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나는…….”
이마를 짚으며 낮게 탄식하던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와 부질없는 가정이겠지.”
그의 가정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배우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는 희망은 너무도 달콤하고 동시에 비참했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에 게시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조금 전의 동요는 환각이었던 것처럼, 그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미세하게 더 차가워진 목소리. 두 사람은 잠시 대답을 미룬 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유엘이 입을 떼려 할 때, 세리아가 먼저 말했다.
“블랙 드래곤에 관한 모든 걸 알고 싶어서 왔어요.”
그 적극적인 기세에 유엘은 남몰래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서적에 나와 있지 않은 정보면 더더욱 감사하겠고요.”
“그렇게 해서 얻으려는 건 뭐지? 말했듯 네가 룰러라면 문제 될 것도 없을 텐데.”
자신도 모르게 다소 까칠한 반응이 나왔다. 게시펠은 뒤늦게 자신이 유치했음을 인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는 저 둘이 부러웠다. 자신과는 다르게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될 두 사람이 다행이면서도 묘한 시기심이 일었다.
그런다 한들 죽은 배우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 것을.
게시펠은 착잡한 마음으로 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오늘따라 집 안의 냉기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아시다시피 블랙 드래곤의 힘을 탐내는 자들이 많습니다.”
유엘은 부드러우면서도 진중한 낯으로 말했다. 게시펠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그를 봤다.
“윙스턴 님께서 겪으셨듯, 저 역시 국가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죠.”
“마물 토벌이었던가. 한창 떠들썩할 때 나 역시 소식을 들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토벌 이후로 폐하께선 제게 원치 않은 포상을 내리려고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너, 귀족이었던가.”
하기야, 평민 같진 않았지. 혼잣말처럼 덧붙인 게시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알겠군.”
귀족인 블랙 드래곤이라면 슬하에 있는 자식과 정략혼을 시키려 할 터.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나오는 결말이 너무 뻔해서일까. 게시펠은 도리어 자신이 더 질린다는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그쪽도 귀족인 것 같고.”
세리아 쪽을 흘긋 본 그가 당연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복잡할 것 같지만, 오히려 쉬울 수도 있지. 그래, 적어도 한쪽이 평민일 때보단 손쉬울 거다.”
탁탁.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게시펠은 두 사람의 고민을 마치 자신의 고민처럼 생각해 주었다.
“보석을 넘겨 버렸으니…….”
미간을 찌푸리며 고심하던 그는 이내 팔짱을 끼며 자신이 생각한 해결책을 말하기 시작했다.
“혹 블랙 드래곤의 4차 성장에 대해 아나?”
“성장……. 아! 맞아, 그런 게 있었지! 기억났어요.”
세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눈을 크게 뜨며 맞장구를 쳤다.
유엘이 언젠가 편지에 짤막하게 언급했던 내용이 떠오른 덕이었다.
「드래곤의 성장에 관해 연구하고 있어. 그중에서도 블랙 드래곤에 대해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블랙 드래곤의 성장은 4차까지 진행된대.」
“성장을 4차까지 한다는 거, 분명 알고 있었는데 까맣게 잊었었네요.”
세리아는 상체를 기울이며 적극적으로 답했다. 그 열정에 게시펠이 옅게 웃는 것도 같았다. 곧 착각이었던 것처럼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청년기가 지나면 블랙 드래곤은 한 번 더 성장하지. 뚜렷한 신체적 변화가 있는 것도, 성장통을 겪는 것도 아닌지라 자세히 기록되진 않았지만, 블랙 드래곤이라면 느끼는 마지막 성장이 분명 존재해. 그리고 우리는 그걸 4차 성장이라고 여긴다.”
청년기라. 유엘은 잠시 자신의 성장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성장은 언제나 그렇듯 예고 없이 오겠지만, 게시펠의 말대로라면 이르면 내년 봄이 올 때쯤 4차 성장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그 시기가 지나면 다른 드래곤과 달리 보석을 상대에게 건네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함부로 보석을 빼앗을 수조차 없는, 그 자체만으로 강인한 존재. 그게 바로 블랙 드래곤이지.”
보석을 줄 수 없다. 그 말에 유엘의 눈이 확장됐다. 조금만 더 고민해 보면 좋은 수가 생각날 것 같았다.
“처음 듣는 내용이에요.”
“그럴 수밖에. 4차 성장은 정식으로 인정된 성장 단계가 아니다 보니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지. 블랙 드래곤에게 직접 듣지 않는 한 한계가 있었을 거다.”
“기존 성장 단계와 달라 인정되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어째서 보석 관련 얘기도 없는 거죠?”
“그런 특수한 얘기는 사례가 있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뒤에야 기록되기 마련이지. 한데 당최 어느 정신 나간 드래곤이 자기 보석을 타인에게 주고 있겠나?”
자신이 말하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듯 게시펠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아주 제정신이면서도 정신 나간 행동을 한 드래곤이 제 앞에 버젓이 있었다.
“심지어 보석이 없으면 가장 포악해지는 블랙 드래곤이라면 더더욱 존재할 리가 없지.”
너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콕 짚어 말한 뒷말에 유엘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정신 나간 행동인 걸 잘 알았기에 세리아와 엇나가야 했던 과거가 불현듯 떠오른 탓이다.
“박사님께 여쭤보면 아실지도 몰라.”
작게 속삭인 세리아의 말에 유엘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이제 두 사람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단단했다. 작은 틈조차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신뢰가 보는 이에게도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게시펠은 세리아를 보며 말했다.
“네 눈은 이미 승리를 향해 있구나.”
묘하지만 기분 좋은 말을 끝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게시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님을 내보낼 준비를 했다.
“그럼 건투를 비마.”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아와 유엘은 감사 인사를 한 뒤 등 떠밀리듯 집을 나왔다.
그리고 길을 떠나려던 때.
“세리아라고 했나.”
게시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만약 네가 정말로 룰러라면.”
뒤돌아보자 문가에 기댄 그가 곧장 보였다. 모진 세월이 느껴지는 눈가의 주름은 쓸쓸해 보이기만 했다.
“……부디 도와주거라.”
팔짱을 낀 채 삐딱한 자세를 했으나 목소리만큼은 간절했다. 그래서 더욱 진심이 느껴졌다.
“이러한 불행은 나 하나로 족하니까.”
말없이 게시펠을 바라보던 세리아는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약속해요.”
그 목소리에는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어서.
게시펠은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후련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 *
세리아는 곧장 박사에게 자문했는데, 예상대로 그는 4차 성장의 여부에 관해 알고 있었다.
이후 유엘은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블랙 드래곤에겐 4차 성장이 존재하며 최종 성장을 한 뒤로는 보석을 신체에서 빼낼 수 없다.>
이 같은 내용을 증명하는 문서를 만들어 달라는 게 바로 그 부탁이었다.
다행히 박사는 흔쾌히 발 벗고 나서 그들을 도와주었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성장에 관한 증명을 객관적으로 할 순 없었지만, 역시나 최대 규모의 연구 센터답게 그들과 연결된 세계 각국에 있는 블랙 드래곤의 수가 꽤 되었다.
박사는 해당 내용을 증명한다는 문서에 블랙 드래곤들의 서명을 받아 주었다.
이 정도면 효력이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그는 룰러 능력 평가에 관한 서류도 첨부하였다.
“이거 위조된 거 아니겠지?”
“방금 말 박사님이 들으셨으면 억울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셨걸.”
유엘의 농에 세리아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만큼 좋아서 그래.”
세리아가 쥐고 있는 문서, 그 안에 찍힌 인장은 확실하게 공인해 주었다. 그녀가 룰러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혹여나. 정말 만에 하나라도 무언가가 잘못되거나 자신이 착각한 것이었다면. 그래서 룰러가 아니라 그냥 희소병을 앓는 고양이일 뿐이었다면.
모든 희망도 계획도 처참히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악몽을 꿨던 거야?”
“내가 밤에 끙끙거렸어?”
“조금.”
다가온 유엘이 허리를 숙여 세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서 이렇게 해 줬지.”
피- 바람과도 같은 소리를 즐겁게 낸 세리아는 한참이고 증명서를 보고 또 봤다.
‘내가 룰러였어.’
정말로 룰러였다. 같은 사실을 반복해서 상기하자 차츰 코가 찡해지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해.”
순간 울컥하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떨렸다. 세리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말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지난날을 보상받는 기분이야.”
지독한 성장통을 겪을 때도,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려야 할 때도 언제나 들었던 의문.
‘나는 왜 아파야 할까.’
해소되지 않던 의문이 드디어 풀린 현재, 이제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 긴 시간은 모두 무언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걸.
‘단순히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모르지.’
운이 좋아 유엘을 만났고 운이 좋아 룰러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맞물림이 조금이라도 비틀어졌다면 결코 결실을 보지 못했을 터.
이처럼 무수한 과정이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던 건 끝없는 노력과 그에 응하는 행운이 있던 덕이겠지. 아마 대부분의 일은 과정에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패하고 끝내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잊고 지내곤 한다.
하지만 그곳엔 언제나 명확한 전제가 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그 같은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
“나 역시 그런 기분이었어.”
그런 세리아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유엘이 동조하듯 말했다. 마치 고뇌가 담긴 부드러운 위로처럼 말이다.
“네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나는 내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룰러가 될 수 없었을 테고, 나 역시 내 존재를 부정했을 거야.”
세리아가 곧장 말을 이어 받았다. 더없는 진심이 오가자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엘…….”
“응.”
“내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워.”
“……뭐?”
키스라도 할 분위기였다…… 라고 생각한 건 아무래도 유엘뿐인 듯싶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그때 도망치는 시늉만 해 줘서 고마워.”
“……감사 인사는 놀리면서 하는 게 아니야.”
장난스레 웃은 세리아는 룰러 증명서 뒤에 있던 또 다른 문서를 꺼내 보았다. 해당 문서에는 4차 성장을 증인해 주는 서명으로 빼곡했다.
“네가 해 준 한 제안 덕분이야.”
게시펠에게 4차 성장에 관해 들은 후 유엘은 묘수를 떠올렸다.
“이제껏 누구도 해 보지 않은 일을 해 보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