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회
선지자
"흠, 귀찮은 존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군."
"그렇게 되었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오지랖을 부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몇 번째지?"
"7번째다."
"7번째? 용하군. 그 정도면 이미 선지자들이 포기하거나 무너졌을 것인데."
기르메쉬는 7번째라고 말한 랜서의 답변에 놀라움을 표했다.
7번
이 의미가 갖는 것은 이곳에서 랜서가 7번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선지자 중에서 가장 많은 이가 4번의 삶을 산 이가 있었고 그는 포기했다.
그리고 망가진 것인지 타락한 것인지 이곳에서 유희나 즐기다 사라지더니 이제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없다면 목을 치는 것이 편할 것 같으니까."
"글쎄… 황제가 기억을 하기에는 너무 무명소졸이라서."
"무명소졸 치고는 제법 쓸만하니 묻는 것이다."
랜서의 기세를 읽었다. 그리고 그가 호치와 비등한 수준의 강자임을 기르메쉬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치와 전투를 하게 된다면 호치는 패배할 것이며 그는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7번의 삶을 통해서 수 없는 전투를 익혔을 것이고 수 많은 기술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생사를 오가는 삶을 살아간 선지자들에게 무난한 삶을 살아간 호치가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음… 나는 부르는 말이 없었지. 그냥 다 같이 즐기는 것이 좋았거든."
"그런가?"
"그래도 가르치는 것에는 재능이 있어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고 다녔어.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불리더라고… [선생]이라고 말이야."
[선생]이라는 단어에 기르메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호오? 이거 진짜가 나타났군.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그 강함이 이해가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대의 행적도 말이야."
"나름 제약이 있어서… 이 정도가 한계랄까."
"그대가 키운 이들은 아주 큰 존재가 되었지. 재능의 개화를 시킬 수 있는 재능. 즐겁게 보았다."
"즐겁다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런데."
씁쓸하게 이야기를 하는 랜서를 향해 기르메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굴하지 않고 나아갔느니라. 그 뜻은 결국 이루지 못했으나 숭고함을 이해한 자들이 나와 바로 잡으려 하니, 그게 지금의 세상이다."
"그런가… 그렇게 되었나?"
"거미족의 여왕도 골렘 마스터도 그러했다. 그들 역시 그대의 손이 닿은 것이 아니더냐?"
"… 뭐, 어느 정도는 맞지."
그리운 듯한 표정을 짓는 랜서의 모습에 기르메쉬는 선지자 치고는 감성이 풍부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은 어디 한 곳 나사 빠진 듯한 느낌이 있는데, 녀석은 그런 것이 없었다.
"선생의 삶에 대해서 좀 들어보고자 하는데. 물론, 쓸데없이 그대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이야기 할 필요는 없네."
"음. 그냥 뭐… 노력하며 살아갔다. 그런 느낌인데. 아쉬움이 많기는 했어도."
"6번째는 어떠했지?"
"……."
6번째를 거론하는 기르메쉬의 표정은 묘하기 그지 없었고 랜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가졌다.
"그대에게 잔향이 느껴진다. 세상의 구원을 포기한 존재의 향기가 난다 이 말이지. 흐음."
"그렇다고 봐야지. 의무를 등 졌으니까."
"수호자였나? 그렇겠군. 몇 번이나 무너지는 세상을 바로 잡고자 스스로 수호자가 되어버렸어. 하! 이것 참, 외부의 인물이 그런 역할을 지려고 하다니. 마계에 있는 녀석들은 반성을 해야겠어."
"그들이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은 없어. 그저 방치한 이들이 잘못이지."
"방치한 이들이라?"
"수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했다. 자유라고 하지만 그저 실험을 했을 뿐이야."
기르메쉬는 랜서의 대답을 듣고 난 뒤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다름 아닌 인디고였다.
하지만 부정을 했는데 인디고와 비교 하기에는 좀 그랬다.
'다르지.'
인디고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해서 그 안에서 나름의 최선의 결론을 내려고 한다. 물론 그 현실에서 자신이 손해를 봐도 라온 길드라는 개념이 괜찮다면 그것을 흔쾌히 수락하려는 성향이었다.
자신보다도 라온 길드 자체가 소중한 이었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랜서는 범위가 좀 더 넓었다. 세상 전체를 구원하려고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좀 더 고민을 하게 되니 하나 더 떠올랐다. 목숨을 다 받쳐서 뜻을 이루려고 하는 존재.
'루시퍼.'
그 역시 마계라는 세계를 구원하고자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면서 대규모 마계 전이 계획을 진행중이었다.
마계화라는 전초전을 깔아 놓고 말이다.
"집착인가? 오만인가? 아니면 광기인가?"
"무엇을?"
"그대의 말은 선생이라 불릴 자격이 없는 답변이다. 그대 역시 실험을 위해 온 자가 아니던가?"
"그건!"
"7번의 삶이라. 그것을 구원에 목적에 두고 살아왔다면 오만이자 광기에 불과하다. 신도 하지 못할 짓이니."
신은 모든 생명체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것은 실행과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었으며 시작과 흐름과 끝이 흘러간다.
신이 통제를 해서 이상향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그건 신의 장난감과 같은 것이다. 신은 그걸 원치 않았다. 시작도 끝도 그들의 손에서 만들어지길 희망했다.
평범한 농부의 이야기도
미치광이 살인자의 이야기도
구원을 위한 영웅의 이야기도
모두 중간계의 이들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완벽하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 그래도 방향성을 제시할 순 있으니까."
"충분히 했다. 그대보다 그건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가?"
"……."
"혹 그대의 세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가?"
"……."
"오만이다. 유희와 같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대가 신이 되고자 하지 말라. 이제 보니 선생이 아닌 몽상가였어."
몽상가라 자신을 지칭하는 기르메쉬를 향해서 랜서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럴 수도 있겠네. 평범한 녀석이 비범한 녀석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거든."
"음? 쉽게 인정하는 군."
"나 역시 너의 물음을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잘못됐다. 너희는 실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월등해."
랜서는 알고 있었다.
AI의 끝을 달리는 이 존재들은 희노애락을 입력된 값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드린다고 말이다.
데이터가 쌓이고 쌓여서 그렇다? 라는 대답을 하는 개발자도 사실은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 게임을 가지고 온 존재가 이미 이런 AI를 갖고 왔다고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게임을 즐겼으나 점점 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에 취해서 사람들이 이들과 친분을 맺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 지금의 모험가 중에서도 이 세상의 이들과 연인이 되고 가족이 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륙을 돌아 다니며 수 없이 많이 보았다.
"목적도 의미도 없는 구세주로군. 차라리 그대는 지금처럼 돌아다니며 중간계의 큰 위험이나 막는 것이 낫겠다. 무가치한 존재야. 그저 알기만 할 뿐 활용하지는 못한다. 차라리 그릇을 작게 하여 인디고처럼 행하라. 그것이 그대의 분수에 맞을 것 이다."
분수에 맞게 행동하라는 기르메쉬의 말에 랜서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 역시 저번 6번째로 인하여 자신이 얼마나 작은 지 알 수 있었다.
세상을 구하지도 못했고 눈 앞에 있는 녀석들을 구하지도 못했다.
"알고 있어. 그래서 만나러 간거다."
"호오?"
"나 같은 실수는 하지 말라고. 망설이다가 그 어떤 것도 지키지 못했다. 세상도 눈 앞에 있는 녀석들도. 그리고 오랜 만에 만나 보고 싶은 녀석도 있었고."
기르메쉬는 물의 지역에서 호치와 약간의 전투가 있던 후에 왔다고 하니 그곳의 주인인 [비비안]이라는 물의 대정령과 친분이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곳의 주인인가?"
"아니. 그럴 리가."
"흠. 그럼 만났는가?"
"만나긴 했지.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밝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씩씩 하더라고."
"아는 척을 하지 그랬나?"
"이번에는 랜서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것 뿐이야."
"그런가. 그러면 그대는 영웅이 아닌 주인공을 돕는 조연이 되어라. 그러면 되겠군."
굉장히 불쾌한 말일 수도 있지만 랜서는 웃었다.
"아, 그것도 좋지."
"흠. 한 없이 평범한 소시민이었군."
"근본이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 그래서 포기할 수도 없는 거야. 원망도 하고. 아마, 너는 모를 걸?"
"그렇군. 나는 모르는 것이다. 그대와 같지 않았으니. 하하. 여태까지 말한 것은 내 오만이로군."
기르메쉬는 랜서가 자신에게 평범한 아래의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 것임을 떠올렸다.
높고 높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평범한 이들이 했던 생각들 말이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보살피고자 하는 것이겠지. 나 역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해 황제란 허울을 뒤집어 쓰고 있거늘. 후후. 그대는 몽상가가 아닌 선생이로군. 황제의 말을 이렇게 바꾸었으니 말이야."
"평범한 이들을 나름 작게 대변할 뿐이다. 그걸 지금은 다른 누군가 잘 하는 것 같더군."
"인디고 말인가?"
"그래. 나는 혼자 하는 것을 지향하지만 그는 같이 하는 것을 지향하더군. 나는 혼자 하는 것을 지향했기에 크게 어울리지 못했지. 하지만 그는 달라. 가능성이 있다."
"그렇군. 랜서 선생. 그대가 뀽이라는 반푼이 써번트의 주인이었군."
"주인은 아니고. 멍청한 친구였지."
랜서의 솔직한 대답에 기르메쉬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하나의 패를 던져 주었다.
"그것으로 그대의 신분은 서대륙 어디에서나 통용될 것이다."
"고맙게 잘 쓰지."
"앞으로의 행보는?"
"글쎄. 블루디카에서 좀 머무를 생각이야. 그리고 좀 돌아 다녀야겠지. 마계가 전이되면 중간계는 붕괴가 시작될 거라고"
기르메쉬는 랜서의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미소였다.
랜서는 기르메수의 미소를 보면서 찝찝함이 들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가 대답해줄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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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__)감사합니다.
뿌린 떡밥들..최대한 회수하려고 하는데..
뭐가 자질구레하게 많았는데..잊어먹고 있던것도 많고.ㅠ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