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주해온
Prologue. 이거나 드세요
“아이루고로 떠날 준비를 하거라.”
황제의 말에 회장이 술렁였다.
왜 떠나라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회장 안의 모두가 그 이유를 알았다.
정략결혼.
그것도 원수 같은 아이루고와의 정략결혼이다.
말이 결혼이지 언젠가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황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티네의 죽음.
하지만 당사자인 아리스티네는 언제나와 같이 고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시끄러운 회장 안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다른 존재 같았다.
황제는 그런 아리스티네를 탐탁지 않게 쳐다보더니 입매를 뒤틀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느냐,내 딸아.”
일견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곧 독을 품었다.
“너란 인간은 쓸모없지만 네 몸뚱이 안에 흐르는 피는 고결해 이렇게나마 쓰일 수 있으니.”
그 모욕에도 아리스티네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가 없었다.
나붓이 내리깔린 긴 속눈썹도,깊은 호수처럼 초연한 눈동자도, 달의 조각 같은 입술도 미동조차 없었다.
황제는 흥,하고 코웃음 쳤다.
“하여간 영 못 쓰는 것을 계속 곁에 두려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는데 이걸로 잘됐어.”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껄껄 웃었다.
“쓰레기도 치울 수 있고,나라에 도움도 되고,너 역시 쓰레기나마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 할 수 있으니. 이걸 일석삼조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황제의 웃음에 동조 하듯 비웃음을 홀렸다.
아리스티네는 여전히 아무 반응 없이 서 있었다.
살짝 내리깐 눈은 어디까지나 아비에게 순종하는 것 같았다.
* * *
그리고 한 달 후,아리스티네는 아이루고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녀의 처지를 안타까워한 몇 몇이 한숨을 내쉬었지만,마차에 오르는 아리스티네는 의연했다.
그 흔들리지 않는 고아한 자태는 그녀를 비웃는 자들에게마저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차 문이 닫히고 커튼이 내려간 순간,
“너나 세상에서 좀 사라지세요. 공기가 아깝다.”
여태까지의 모습이 거짓인 것처럼 아리스티네가 변했다.
그녀는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높게 쳐들었다.
생긋 웃는 그녀의 얼굴은 막 지상에 강림한 천사 같았다.
Chapter 1. 수줍음이 많으시네
‘드디어 자유야!’
아리스티네는 환호성을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지긋지긋한 고향과, 그보다 더 지긋지긋한 아버지로부터 드디어 벗어났다.
‘정말 미친놈이었지.’
아버지인 황제는 그녀를 ‘성공작’으로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
‘불에 태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처음에 느낀 것은 뜨거움이 아니라 매캐한 공기였다.
폐를 갉아먹고 목을 할퀴는 둣한 감각에 아리스티네는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는 깨어나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눈을 떠 보니 창은 막혀 있고 불길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때 아리스티네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보통이라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살아남았다. 그것도 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아버지는 새까맣게 탄 고깃덩어리 같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땠어? 각성했느냐?〉
혼미한 정신으로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던 아리스티네는 깨달았다.
‘아,창문을 막고 불을 낸 사람이 아바마마였구나.’
물집이 잡히기 시작한 팔다리 보다,화상을 입은 폐보다 그 깨달음에 심장이 더 아팠다.
너무 아파서 할 수 있다면 불 태워 버리고 싶었다.
‘심장이 새까만 재가 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 같아서.’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아리스티네의 심장은 다 타 버려 재가 되었다.
심지어 이복 여동생과 ‘그 사건’이 일어난 후 아리스티네는 유폐당했다.
유년기에 유폐당해 10년 넘게 홀로 살았으니 심장이 뜨겁게 숨 쉬는 게 이상했다.
‘그래도 유폐당한 덕에 전생을 볼 수 있게 됐으니 그것 하나만큼은 잘된 건가.’
아리스티네의 정신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잠재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전생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떠난 건 좋지만 나중에 조금 귀찮아지겠는걸.’
지금은 황궁에 없는 동복 오라버니를 떠올리며 아리스티네는 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지금은 떠나온 곳보다는 앞으로 갈 곳을 생각해야 할때다.
‘아이루고는 어떤 곳일까’
야만의 땅.
불과 철이 지배하는 곳.
마수에게 둘러싸인 고립된 평원.
〈아이루고 야만인 놈들은 마수하고도 교합을 해, 인간도 마수도 아닌 존재들이지〉
〈넌 마수와 뒹군 놈과 한 침대에서 자는 거야〉
〈뭐,뻣뻣한 너보다 마수를 더 좋아할 수도 있겠군.〉
아비가 귓가에 속삭인 말들이 다시금 응응 울렸다.
아리스티네의 혼처이니 저주를 퍼붓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황제는 원래도 아이루고를 증오했다.
실바누스와 아이루고는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실바누스는 정복 국가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단 한 곳,오직 아이루고만은 침략하지 못했다.
아리스티네의 아버지인 현 황제는 자기 대에서 아이루고를 무릎 꿇리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은 묘하게 돌아가 오히려 아이루고 쪽에서 실바누스의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기 시작했다.
아이루고가 승기를 잡은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一.
‘내 예비 남편인 타르칸이지.’
아리스티네는 정략혼 상대를 상기했다.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해 봤자 손해라는 판단에 황제는 아이루고 측에 정전을 제안했다.
이에 아이루고 왕은 높은 전쟁 배상금과 함께 한 가지를 더 요구했다.
‘타르칸과 결혼할 황제의 직계 핏줄.’
정략혼으로 몇백 년간의 적대 관계를 끊어내고 동맹을 맺자는 뜻이었다.
아이루고 왕은 진정한 전쟁의 종결을 원했다.
마수에게 둘러싸인 아이루고는 전쟁을 계속하는 게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그렇게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一로 끝날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작 내 아버지께서는 전쟁을 그만둘 생각이 없으셨지.’
황제가 정전 협상을 제안한 건 어디까지나 시간 벌이용이었다.
일단 현재 아이루고가 잡은 흐름을 끊어 내고 뒤에서 전쟁을 준비해 다시 침공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버린 패로 나를 보낸 거고.’
혼인 동맹을 맺은 국가에 전쟁을 선포할 만한 명분.
그중에서 손쉽게 원하는 때에 일부러 만들어 낼 수 있고,황제 의 입맛에도 맞는 건 딱 하나다.
‘나를 죽이고 그 책임을 아이루고에 돌리는 것.’
아리스티네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피식 웃었다.
황제는 죽으라고 사지로 보낸 버린 패가 자신에게 거대한 엿을 선사해 줄 줄 알고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우선 한 사람의 협조가 필요했다.
“타르칸.”
아리스티네는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의 이름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 * *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아리스티네는 조용한 시선으로 자신 앞에 마련된 간소한 티 테이블을 바라봤다.
포털을 이용하지 않고 구식 마찻길로 갈 때부터 뭔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과연 그 생각은 맞아떨어져 아리스티네는 거의 열흘간 마차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제는 팔다리가 내 것 같지도 않아.’
덕분에 씻지도,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다.
불편한 드레스라도 벗고 있으려고 했는데 기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창문을 두드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오라고 해서 봤더니 조출하지만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라…….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 편이 우습지.’
“앉으시지요.”
존대하고 있으나 어조나 태도로 보아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아직.’
그녀는 지금도 황궁에 있었을 때처럼 온순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야.’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무장한 호위들을 훑었다.
호위인지,감시인지,아니면. ‘살수(殺手) 인지.’
어쨌거나 이제 막 재정비에 들어간 제국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아리스티네가 죽을 때가 아니란 소리다.
하지만 그걸 바꿔 말하면,죽이는 것 말고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바누스의 황녀인 아리스티네는 적대 국가인 아이루고에 도착해서야 보호받을 수 있다.
‘과연 정말로 보호받을진 두고 봐야겠지만.’
찻잔에는 홍차가 가득 차 있었다.
흔들리는 수면에 초연한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비쳤다.
찻잔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수면은 저 홀로 점점 일렁이더니,곧 아리스티네의 얼굴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사라졌다.
그 대신.
‘아........’
다른 것이 비쳤다.
* * *
수면에 비친 것은 방금 아리스티네에게 앉으라고 명령한 시녀였다.
‘복장은 지금과 같아.’
아리스티네와 달리 시녀는 매일 씻고 옷을 갈아입어 청결하고 치장도 훨씬 화려했다.
시녀는 펄펄 끓는 물을 들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티 테이블이었다. 정확히는 아리스티네.
수면 속에서 시녀가 아리스티네에게 끓는 물을 쏟았다.
화상을 입은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어머나! 죄송해요,황녀님.]
말과 달리 그녀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찬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은 거칠고 험했다.
오히려 상처를 덧낼 것 같았다.
[물에 젖은 꼴이 생쥐 같잖아.]
[야만인의 신부에게 잘 어울리는 꼴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시녀들이 들으라는 둣이 킥킥거리며 속닥였다.
“..............”
수면이 흔들리더니 곧 잠잠해 졌다.
방금 영상은 온데간데없고 고요한 아리스티네의 얼굴만 비쳤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아리스티네의 능력이었다.
그녀의 아비인 황제가 그토록 탐냈던 능력.
하지만 아리스티네가 얻지 못 했다고 생각하는 능력.
그녀가 ‘성공작’이 되지 못하고 ‘실패작’이 된 이유.
수면 거울을 통해 발현되는 제왕안 (帝王眼).
단순히 미래만 볼 수 있는 미래안이 아니었다.
아리스티네는 수면을 통해 미래와 과거,현재를 모두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리스티네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보기 싫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제어할 수 없다.
‘어쩔까.’
톡,톡,톡.
아리스티네의 검지가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곁눈으로 시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끓는 물을 들고서.
짧은 시간 아리스티네의 눈이 예기를 띠었다.
시녀가 그녀의 바로 지척에 다가온 순간,아리스티네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악!”
펄펄 끓는 물을 뒤집어쓴 시녀가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눈앞에서 솟아나는 인영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는데,무게 중심 탓에 들고 있던 물이 제 쪽으로 쏟아진 것이다.
시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부풀어 올랐다.
“어머나.”
아리스티네가 입가에 손을 대 곤 탄식을 홀렸다.
“내,내 얼굴,얼굴이……!”
깜짝 놀란 다른 시녀들이 서둘러 차가운 물을 가지고 왔다.
제왕안으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참 수선을 떨더니 그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아리스티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걸 어쩔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아리스티네의 반문에 시녀, 로잘린은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이 천더기 황녀가 감히 제게 말대꾸를 한 것인가?
“나는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그건……!”
“혼자 물을 엎은 것을 내 잘못인 양 따지다니. 내가 너희의 보모 역할도 해 줘야 하는 걸까.”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너희에게는 보모가 필요할 것 같네.”
수준이 딱.
뒷말은 생략했지만,아주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가 백 마디 말 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지,지금 뭐라고……!”
“보모가 필요 없다면 조심했어야지.”
차근히 알려 주는 듯한 어조였다.
로잘린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 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짜증 나는 건 당장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저딴 모지리에게……!’
모멸감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로잘린이 조용해지자 아리스티네는 자리에 앉아 홍차를 호로록 마셨다.
곧게 편 허리,우아한 백조의 목 같은 손목 각도.
비록 열흘간 씻지도,옷을 갈아입지도 못했지만 이보다 더 여유로울 수 없는 태도였다.
지켜보던 시녀들이 헛숨을 흘렸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자신이 알던 황녀가 맞나 싶었다.
황녀를 잘 아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황녀’가 아닌가.
황제의 눈 밖에 나 민가의 아이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천덕꾸러기.
배울 기회도,익힐 기회도 얻지 못한 천치.
평생의 대부분을 혼자 살아 정신이 온전치 않은 미치광이.
‘그런데…….’
‘저게 정말로 그 미친 황녀라고?!’
말도 안 된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래,뭔가 얻어 걸린 것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