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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102화 (102/116)

102화

“냐냐냐냥? (뭐라 쓰여 있나요?)”

멍하니 있던 요한은 고양이 소리에 퍼뜩 놀라 쪽지를 가렸다.

왜 그런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속이 울렁거리며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졌다.

“……크게 상관은 없는 내용 같습니다. 그래도 좀 더 살펴보고요.”

어색한 시선과 달리 능숙한 말투로 답한 요한은 서둘러 다른 쪽지에도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정착지 루마니아 대륙. 추적 종료.」

여전히 영문 모를 내용이었다. 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쪽지를 뒤집자 그곳엔 연도가 적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전의 기록이로군.’

때문에, 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컸다.

요한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봉투 안으로 넣었다.

오래전의 기록, 도무지 알 수 없는 아버지와의 관계. 그러나…….

“냐아-먀아-? (초상화네요?)”

세리아는 앞발로 툭 작은 그림을 가리켰다.

요한은 말없이 발바닥이 가리키는 곳을 봤다. 언제 봉투에서 삐져나온 건지 그곳엔 빛바랜 초상화가 있었다. 거리의 화가가 그린 듯 정교함은 떨어졌고 형태도 많이 뭉개졌으나 한 여성의 모습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냐아앙? (아는 분인가요?)”

“……아뇨.”

하지만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요한은 멀거니 그림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여인.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찜찜한 건지.

원인 모를 초조함에 요한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봉투를 정리했다.

“냐아냥냥? (이건 다시 갖다 놓을까요?)”

아무래도 요한의 반응을 보아하니 관련 없는 내용인 듯싶었던 세리아가 운을 뗐다.

그러나 요한은 봉투를 만지작거릴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먀?”

“……아. 이건 제가 갖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건들면 안 될 물건을 건든 것 같은 불안함이 느껴졌음에도 요한은 봉투를 놓지 않았다. 도리어 들키기라도 할까, 옷 안에 숨기기까지 했다.

세리아는 고개를 기우뚱 떨궜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남은 여정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죠.”

흔들렸던 눈빛은 금방 갈무리되었다. 요한은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냐!”

톡. 세리아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 * *

무사히 임무 수행 후 돌아온 세리아는 곧장 박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호저가 준 쪽지에는 박사의 연구실 주소와 그의 소속이 적혀 있었기에 보내는 과정은 수월했다.

게다가 박사가 먼저 호저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남겼으니 돌아올 대답은 긍정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

답을 기다리는 동안 세리아는 연구팀과 마지막 작업을 정리하고 뒤를 맡겼다.

이후 호저와 가족들에게 여행 소식을 알린 세리아는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했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예상외로 여행이 길어질 수도 있겠지.’

혹시 모를 상황도 대비해야 했다. 세리아는 사소한 것까지 챙기며 이번 여행에서의 바람을 떠올렸다.

유엘과의 관계를 위한 실마리를 얻길, 그리고 돌아왔을 때 약 개발에 성과가 있길.

희망 사항을 담아 세리아는 짐을 꾸렸다.

다행히 며칠 후, 박사로부터 답장이 왔다. 흔쾌히 세리아의 방문을 승낙한 그는 자신의 연구지로 세리아를 초대해 주었다.

그리고 요한은 예정했던 계획일보다 일찍 떠나길 바랐다.

“조금 이르지 않나요?”

“날이 금방 풀려서 말이죠. 기왕이면 빠르게 떠나고 싶은데, 준비는 마치셨나요?”

“준비는 다 됐어요.”

세리아는 자신의 묵직한 여행 가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음의 준비는 아직 덜 됐지만요.”

“지금 하시죠. 하나, 둘, 셋. 옳지. 자, 갑시다.”

요한의 황당한 농담에 세리아는 픽 웃으며 “아직 준비가 덜 된 게 있어요.”라고 답했다.

마음의 준비도 있지만, 실은 아직 소식을 못 전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유엘…….’

세리아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편지를 쓸 것인지에 대해 갈등했다.

지금의 그는 무슨 연유인지 황실을 오가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한 이유로는 편지를 쓰는 게 옳은 판단인지 몰랐다.

‘나보고 미련하다고까지 했는걸.’

지난 일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던 터라 절로 입술이 삐죽여졌다.

‘그래도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다가가 줘야지.’

애써 씩씩하게 생각한 세리아는 더 고민하기 전 곧장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유엘은 현재 이동이 잦고 바쁜 데다 겸사겸사 시엘에게도 소식을 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엘에게.

나야, 시엘. 직접 말하기 힘들 것 같아 서신으로 대신해. 예상보다 바쁘게 움직이게 됐거든.

약간 당혹스러운 소식일지도 모르겠어. 어쩌다 보니 요한과 함께 여행길에 오르게 됐거든. 자세한 얘기는 돌아온 다음에 말하도록 할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 없는 동안 제이든 너무 괴롭히지 말고. 참, 언제든 내 의상이나 장신구는 빌려 써도 돼. 망가져도 괜찮으니까 부담 없이 쓰도록 해.

대신 네 혈육하고 마주치게 되면 내 얘기 좀 전해 줄래? 직접 말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알다시피 그 못난이 깜장 드래곤이 여간 바빠야 말이지.

그럼 돌아와서 연락할게.

-세리아.」

그리하여 세리아는 시엘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준비를 마쳤다.

“싸우지 말고 잘 다녀옵시다.”

“각자 갈 길 가려면 싸워야 할 텐데요?”

“그전까진 잘 지내면 되죠.”

시답잖은 말을 끝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렇게 세리아와 요한은 며칠 뒤 ‘여행’을 명목으로 대륙을 떠났다.

그리고 그 소식은 곧 사교계에 퍼져 나갔다.

* * *

레키네는 맞은편에 앉은 아버지와 눈을 맞췄다.

“이 일로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역시나 이번에도 혼인을 재촉하기 위해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

그의 한숨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레키네는 살포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요.”

“내 그동안 오해를 했나 보구나. 두 사람 모두 뒷짐 지고 버티고 있는 줄로만 알았더니, 나 몰래 손을 내밀긴 했던 모양이야.”

“제가 어찌 폐하의 명을 거부하겠어요. 하나 제가 버틴다고 느끼셨다면, 그건 폐하께서 저를 아버지의 시선으로 보셨기 때문일 겁니다.”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온화하지만은 않았다. 눈썹을 꿈틀한 황제가 레키네를 응시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딸을 결혼시키려 하고, 딸이 그 결혼을 기꺼이 받아들이길 바라는 아버지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만일 그런 아버지가 있다면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 테죠.”

“레키네 라프라니아. 내 너를 아비로서 사랑하나 황제로서 결정 내릴 일이 있듯, 너 역시 내 딸이지만 제국의 황녀로서 받아들일 일이 있는 법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러니 리커드 군과 제가 차마 손뼉도 치지 못하면서 곁에 서 있기만 하는 거겠죠.”

하여튼 한 번에 수긍한 적이 없지. 황제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차자 레키네가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뒤이어 들린,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부름에 황제의 눈이 전보다 확장됐을 무렵.

“이렇게 부를 법한 일이었다면 저도, 그도 서로를 지나쳐 각자의 길을 걸었을 테니까요.”

레키네는 어깨를 으쓱이는가 싶더니 약간은 난색을 표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페하, 저는 언제든 그와 손뼉을 마주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도 뜻을 펼치기 힘든 상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서 말이죠.”

“그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여 지엄하신 폐하의 명조차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건, 역시 남녀 간의 사랑뿐이겠죠.”

피식, 비소를 흘린 그가 팔걸이를 가볍게 내리치며 말했다.

“젊을 적의 사랑 놀음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 속절없이 끌려 한바탕 놀고 나면, 뒤늦게 무상함을 깨닫곤 고작 한순간의 감정 때문에 놓친 게 수없이 많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래도 낭만적이잖아요.”

“낭만은.”

가당치도 않다는 웃음이 짧게 들렸다. 그 노골적인 의사에 레키네는 옅게 미소 지으며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사랑보다 소유하기 쉬운 게 재력이고, 재력보다 유지하기 용이한 게 권력이라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목적이 사랑일 수도 있으니까요.”

황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반박하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의 딸이 믿는 ‘낭만’이 덧없다는 걸 알면서도, 낭만을 믿는 모습만은 순수하여 귀엽다는 듯. 마뜩잖아하면서도 애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만일 삶에서 재력도 권력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추구한다면, 찰나에 불과한 덧없는 삶에 그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고 여긴다면…….”

레키네는 잠시 말을 끊는가 싶더니 싱긋 눈을 휘었다. 그러곤 약간의 부러움과 넘치는 확신으로 말을 끝맺었다.

“그만큼 영속적인 것도 없겠죠.”

* * *

요즘의 유엘은 유달리 피로해 보였다.

요 며칠 시답잖은 이유로 내내 황제에게 불려간 탓이 컸다. 그리고 그 같은 행동의 이유는 뻔했다.

황실에서 레키네와의 혼인을 종용하는 건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반복해서 거부하고 있으나 명분이 없으니 난처할 수밖에.

하지만 그의 심경을 복잡하게 하는 소식이 새로이 들려왔다.

‘세리아가 떠났다고.’

황궁의 넓은 방 안. 창가 시트에 걸터앉은 유엘은 툭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손에는 시엘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요한과 함께…….’

한발 늦게 소식을 듣게 되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공허했다.

세리아가 대륙을 벗어났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두 가지 사실이 결합되자 한없이 복잡해졌다. 세리아가 이대로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함이 밀려왔다.

초조함에 주먹을 움켜쥐던 유엘은 곧 자조적인 냉소를 지었다.

‘바라던 바였잖아.’

여태 이 같은 결과를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차갑게 대할 때도 애써 죄책감을 덜지 않았나.

어쩌면 모든 게 완벽하게 풀릴지도 몰랐다. 세리아가 요한 곁에 남기로 정한 거라면, 자신도 세리아가 없는 어딘가에 남기를 정하면 될 일이었다.

그토록 간단한 일인 것이 너무도 명확한데.

‘이제 와 어쩌자고.’

왜 이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낄 자격이나 될까.

유엘은 입 안의 살을 깨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자신은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그러니 이 감정은 절대 후회가 아니어야 한다.

외면하고 있던 거대한 상실감이 가슴께를 뚫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지난날들의 가련했던 진심이, 진실하지 못했던 사랑이, 그토록 꿈꿔 왔던 미래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순식간에 목표를 잃었다. 아니, 정정하자. 목표는 달성했다. 다만 그는 세리아를 잃었을 뿐.

목표는 이뤘으나 그의 단 하나뿐인 삶의 목적이 사라졌다. 지독한 공허함이 밤하늘보다 새까맣게 마음을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등신.”

자신을 향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은 뒤 쿵, 창문에 머리를 박듯이 재차 기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느끼지 말자……. 당분간 그러다 보면 무뎌지겠지.

결국 내린 결론이라곤 이토록 머저리 같기만 했다.

그의 속도 모르고 밤은 더욱 까맣게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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