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회
잔재물
호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상님. 이 비틀림은 필시 멸(滅)의 기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상인 백호에게 흉한 기운을 물어보니 백호는 호치에게 대답을 해왔다.
- 선지자 녀석이 이제 떠나야 할 차례인 것이다.
"하긴 녀석이 여기 오래 있기는 했는데. 흠,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이렇게 흉흉한 기운이 블루디카에 몰려오는 것이오?"
- 글쎄. 아마 이건 더 강력한 신들의 뜻이 아닐까 싶네만. 균형을 위한 움직인 듯 싶구나. 거기까진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니.
백호를 비롯해 사신수들은 현재에도 중간계 한정으로는 충분히 영향력을 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건 기존의 신들에 대한 월권이라고 여겨 거부를 하고 있었으며 신들 이들이 보여주는 배려와 존중만큼 그들에게 계속 권한과 자유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건 암묵적인 규칙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넘어야 하지 말아야 할 선이 만들어졌고 여러 신들이 내린 규칙의 경우에 사신수들은 관여를 하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힘을 이어 받은 존재들이 빌려 달라고 한다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빌려주지만 종종 '기적'과 같은 그 이상의 힘을 빌려주는 모습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이 암묵적인 룰을 유지했다.
신들 역시 이러한 사신수들의 모습에 존중을 표했고 어지간하면 그들의 축복을 보유한 이들이나 혹은 후손이 있는 곳은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그런 이들은 중간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신의 관점과 그들의 관점이 다르기에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도 이해를 해주고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음, 그럼 나 역시 관여할 바가 아니로군요."
- 왜? 썩 괜찮게 지내는 것 같더니.
"딱히. 뭔가 나사 빠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묘하단 말이오. 녀석."
- 묘해? 묘한 것은 묘인족. 묘인족은 냥냥하지.
"미쳤소?"
- 떽! 이놈이 조상한테.
"됐고. 진짜 이상한 거 못 느끼오? 아님 뭐 아는 것이라도 있는 거요? 기묘하단 말이지. 살아있고 움직이는데 그게 산 것 같지도 않고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오. 그런데 더럽게 강하단 말이지. 나도 감당을 못할 정도로. 조상님 힘 빌려도 빡셀 것 같아."
- 응? 그렇게 강해?
백호 역시 준혁과 지낼 때나 종종 모습을 드러내지 랜서와 지낼 때는 딱히 나오지 않았다. 녀석에게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것은 여러모로 정보를 흘릴 가능성이 있어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렇기에 랜서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강하오. 내 새삼 깨달았는데, 더럽게 강해. 비비안하고 나랑 합격을 해야 비슷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것도 힘들어 보인단 말이지."
- 어지간히 강력한 선지자로구나. 그런 이들은 극히 드문데 말이지. 너 정도면 전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것인데.
"응? 나 그 정도 밖에 안돼?"
갑작스러운 강함의 순위에 호치는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꽤 강하다고 생각은 했고 적어도 전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그 정도면 대단하지. 백호 일족 중에 네가 가장 높게 올라왔다. 역대 최고야. 그러니 내가 너에게 적당히 힘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가 너무 비정상적이라서 그렇지. 본래 네 녀석 정도면 황제를 비롯해서 제외할 놈은 제외하면 세 손가락 안에는 드는 것이 정상적이다. 단지, 지금의 시대가 너무 비정상적이라는 이야기지.
비정상적이라는 백호의 이야기에 호치는 침음성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그리고 그건…
"그 정도는 되어야 지금 버틸 수 있는 세상이 곧 도래한다는 뜻이군요. 빌어 쳐먹을?"
- 눈치는 네가 대륙 최강인 것 같구나. 껄껄껄.
"… 환장하겠군."
- 말하지만… 랜서라는 녀석과 크게 엮이지 말거라. 녀석은 어차피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정도가 우리 귀염둥이 후손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겠구나. 선지자와 엮여서 좋은 운명을 가진 녀석은 그 누구도 없다.
"환상적인 이야기군요."
- 그들은 파멸을 향해 달리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 수호를 한다고 외치는 것 자체가 이미 파멸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지. 아마, 중간계에서 꽤나 큰 일이 벌어지겠는데. 어지간하면 황제 말 잘 따르고. 녀석이 아닌 것 같아도 제 아끼는 녀석은 잘 케어해주니까.
"황제 폐하가 날 그리 생각하오?"
- 껄껄, 귀여운 하얀 묘인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젠장. 난 백호 혈족이오!"
- 그래 난 백호지. 껄껄껄.
호치의 반응이 연신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놀린 백호는 재정신이 들어왔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뚱한 표정을 지은 호치에게 말했다.
- 호치 내 후손아.
"왜요. 바쁜데."
- 무얼 하지 말거라. 선지자와 엮이지 말아라. 그들의 행보는 필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필멸…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지 않소. 모험가들을 제외하면. 혹, 선지자들은 그게 아니란 뜻입니까?"
- 갑자기 존대를 하며 물어도 대답은 없다. 라고 하면 삐질 것 같으니 그렇다고 함. 그들은 긴 잠에서 깨어난다. 뭐, 네가 느꼈다는 그 기묘한 위화감을 내가 지금 네 기억을 뒤적여 살펴 보니… 음~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무슨 생각 말입니까?"
- 거참, 야무지게 존대를 다시 하니 기분이 좋군. 흠흠. 뭐, 간단하다. 하나의 전투 병기 인형이라는 것이지. 피와 살과 영혼이 있으나… 만들어진 인형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금기술인 생명체 창초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까?"
- 글쎄. 금기라고 해도 선지자는 잘 모르겠구나. 나도 선지자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케이스여서. 주작이나 현무 녀석이 잘 알 것인데. 그것까지 하기에는 좀 귀찮기도 하고 우리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과한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백호가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풀었음을 알았기에 호치는 더 이상 백호가 불편해질 수 있는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이 정도로만 답변을 해줘도 충분히 추측을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황제의 곁에서 세상의 비밀을 본 것만 해도 수 십, 수 백, 수 천이었다.
"나중에 황도로 돌아가면 백호단을 통해서 내가 먹으려고 남긴 신주 하나 더 보내드리리다."
- 어이쿠! 우리 후소오오온! 아앙! 너무 좋아! 크으! 지렸다. 오졌다. 이게 바로 후손 잘 둔 조상님! 캬!
"… 그런말 좀 배우지 마시오."
- 왜, 쓰다 보면 중독된다. 화롯불의 여신과 함께 이런 말 배우면서 한잔 땡기는데 꿀잼이야. 허니잼!
"후우. 존경심이 생기면 그 이상을 까먹으니."
- 크흠. 아무튼 그 하늘의 흉한 기운들은 아마 랜서에게 가는 것일 테니까 너는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있거나 괜히 있다가 흉한 거 나눠 받으면 그것 만큼 억울한 것이 없어요.
"충고 고맙소."
- 오냐. 신주 꼭 보내고. 그럼 간다. 흐흐. 신주 하나 더 올라온다고 자랑해야겠다. 껄껄껄.
그렇게 백호가 떠나고 호치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백호가 남긴 미묘한 기억의 흔적들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분명 저 위의 신들이 뭐라고 할 수 있어서 자신에게 기억으로 남겨준 것이었다.
호치는 이런 것에 티를 내지 않으며 백호의 기억을 더듬어 살폈는데, 미간을 바로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 선지자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
< 선지자는 모든 것을 계승할 수 있다. >
< 선지자는 목적과 수단만 있다.>
< 선지자는 과거와 현재만 있을 뿐, 미래는 없다.>
< 하늘을 슬쩍 보니 흉해도 상당히 흉하구나.>
< 조심해라. 귀여운 후손 녀석아.>
< 신주는 꼭 보내고.>
기억의 단편이었는데 그것을 읽은 호치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곱씹으며 하늘의 흉한 기운을 보았다.
'신(神)…….'
그리고 자신의 황제를 떠올렸다.
'살(殺)…….'
어쩌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흉험한 일이 발생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더럽게 피곤하겠군."
또 어쩌면 피곤함을 넘어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백호가 자신에게 열 손가락 안에는 든다는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감지했고 신들과 이어진 암묵적인 규칙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렇게 촐랑거리며 돌려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선지자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블루디카에 흉한 기운이 사라지게 할까. 이래저래 걱정이 많구만 많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를 떠난 호치였지만 머릿속으로는 해당 관련된 사실을 황제와 준혁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영지의 주인인 준혁에게는 당연히 들을 권한이 있으며 서대륙의 수호자로 있는 황제의 경우에는 더욱 더 들을 권한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파악하라고 자신을 심어둔 것이니 말이다.
'음,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으셨을까 싶네.'
이미 선지자와 혹은 그런 비슷한 존재들을 무궁무진하게 지켜보고 겪어본 이가 자신의 황제였으니 말이다.
"인디고 좀 빨리 와라. 오늘은 왜 이렇게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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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__)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