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은 고양인 줄 알았는데!-103화 (103/116)

103화

“죽다 살아나셨네요.”

요한이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피식 웃었다.

세리아는 홀쭉해진 얼굴로 요한을 퀭하게 보다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어 가까스로 찻잔을 받았다.

“또 배를 타느니 차라리 헤엄쳐가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뱃멀미보단 목숨이 더 중하지 않나요?”

요한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으나 세리아는 더없이 진지했다.

정말이지- 무사히 배를 타고 젠젠 왕국까지 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뱃멀미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만큼 끔찍했다.

저토록 멀쩡한 요한이 신기한 동시에 괜히 얄미울 정도로 지독한 멀미였다.

“아직도 안 좋습니까?”

“아뇨. 다만 돌아갈 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서요.”

“정 걱정되면 하늘로 날아가 볼래요? 까짓 거 드래곤으로 변하면 되는데.”

“차라리 물에 빠지라고 하세요.”

킥. 나직한 웃음과 함께 요한은 세리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합시다. 내일 박사를 만나려면 또 움직여야 하니 얼른 주무시고.”

“제가 박사를 만나는 동안 경께선 관광하신다고 했었죠?”

“뭐,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죠.”

케스터 가문에서 경호원을 잔뜩 붙여 준 덕에 요한을 감시할 수하들이 따라올 빌미가 없었다.

홀가분해진 몸. 자유로워진 시선. 원래는 세리아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느긋하게 관광이나 해 볼 요량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셨나요?”

“잠깐 옆 대륙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이웃 나라라서 멀지는 않아서, 부지런히 이동하면 늦지 않게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옆 나라면 루마니아 대륙이었던가요? 급한 용무라도 생기신 모양이네요.”

“그쪽이 뱃멀미하는 동안 생겼습니다.”

“제가 죽어 갈 동안 많은 일을 하셨군요.”

세리아는 넌지시 묻고 말 뿐이었고 요한은 대답 대신 우스운 농담을 했다.

“그나저나 케스터, 정말 괜찮겠습니까?”

요한은 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웃음기를 지우며 진중하게 물었다. 눈빛에선 옅은 불안함마저 엿보였다.

“제가 없어도 괜찮겠냔 말입니다.”

“자신감 넘치시네요. 있어도 별 도움 안 된 지 오래라는 건 알고 하시는 말이죠?”

그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아서일까. 세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부러 더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인제 와서 그런 확인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굳이 제 대답을 들어야 안심하신다면, 괜찮다고 답하겠지만요.”

싱긋 웃은 세리아는 여전히 눈부셨지만, 뱃멀미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마음이 쓰이는 인상이었다.

“신약 개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요.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다른 방안을 강구하면 되죠, 뭐.”

어쩌면 다른 드래곤을 찾을지도 모르고, 기존의 약에 의존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닥쳐서 해결할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진심이 향하는 곳으로 질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게 두렵진 않아요. 마음을 굳게 다잡았으니까요. 다만 제가 두려워하는 건…….”

유엘 리커드. 그를 떠올리자 입술이 무겁게 닫혔다.

세리아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유엘 리커드라는 목적지를 향해 온몸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려운 건 그의 외면이었으나 그건 세리아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자신의 진심을 보여 줄 예정이었다.

“어쨌든 저는 당장에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이에요. 경께선 경의 몫을 다했고 저희의 거래는 서로가 원하는 걸 얻고 끝나는 거죠. 그뿐이에요.”

보석 같은 눈동자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단단한 눈빛은 요한을 묶어 뒀던 일말의 죄책감과 불안을 단숨에 날려 버릴 만큼 강력했다.

“멋있네요.”

그래서일까. 칭찬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영광으로 아세요. 그런 여자에게 곧 차이실 테니까.”

“살다 살다 비련의 미남이 될 줄은 몰랐네요.”

미남…….

그 와중에도 태연하게 미남 수식어를 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올라오던 짧은 감흥마저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낯짝이 뻔뻔하셔서 동정 어린 시선은 없을 테니 걱정 더세요.”

“저 벌써 차인 겁니까?”

그 뒤로도 영양가 없는 농담을 몇 번 주고받던 끝에 두 사람은 잘 자라는 인사를 끝으로 각자의 방으로 갔다.

내일이면 둘 모두가 만족할 결과를 향한 여정이 시작될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요한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급한 용무라.’

글쎄. 그다지 급한 일도 아닐뿐더러 자신과는 관련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조급한 건 어째서일까.

「마지막 정착지 루마니아 대륙. 추적 종료.」

바래진 쪽지를 본 순간부터, 헛구역질하는 세리아의 등을 두드려 줄 때까지도 고민은 계속됐었다.

원인 모를 찝찝함은 그를 괴롭혔고 결국 요한은 그에 항복 의사를 밝힌 셈이었다.

‘까짓 거 알아보지, 뭐.’

어차피 세리아가 박사와 있는 동안은 그도 달리 할 일이 없던 참이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초상화 속 여자가 찾던 왕 점 발바닥이 누군지 알아낼 심산이었다.

‘세상에 나 말고도 또 왕 점 발바닥이 있다니.’

만나게 되면 동지끼리 술 한잔이라도 해야 하나.

‘돈도 두둑하게 챙겨 나왔으니까.’

요한은 삼엄한 보안 속에 보관돼 있던 가문의 자산 중 일부를 몰래 훔쳤다.

다름 아닌 블랙 다이아몬드. 요한은 그걸 일종의 대가로 받기로 했다. 그딴 집안에서 족히 20년을 지낸 값 말이다.

‘너무 억울해하진 말았으면 하는데.’

이건 그간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용의주도하게 준비한 덕이니까.

소지품을 다시 한번 확인한 요한은 뒤늦게 침대에 누웠다. 타국에서의 첫날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 * *

다음 날, 세리아는 부지런히 일어났다. 일찍 눈을 떴음에도 요한은 이미 떠난 건지 그의 방은 비어 있었다.

‘알고 보면 참 부지런하단 말이지.’

평소엔 그 부지런함을 뺀질거리는 데 써서 몰랐는데 말이야.

싱거운 생각과 함께 세리아는 박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육지로 꼬박 하루를 더 가야 했지만, 뱃멀미를 하도 지독하게 겪은 탓인지 이 정도 고됨은 별거 아니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음 날은 다행히 헤매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연구 기관에 들른 세리아가 피곤한 몸을 주무르며 잠시 기다리자 곧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락 주신 분인가요?”

“네, 세리아입니다.”

“반갑습니다. 밴입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 남성이 인사를 건네자 세리아도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박사에게 세리아는 그저 ‘세리아’였다. 공녀가 아닌 호저 레스먼의 지인이자 그의 연구에 관심 있는 한 수인.

다행히 박사는 호저의 신분이 보장되어서인지 세리아의 신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룰러’뿐이었으니까.

“실은 레스먼 양께 제 소개를 할 때도 큰 기대는 안 했었죠. 요즘 세상에 누가 룰러를 안답니까? 이례적으로 블랙 드래곤이 탄생할 때나 반짝 호기심을 드러낼 뿐이죠.”

박사는 세리아에게 시설을 소개해 주며 말을 이었다.

“그치만 레스먼 양의 주변인 중에서 한 명쯤은 관심 있는 자가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관심 있는 사람을 찾는 이유가 있나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 외에 여러 이점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사실 별다른 수확 없이 한순간의 대화로 끝날지라도 즐거우니 그만이지요.”

호탕하게 답한 박사는 곁들일 간식과 함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세리아가 앉자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했다.

주로 블랙 드래곤의 탄생과 각인 등, 자신이 겪은 일들을 에둘러 말하며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말씀 중 죄송합니다만,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앓는 병이 있어서요.”

챙겨 온 약병을 꺼낸 세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희소병이죠.”

“어떤 병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드래곤 보석이 유일한 치료제인, 예측이 불허한 원인 모를 병. 그게 제가 평생을 앓아 온 병이죠.”

자조적인 목소리로 설명하자 박사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룰러가 떠오르군요. 참, 이해해 주십시오. 잠잘 때를 제외하고 늘 생각하는지라 제 사고가 조금 닫혀 있어서 말이죠.”

“아니에요. 그런데 룰러를 떠올리신 이유가 뭔가요?”

“기록에 의하면 룰러의 평균 수명은 대체로 짧았습니다. 그 같은 공통점을 두고 저희는 그간 다양한 추측을 했었죠.”

박사가 흘러내린 안경을 쭉 올린 후 손가락을 허공에 흔들며 말을 이었다.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룰러가 본인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태생적인 힘이 크다는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룰러는 그 힘을 담는 그릇, 즉 신체적 한계에 직면하지요.”

드래곤 위에 군림하는 자. 확실히 그런 존재라면 내재된 힘이 무궁무진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왜 저와 관련 있다고 보시는진 모르겠네요.”

그런 존재와 희소병을 앓는 자신은 연관성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룰러의 힘을 감당하려면 신체적 조건이 얼마나 월등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세리아의 의구심을 이해한다는 듯 박사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드래곤만큼은 강해야 합니다.”

“하지만 룰러는…….”

“예, 드래곤을 통제하는 존재죠. 드래곤 그 자체로 태어나진 않습니다.”

“드래곤까지 못 미치더라도 강한 수인으로 태어난다면요?”

“일시적으로 룰러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하죠. 대부분의 룰러가 그렇습니다.”

이쯤 되니 박사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룰러가 떠올랐다고 한 건지 더욱 알 수 없어졌다.

세리아는 순간 부풀었던 희망이 사그라드는 걸 느끼며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국 저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로군요. 저는 호랑이도, 표범도, 하다못해 스라소니도 아닌, 그냥 고양이니까요.”

“하지만 강력한 힘의 원천인 드래곤 보석이 있다면, 제 능력을 펼칠 수 있겠죠.”

“……!”

말뜻을 알아차린 세리아는 크게 숨을 삼켜 냈다.

만일 박사의 말대로 자신이 룰러라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이 모든 게 설명됐다.

드래곤 보석이 유일한 치료제였던 것도, 요한의 보석이 전만큼 효능이 없던 것도. 모든 게 자신 안의 힘이 커지는 탓이었다면…….

“원인 모를 희소병이라고 하셨죠.”

처음으로 깨닫게 된 가능성에 세리아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녀의 양 뺨은 서서히 발갛게 상기되었고 두 눈엔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만일 그게 점점 커지는 룰러의 힘을 감당 못 해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그런 세리아 만큼이나 박사도 생기가 돌았다.

“저는 이 순간을 위해 연구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겠군요.”

억누르는 흥분감이 두 사람 주위로 세차게 퍼져 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사가 손을 내밀었다.

“분명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 함께 해 보시겠습니까?”

세리아는 곧장 그 손을 맞잡았다.

“저 역시.”

이 순간을 위해 그토록 헤맨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