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앉아.”
그러자 놀랍게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엘이 멀뚱히 서 있자 세리아가 민망한 낯으로 입가를 쓸더니 약간의 망설임과 함께 전보다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서?”
“이미 서 있는걸?”
“그, 그렇지……. 음, 그럼 엎드려?”
저가 명령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술을 씰룩거리던 유엘은 결국 낮게 소리 내 웃었다.
“내가 강아지야?”
“그…… 따지고 보면 비슷한 거 아닐까? 강아지는 주인 말을 잘 듣는다던데, 내가 룰러면 너도 내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거잖아.”
고양이 수인에게 강아지 같다는 건 흉보는 것과 다름없었으나…… 확실히 상황만 보면 비슷하긴 했다.
세리아가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자 의뭉스럽게 웃은 유엘이 성큼 다가오며 속삭였다.
“그럼 더 효과적인 명령을 해 봐.”
주황빛이 도는 금안이 가늘어지고 곧 표정이 새초롬해졌다.
긁적거린 탓인지 붉어진 볼이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작은 입술이 머뭇거리며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유엘.”
“응.”
“……키스해 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입술이 포개졌다. 그가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놓으면 세리아는 저가 꼭 크림에 빠진 각설탕이라도 된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짧은 키스가 끝나자 세리아가 어딘지 좋으면서도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정말 내 명령 때문에 한 거 맞아?”
“응, 맞아.”
……아닌 것 같은데.
금색 눈이 또 한 번 가늘게 뜨였다. 끄응, 작게 앓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괜스레 억울한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 내 명령이 아니라 룰러로서의-”
“명령 맞아, 세리아. 네가 하는 말은 다 따를 거니까.”
……하여튼 말이라도 못 하면.
할 말이 사라진 세리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자 곧 당연하다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살포시 눈을 감고 있던 세리아가 순간 어떠한 시선을 느껴 눈을 뜨자-
“……!”
회랑 저편에서 오고 있던 집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이쿠! 따위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집사는 허둥지둥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몇 초 뒤 도망치듯 냅다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저도 모르게 몸을 비튼 세리아가 숨을 몰아쉬며 집사가 떠난 자리를 봤다. 그러다 머잖아 다시금 유엘이 좀 전의 행동을 반복했다.
쪽쪽. 회랑이라 그런지 소리가 더 적나라하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민망해 죽겠네, 진짜.
[“그, 그만해!”]
난데없이 신어가 발동했다.
저도 모르게 곧장 떨어진 유엘은 한 발 물러선 채 세리아를 응시했다. 어쩐지 뾰로통해 보이는 표정과 함께.
“생각해 보면 이럴 때만 능력이 발동하는 거 같아. 사실 신어라는 것도 결국 드래곤 보석의 힘으로 쓰는 건데, 결국엔 날 밀어낼 때 가장 진심이 된다는 거잖아.”
“그, 그건……. 상황이 그렇잖아……?”
머쓱해진 세리아는 쭈뼛거리며 두 손을 뻗었다. 그러곤 그의 양손을 잡아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
“그…… 보석을 주면 나한테 동화된다며. 그러면 내 진심이 뭔지 알 수 있지 않아?”
유엘의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얄쌍하게 휘어졌다.
“아무래도 더 동화될 필요가 있는 거 같아. 아직 네 마음을 잘 모르겠거든.”
거짓말.
차마 그렇게 얘기하기도 전에 양손으로 얼굴을 쥔 그가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길 여러 번. 기어이 마속구 하나가 파삭 소리 내며 깨져 버렸다.
“야, 야……!”
당황한 세리아가 유엘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그 같은 신호에 자신의 깨진 마속구를 멀뚱히 내려다보던 유엘은 귀걸이형 마속구를 보란 듯 고개를 틀더니 싱긋 웃었다.
“아직 괜찮아. 신어 연습해야지.”
“잠깐…….”
“노력해 봐, 세리아.”
“뭐를 노력하라는-”
뒷말은 곧 삼켜졌고 그녀는 유엘의 말뜻을 알아차리게 됐다.
돌연 무언가 찢기는 소리가 나더니 드래곤 꼬리가 나왔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는 곧 세리아의 몸을 감싸듯 감기기 시작했다.
유엘에겐 미안한 말이었지만, 저게 강아지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하아…… 읏.”
태평하게 생각하던 세리아는 그가 좀 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는 걸 깨달았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유엘과 눈이 곧장 마주쳤다. 상냥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깊은 열망이 차지한 눈빛.
일전에 마주한 적 있는 그 깊고도 어두운 열기에 세리아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반사적으로 멈추라는 신어를 말하기 무섭게 그의 귀걸이도 파삭 깨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
세리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귀걸이를 쳐다봤다.
‘역시 아직은 위험해.’
하지만, 덕분에 깨달았다.
“세리아, 괜찮아?”
심각한 낯을 내려다보던 유엘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용서를 구했다.
“……미안해.”
“유엘, 이제 좀 알 것 같아.”
그러나 세리아는 도리어 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룰러는 드래곤을 통제하는 자. 신어는 드래곤을 통제하는 언어.”
획 고개를 든 세리아는 확신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내가 너를 통제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말 같아. 이젠 그 미묘함이 뭔지 알겠어.”
처음 문제를 푼 아이처럼 기뻐하는 표정이 더없이 순수해서일까. 유엘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시도해 보면 감이 잡힐 텐데, 그러려면…….”
거침없이 말하던 세리아의 목소리가 차차 줄어드는가 싶더니 속닥거리는 정도로 작아졌다.
“……아무래도 위험한 방법이 도움이 될 거 같아.”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순간 유엘은 똑똑히 알아챘다. 세리아가 말하는 위험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래?”
유엘의 눈빛이 순식간에 깊어졌다.
적어도 세리아가 말을 번복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잘 먹었습니다.”
“벌써 다 먹었니?”
“저도 여기까지 할게요.”
탁. 한 명이 식기를 내려놓자 나머지도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식사를 끝냈다.
“먼저 올라가 봐도 될까요?”
“그러렴.”
형제들은 의아해하는 부모를 둔 채 식당을 빠져나왔다.
사실 근래 들어 그들의 식욕이 부쩍 줄어든 데는 남모를 고충이 있었다.
“나 요새 속이 안 좋아.”
“……나도.”
류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하자 옆에 있던 마롱이 동조했다. 그는 체기가 있어 속이 꽉 막히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설마 너도 봤냐?”
“아, 진짜 안 보고 싶었는데…….”
마롱은 참담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요즘의 케스터 공자들은 그야말로 뜬 눈으로 악몽을 꾸는 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강제적으로 세리아와 유엘의 애정 행각 목격했기 때문이다.
도망치듯 피하려고 해도 희한하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보였다. 저주 인형이 있다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정말이지, 혼이 쏙 빠져나갈 정도로 괴로운 일이었다.
“혈육의 연애라니.”
지나가던 다노는 심오한 문제를 마주한 학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눈가가 어두운 건 덤이었다.
과거에는- 그러니까 세리아가 남자를 만나기 전만 해도 그들은 여동생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동족은 동족끼리 잘 안달까. 아무튼 연약하고 어딘가 불안불안한 막내가 어떤 속 시커먼 놈한테 홀랑 넘어가진 않을까 하는 게 그들의 큰 걱정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막상 유엘과 저렇게 되니 그 같은 감정은 싹 사그라들고 생전 처음 겪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뭐랄까. 안심은 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혈육의 애정 행각을 보는 건 고초 그 자체였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처음엔 부정.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 터.
누군가 난간에서 뿌린 찬물을 길 가다가 난데없이 뒤집어쓴 것처럼 멍하고도 황당한 표정을 짓는 게 처음의 일.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며 멀거니 보고 있자면 점점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도 모자라 자신의 머리카락을 죄 쥐어뜯고 싶어지는 충동을 겪게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매우 불쾌하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너 나중에 애인 생기면 집에 데려올 생각도 말아.”
그래서일까. 류는 한껏 질린 얼굴로 짓씹듯 경고했다.
“누가 할 소리. 너야말로 미래의 형수하고 손이라도 잡아 봐. 그냥 마주 보고 웃기만 해 봐!”
“너어? 너어어? 너 지금 나보고 너라고 했냐? 형이라고 안 해?”
“쌍둥인데 뭔 형이야, 형은. 아무튼 누구든 간에 애인하고 눈이라도 마주치고 있으면 식탁 확 엎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상상만 해도 속이 불편한 듯 마롱이 보란 듯 헛구역질을 했다.
다노는 유치하다고 홀로 중얼거리며 가던 길을 갔다.
뒤늦게 다가온 제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을 뿐이었다.
“그래서 저 짓거리는 언제 끝난대?”
“다행히 곧 끝날 거 같더라고. 젠젠 왕국인가, 거기로 가서 룰러 능력 평가 시험을 봐야 한다던데.”
“그래……. 뭐든 좋으니까 빨리 좀 떠났으면 좋겠다.”
여태 ‘어화둥둥 내 동생’을 외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리아의 병도, 둘 사이의 고비도 우선 한시름 덜었으니 됐다고 여겨서일까.
형제들은 그저 세리아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기왕이면 저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즐겁게 사랑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세리아 신나 보이던데, 요새 룰러 능력을 잘 쓰게 돼서 그런가?”
류의 말마따나 세리아의 능력은 점점 빛을 발했다. 유엘은 이제 마속구를 한두 개만 차고도 걱정 없이 세리아의 곁에 있었다.
‘동화’가 돼서 더 수월해졌다나 뭐라나.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자주 해 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꿀 떨어지는 연인 사이에 한시도 더 있기 싫어서일까, 공자들은 “그래, 다행이네.”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자리를 벗어나곤 했다.
“우리가 못 보는 새에 잘 진행되고 있나 봐.”
여하튼 오빠들이 보기엔 그저 꼴사나운 연애 행각이었지만, 저 나름대로 시험 중이라는 말은 사실인 듯싶었다.
제리가 흡족한 표정을 짓자 형제 중 세리아와 가장 친한 마롱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런데……. 룰러 평가에 합격하고 공식적인 룰러로 인정받으면 세리아가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대.”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