 맞는다면 어마어마한 보상을 제공한다고 했으니 제국의 드래곤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호기심을 품을 만했다.

‘하지만 힘들게 찾는다고 해도 결국엔 임시방편에 불과할 텐데.’

이미 유엘의 드래곤 보석을 받은 적이 있어서일까, 세리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엘을 넘어설 만큼 그녀의 병을 잠재워 줄 드래곤은 없으리라.

아직 몸 안의 보석 기운이 남아서 다른 드래곤의 기운을 잘 못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그 누구도 유엘의 미미한 기운마저 이기지 못했으니, 설령 보석을 받는대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가리 오빠네서 신세 지는 게 나을지도…….’

그리고 그 정도로 약한 기운이라면 깊은 신체 접촉, 혹은 아예 보석을 넘겨받아야만 도움이 될 터.

이래저래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엔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레이디 호저가 좋은 진통제를 발견해 주는 게 더 현실적인 방안이야.’

게다가 현재까진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물론 세리아의 병은 급작스레 찾아오는지라 다들 날을 세우고 경계하는 거였지만.

그래도 우선은 괜찮았다. 정말로.

‘물론 전과 비교해서는 기운이 없어지긴 했지만.’

가족들이 걱정할까 밝히진 않았으나 확실히 보석이 있을 때와는 몸 상태가 다르긴 했다.

몸에 넘쳐나던 그의 기운이 빠지면서 느껴지는 빈자리이려나. 그도 아니면 그저 원래대로 돌아오는 과정이려나.

“이번에는 예감이 좋구나.”

그러나 기대에 찬 어머니의 얼굴을 본 세리아는 그저 빙긋이 미소 지어 줄 뿐이었다.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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