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회
예상치 못한
"반갑습니다. 고대 생명의 존재여. 나는 그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호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호치님. 서쪽 수호하시는 분의 피를 이은 분이 시군요. 저는 비비안이라고 합니다."
"이런. 내가 좀 냄새가 나는 걸 최대한 숨기려고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비비안 양."
"그 분의 피인데 당연한 것이겠지요. 괜찮습니다."
준혁은 비비안과 호치의 대화 속에서 저들이 같은 시간 대에 살았던 존재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 같은 세계를?"
호치는 준혁의 말에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럴 리가. 숙녀 앞에서 나이를 거론하면 안되지만 나는 기껏해야… 몇 살이지? 1500살 이후로는… 아무튼 3000살은 안되었네."
"아하하… 죄송합니다. 두 분이 뭔가 아시는 사이처럼 이야기를 하시길래."
그러자 비비안이 호치 대신 답변을 해주었다.
"훌륭한 관리를 했으니… 세상이 바뀌어도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지요. 하지만 계속해서 무너지는 세계를 보시며 스스로 뜻을 거두신 분들입니다. 다만, 힘을 이은 자들이 있으니… 연결은 되어져 있지만요."
"아……."
"위대했기에 신들도 존중을 표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힘이 남아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확실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질문에 확실한 해답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준혁은 갑자기 호치의 주변에서 바람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고 호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우리 조상님은 칭찬에 약하셔서. 흠흠. 내가 일부러 일으킨 것은 아니네. 그 바람이 따르는 거라서 어쩔 수가 없어. 흠흠."
그러면서 호치는 하늘을 쳐다 보며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한 시선을 보였는데 이내 바람이 곧 잦아들었다.
이에 준혁은 어이가 없었지만 비비안은 이미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는 듯 그저 살포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서쪽을 수호 하시는 분께서는 언제나 솔직하시고 좋으신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거짓이 아니었군요."
"음, 하하하. 네. 솔직하고 좋은 분이긴 한데 조금 촐싹… 아니 그 좀 근엄함을 좀 유지하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을 하는 그런 흐음. 아무튼 그렇습니다. 어이쿠. 이런 죄송합니다. 조상님. 그만 좀."
호치의 몸에서 뭔가 강력한 기운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져 준혁은 저 정도로 반응을 하면 좀 그렇지 않나 싶었다.
"제가 실례를 저지른 걸까요?"
"아닙니다. 그저 음~ 잠시만요. 반가워서 그렇다는군요. 비비안 양. 당신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저… 를요?"
"으음. 그래요. 맞습니다. 아… 그건! 음. 그렇군요."
호치는 이내 안색이 뭔가 굉장히 좋지 않게 되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헛소리인 것 같습니다."
"… 혹. 무슨 말씀을 들으신 건가요?"
"그… 흐음. 아주 조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저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시다고 하니……."
이내 머리를 벅벅 긁은 호치는 준혁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당신이 왜 이곳에 묶여 있는지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 렇군요. 왜…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요. 이제는 이제는… 정말 그냥 기억도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흐음. 이런. 거 조상님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오? 아무리 철딱서니가 좀 없다고 해도 품위가 있어야지."
"네?"
"아… 그게 크흠. 아니 흥분만 하면 앞뒤 생각 없이 너무 다이렉트로 말을 내뱉는 성격이라. 거참. 흠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주셔도 됩니다. 이미 그런 부분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돼서… 이제는 덤덤하네요."
호치는 연신 준혁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저 좋게 한번 이야기나 해볼 요량이었는데 자신과 연결된 조상인 백호가 날뛰고 있었다.
평소는 그래도 제법 근엄하려고 노력하는 백호지만 종종 이렇게 무슨 고양이처럼 지랄 날 때가 있는데, 호치는 이럴 때는 자신의 조상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리석다 하더군요. 고작 한아름 끌어 안을 수 있는 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태웠다고 말입니다."
"……."
"하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합니다. 어리석지만 누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태우는 이는… 그 세계에서는 몇 없었다고 합니다. 음, 그리고 그 유품이 잘 관리가 된 것을 보니 나쁘지는 않다고 말을 하시는군요. 다만… 무엇에 얽매이고 있는지 궁금해 하십니다. 그리고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도."
비비안의 얼굴이 뭔가 바르르 떨었지만 이내 다시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너무 직설적이긴 하시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비비안 양."
"약속을 기다릴 뿐입니다. 돌아온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다시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요. 세계는 돌고 돌지만 이곳은 변하지 않으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이제는 조금 지치긴 했군요."
준혁은 좋은 분위기로 시작해서 뭔가 엄청난 개판이 되버린 것 같아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느낌이었다.
이건 자칫 잘못하다가는 비비안의 심경이 극도로 뒤틀릴 수도 있었다. 호치는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굳이 안해도 되는데 백호의 이야기를 그냥 전달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눈치 없는 것은 아마 백호를 그대로 빼다 닮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음… 비비안 양. 허망함이 정해진 기다림은… 힘듭니다. 우울함이 생기고 그건 당신을 위해서 밝게 행동하는 저 꼬맹이 녀석들에게도 고통입니다."
"……?"
비비안은 호치의 이야기에 주변을 둘러 보니 [수]를 비롯해서 [물의 정령]들이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서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띄우려는 모습을 보였다.
"나도 압니다. 그런 거. 우리 조상님은 이렇게 말이 좀 직설적이고 그렇지만 그래도 지상을 더럽게 사랑을 하셨지. 딱 봐도 촐싹 거리면서 참견 많이 하고 다닐 상이 잖아요?"
"……."
"그런데 이 조상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걸 관뒀어. 다른 분들 올라갈 때 다 같이 갔지. 많은 걸 희생도 하고 말이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도 죽었지. 소중한 이들의 죽음으로 우린 살아남았어. 그리고 흩어지고 옅어지며 잊혀지고 있고 말이오. 빌어먹게도 그런 건 정말 더럽게 좋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 총영수라는 직책이 있어서 티도 못내. 왜? 얼마 남지도 않은 떨거지들이 불안해 할 까봐 그렇소. 늘 진중한 척을 하면서 조상님과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지."
호치의 과거사의 단편을 여기서 이렇게 듣자 준혁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진 않았다.
솔직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저들에겐 잘못이 없다.
그저 모험가들이 놀기 좋기 위해서, 유희를 즐길 수 있기 가장 최적화 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저들은 희생 되었을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모험가인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감히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겁다.'
만약에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저 위의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온갖 자연재해로 박살을 낸 뒤에 새롭게 인류를 시작한다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도 하는데… 그딴 일이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도 없지.'
말도 안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보니 말도 안되는 현실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늘 조심하고 다니는 것인데 오늘 이 이야기를 듣다보니 뭔가 묵직해졌다.
"… 그렇군요."
"아이들이 웃지만 슬퍼하오. 내 동포들도 부하 녀석들도 그랬지. 그러니 응당 위에 있는 자라면 웃어야 하고. 무표정함은 드러내지 않아 좋은 것 같지만 웃는 것이야 말로 가장 좋소. 뭐, 동대륙 속담에 웃으면 복도 온다고 하더군. 그러니 웃으시오. 그리고 한발 내딛으시오. 그 정도 내딛는 것은 나와 여기 이 인디고가 도와주겠소."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는 호치의 말에 준혁은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적어도 [수]의 두 번째 보호자 아니겠습니까."
"……."
비비안은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호치가 말한 것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도움을 기꺼이 받도록 하지요. 고대에 관련된 두 분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크흐. 잘 생각 하셨소… 아니 습니다. 흠흠. 감정이 좀 격해져서 반말이 조금 섞이고 그랬는데 이해를 좀 부탁드립니다. 조상이 조상이다 보니 이게 또 힘들고 그래서."
"후훗. 물론입니다."
호치는 비비안이 미소를 짓자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준혁에게 어깨를 걸면서 말했다.
"하하, 뭔가 잘 된 것 같지 않나?"
"…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준혁은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너무 무거운 일에 자신이 또 엮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에 이게 퀘스트로 엮인다면 적어도 준 시나리오 급의 메인 퀘스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저… 근데 호치님. 조상님한테 그렇게 말을 좀 험하게 해도 됩니까?"
"뭐… 나도 조상님도 다 늙어가는 처지인데 어때? 그리고 우리 조상님이 얼마나 쿨한데. 화통하단 말이지. 그래서 수습할 일들도 많았지만. 아무튼 시원시원 하기로는 우리 조상님 만한 분이 없었어."
"아… 네."
"아무튼 그나저나 이런 건 어디가서 말 하면 안되네."
"예. 할 생각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괜히 세상만 더 혼란하게 만들테니까요."
"그래. 그렇긴 하지. 아무튼 자네도 참 복잡한 곳에 많이 엮이는 구만."
"음. 그래도 좋은 분들이라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요."
의외의 대답이라고 여겼는지 호치나 비비안 모두 조금 놀란 눈으로 준혁을 보다가 이내 다시 평소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흐음. 자네는 진짜 어디가서 도장이나 이런 거 함부로 찍지 말게. 트리톤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호구… 아니. 좀 너무 맹한 것 같은데. 아무튼 어휴 총관인 해리가 영리하니 말 잘 듣도록 해."
"네? 아. 넵."
비비안은 호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참았다. [수]에게 그녀 역시 나름 전해 들은 것이 있는데 좋은 모험가임은 틀림 없으나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이런 사람을 어디서… 겪은 것 같은데.'
그리고 비비안은 그 생각의 끝으로 빠르게 쭉 이어지더니 이내 준혁의 목소리로 인해서 그 상념이 깨졌다.
"그나저나 태양빛이 괜찮네요. 쨍쨍하니 이곳을 침범하는 잔파리 녀석들도 처리를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치님도 오셨으니 주변 청소 좀 하고 가시죠. 종종 마스터 급 녀석들도 나온다고 하거든요."
"오~ 그거 괜찮군."
준혁의 말을 듣던 비비안은 상념은 깨졌지만 햇빛에 사이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인물이 떠올랐다.
'펠레아스.'
자신을 위해서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들었던…
"음, 비비안님 그러면 좀 순찰 좀 돌고 오겠습니다. 저희 때문에 몬스터가 좀 밀린 경향도 있으니 제가 틈틈이 이렇게 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활짝 웃는 준혁을 향해 비비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준혁은 호치에게 얼른 가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흠흠. 그럼 본인도 한 손 거들어 보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호치는 후다닥 준혁의 옆에 붙어서 비비안이 머무는 핵심 구역에서 벗어났고 준혁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솔직하게 호치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호치님. 솔직히 첫 만남 이미지가 점점 많이 깨졌습니다."
"크흠.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그래서 그렇지. 원래 이 성격이야."
"… 그래도 조금 많이 깨졌습니다."
"몬스터나 잡세. 나도 이 놈의 피 때문에 문제야. 한번 조상님이 날 뛰면 나도 날뛰거든. 크흠. 동대륙 말에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조상님 탓이라고 하더군. 크흠."
"… 몬스터나 잡으시죠."
"그렇게 하지.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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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__)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