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회
끝과 시작
* * *
벨페고르는 루시퍼와의 결전 이외의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준혁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 가짐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드는데?"
"……?"
"정말로 마음에 들어. 지금 너는 오로지 루시퍼와의 결전만 생각하고 있어. 그 뜻이 나에게 느껴진다."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도 없긴 하지."
"노닥거리다니 섭섭한데.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좋아. 그 숭고함의 결전. 내가 방해꾼이 없도록 해주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 보니 벨페고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골드 좀 있나?"
삥 뜯는 양아치 마냥 이야기를 했지만 준혁은 현재 딱히 골드가 크게 없었다.
어차피 루시퍼와의 싸움 이후에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인데 돈을 넣고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골드?"
"그래. 골드. 있으면 좀 줘 봐."
"… 몇 골드 없는데."
당황스러웠지만 솔직히 이야기를 했고 벨페고르는 준혁의 대답에 자신이 실수 했음을 깨달았다.
"아… 내가 실수를 했군. 의미가 없는 것이지."
"골드는 왜? 한 3골드 정도는 있군."
"좋아 그러면 나에게 골드를 주고 싶은 만큼 줘."
이건 또 무슨 희대의 개소리인가 싶었다가 이내 그냥 수중에 있는 금액을 다 털어서 주었다.
어차피 죽으면 다 의미 없어지는 돈이었고 얼마 있지도 않은 금액이었다.
"전 재산을 다 준 건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골드는 그거 외에는 없긴 한데… 무슨 의미지?"
"좋아. 전부를 주었다는 뜻이지? 흠. 원래는 1골드 당 1시간으로 쳐서 최대 3시간을 막아주려고 했는데. 전부를 주었다고 하니… 그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 어떤 존재도 마계에서 만큼은 전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지."
예상치 못한 나이스한 발언에 준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조심스레 질문을 했다.
"왜?"
"마음에 들었으니까."
우르크 황제인 기르메쉬와 비슷한 냄새가 아주 물씬 나는 발언이었다.
"끄응. 어딘가의 황제님과 같은 발언이군."
"… 기르메쉬를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그에게 굉장히 실례인데. 나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는 절대신과 비등한 존재야."
"어… 그러면 진짜 막을 수 있는 거야? 동대륙에서 비슷한 존재가 지원을 해준다고 하던데."
벨페고르는 동대륙을 준혁이 거론하는 순간 식은 땀이 살짝 올라왔다.
"단군의 세력이 오는 군.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작자들."
"좋은 사람들이지."
"이상에 미쳐있는 존재기도 하지. 그들이 온 다라. 하지만 딱히 이 전투를 방해할 것 같지는 않은데. 거기도 나름 상도덕이 있는 곳이라."
"거기에 예랑 내가 좀 친해. 옛날에 마계 군주를 혼자 때려 잡은 집안이라고 하던데."
"… 아. 거기."
뭔가 굉장히 강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강력한 존재들이 계속 언급이 되니 벨페고르의 표정은 어정쩡하게 바뀌었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맙네. 표정을 보니까 그 말이 진심인걸 알게 됐거든."
"거짓말은 즐겨 하지 않아. 내 취향이 아니라서."
난감하게 변한다는 것은 그가 정말로 막을 생각이 있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난감하게 변할 이유도 없었고 사라졌을 것이다.
"루시퍼는 얼마나 강력하지? 힌트 좀 줘."
"글쎄… 아쉽게도 그의 강함은 뚜렷하게 말하기가 힘들지."
"으음?"
"그래, 인간 부모가 무서운 몬스터가 나타나 아이가 위험에 빠졌을 때, 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달려드는 그런 종류의 힘이지. 약할 수도 강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그의 의지. 뭐, 어찌 되었든 베히모스보다는 압도적으로 강한 것은 동의해줄 수 있지. 종말의 힘을 쓴다고 해도 말이야."
"……."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그는 관리자인 나와 달리 '왕'으로 불리며 마계를 진두지휘 했던 존재인데."
"당신보다는 강하지 않다는 이야기지?"
벨페고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지만 알 수 있었다. 일단 벨페고르보다 확실하게 약하다는 것을 말이다.
'베히모스보다는 완벽하게 쌜 거야. 종말을 흡수했다고 했으니까. 그럼 그걸 다룰 수 있는 존재인 만큼, 음!'
대충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해보려 했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뭐, 애초에 강하다고 해도 의미가 없잖아.'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나왔고 그런 준혁의 모습을 보며 벨페고르는 정말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웃음을 터트린다라. 배포 한번 대단하군."
"큰 일 앞두고 긴장하는 것보다 이게 낫지 않겠나 싶은데."
"그것도 그렇지. 아무튼 루시퍼는 이곳에서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쭉 나가면 된다."
"음, 그것 참 좋은 가르침인데 험난 하기도 하겠다."
"일직선 도로를 하나 놔주도록 하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 보았는데 벨페고르가 손가락을 딱 튕기니 거짓말처럼 끝 없는 직선 도로가 생겨 났다.
"!?"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나는 마계의 관리자 역할이지. 뭐, 어쩌다 보니 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결론은 직선이다. 인생은 직선으로 쭉 가는 것이 좋겠지."
"음, 고맙다고 말해주지."
"그래. 미친듯이 둘이서 달리다가 부딪히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데… 드래곤들이 미쳐 날뛰는 군. 후우, 얼마나 마계를 증발 시킬 예정인지. 관리자로써 적당히 하라고 시위를 좀 하면서 자네를 지켜보도록 하지."
마계의 정원사, 관리자… 이런 표현들을 보면서 준혁은 마계 전체가 벨페고르의 영역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존재보다 기르메쉬가 더 강하다고 하면 어느 정도라는 거야? 짐작도 가지 않는데.'
루시퍼도 막연한데 그보다 더 막연한 존재가 벨페고르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기르메쉬를 칭할 때 굉장히 불편하고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래저래 걱정을 했는데 결국엔 클리어 되더라 마음 편히 가자.'
그렇게 벨페고르를 향해서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것을 끝으로 준혁은 벨페고르가 만든 길을 달려갔다.
벨페고르 역시 그런 준혁을 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나무가 있는 쪽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까?"
그러자 커다란 나무는 마계가 전이될 때의 하늘처럼 균열이 지더니 깨어졌고 그곳에는 기르메쉬가 있었다.
"그래. 훌륭했다."
"마계는 보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가? 마계는 보존될 수 밖에 없다. 예정된 파멸이 와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마계는 생기지."
"……."
"유희의 장소는 여기 뿐만이 아니며 계속해서 생성과 파괴가 일어난다."
"그걸… 루시퍼에게 이야기를 해줬으면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너무 악취미 아닙니까."
자기도 모르게 나온 직설적인 말에 벨페고르는 내뱉고 움찔했지만 기르메쉬는 피식 웃더니 쿨하게 넘겨주었다.
"그게 더 루시퍼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
"찌꺼기를 모아서 이렇게 한번 무너지고 또 다시 찌거기를 뭉쳐서 커다랗게 만들었지만 결국 또 무너지고… 쉼 없이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지고… 마계에 대한 애정은 절망이 되겠지. 차라리 저렇게 모든 것을 불태우고 죽는 것이 그에게 더 나은 것이다."
벨페고르는 기르메쉬의 설명을 이해했다.
"루시퍼의… 광기와 같은 애증이 마계에 내려 앉을 때부터 운명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군요."
"그렇지."
"그리고 루시퍼의 선택도 오직 유희를 위해서 그런 것이구요."
"글쎄.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모든 것은 녀석의 선택이다. 만들어졌지만 선택을 하는 것은 녀석의 몫이지. 너 역시 선택을 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선택이라고 한다면 선택일 수 있지만 거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용기가 있었다면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음을 떠올렸을 때… 벨페고르는 이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시퍼의 약속은 지켜줄 수 있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새로운 찌꺼기로 만들어진 마계에서 살아갈 것이다. 자신도 여전히 마계의 관리자로써 살아가는 것이고 말이다.
물론, 중간에 교체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만… 일단 살아보려고 한다.
'루시퍼는 죽는다. 황제가 은밀히 지원을 하고 있어.'
준혁의 발언에 시치미를 떼고 나름의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황제가 눈 앞에 있는 탓에 그럴 뿐이었다.
"결전의 시간은… 1시간 정도 걸리겠군. 이것저것 합친 커다란 오만한 패잔병의 국가가 너무 커졌어."
"… 그러니 이번에는 적당히 좀 해주시죠."
"흐음. 글쎄.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하나 이야기를 해주자면 정신 나간 꼬맹이가 패잔병 국가 끼리 합칠 생각을 하더군."
"!?"
"뭐, 이번에는 내가 나름 이렇게 나서준 덕분에 괜찮기는 하겠지만… 다음의 멸망 때는 글쎄?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싶네만."
마계와 같은 곳이 또 있냐는 듯 쳐다 보았지만 기르메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계와 비슷한 상황의 세상끼리 강제로 묶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있다고 여기면 되었다.
"… 강합니까?"
"흐음. 숫자로 이야기를 하자면 절망이 올 건데."
"그래도 알고 싶습니다. 나름 도움을 드렸지 않습니까."
"421188세계 중에서 너는 상위 80% 수준이라고 해두지. 즉 하위 20% 라는 뜻이고."
충격을 받았다는 듯한 벨페고르의 모습에 기르메쉬는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유보를 한 것이지. 네 성장이 얼마나 커질지 지켜 보겠다. 마계를 지킬 생각이 있다면 너는 최상위에 들어갈 힘을 부여 받았지."
"딱히 그런 성격은 아니라서……."
"아! 일부 세계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완전 소생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저 위에 아주 깐깐한 양반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지."
"!!!"
"물론, 나름의 힘을 소모해야 하겠지. 하지만… 너에겐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흠… 뭐, 더 이상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반드시… 강해지겠습니다. 유예의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저 놀이판에 올라온 녀석들이라도 반항을 하고 돌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너 역시 저기 저 인디고와 같이 변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
영웅이 되라는 것인가 싶어 물끄러미 쳐다 보았지만 황제는 이제 지루해졌다는 듯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오랜 만에 내 영토들이나 구경하고 가야겠다. 너는 네 할 일을 하거라. 좋은 것을 알려줬는데 버티고 이겨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 고맙습니다."
그렇게 벨페고르는 전투가 발생되는 곳으로 의욕적으로 사라졌으며 기르메쉬는 기분 좋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래곤들의 업을 짊어지는 탓에 나도 제약이 사라졌으니… 이것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재미있게 돌아가."
이런저런 제약을 받던 기르메쉬가 100%의 전력으로 마계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는 재앙과 같았다.
=============================
[작품후기]
(__)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