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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2화 (2/183)

2화

“어쩌죠,황녀님? 갈아입으실 옷이 이것들밖에 없는데.”

로잘린이 붉은 입매를 비틀며 아리스티네를 향해 말했다.

한껏 안타까운 어조를 꾸며 내고 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숨기지 않는 희열이 보였다.

로잘린의 곁에서 다른 시녀들이 킥킥 웃음을 흘리며 보란 듯이 옷을 흔들었다.

그건 옷이라기보다는 넝마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말이 없는 아리스티네를 본 시녀들이 더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이렇게 더러워서 어쩌죠?”

“존귀하신 황녀님께 미천한 저희가 입던 옷을 드릴 수도 없고.”

“아,그런데 황녀님은 원래 이런 걸 즐겨 입으시니까 상관없으신가.”

“그럴지도요. 지금 입고 있는 옷 좀 봐요. 냄새나는 줄도 모르나.”

“거기에 원래 황녀님께서 가지고 있던 옷이니까 이게 더 편하시겠지요.”

로잘린이 그렇게 말하며 다른 시녀의 손에 있던 옷을 탁,쳐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구둣발이 옷을 짓밟았지만 티도 나지 않았다. 이미 홁과 먼지로 더러웠기 때문이다.

아리스티네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고작 이거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몸을 사리는구나.’

아리스티네는 다른 시녀가 들고 있는 옷을 건성으로 획 낚아채곤 뒤를 돌았다.

그대로 마차로 향하는 그녀의 뒤로 시녀들이 덩그러니 남았다.

“뭐야……”

“참 나.”

입을 비죽였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원하던 대로 아리스티네가 더러운 옷을 입게 됐지만 어쩐지 자신들의 꼴만 더 우스워진 것 같았다.

* * *

마차 안으로 들어온 아리스티네는 커튼을 치고 갑갑한 드레스를 벗었다.

이번 정략혼을 위해 그녀에게 준비된 드레스는 지금 벗고 있는 것 단 한 벌이었다.

열악한 마차 여행 중에 보름 내내 입고 있었던지라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꾀죄죄했다.

예민하고 약한 천은 금방 다 해졌다. 다시 입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아리스티네는 시녀들이 흙발로 짓밟은 옷을 들고 몸을 꿰어 넣었다.

어차피 더러운 것은 매한가지고,갑갑한 드레스보다야 훨씬 편했다.

시녀들은 한껏 비꼬기 위해 더 편할 거라는 둥 운운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옷을 밟아서 주는 정도라니.’

확실히 겁을 먹은 모양이다. 본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역시 대응하길 잘했어.’

원래는 아이루고에 도착할 때 까지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물을 끼얹으려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시녀들의 괴롭힘에 어느 정도 브레이크를 걸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물을 피하는 정도로 해결했다면 도착할 때까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제왕안은 내가 보고 싶을 때 쓸 수 없으니까 그러다 한 번은 정말로 화상을 입었겠지.’

그래서 아예 시녀가 화상을 입도록 대응했다.

그리고 그건 저들에게 꽤 심리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황녀가 일부러 물을 끼얹은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실수로 뜨거운 물을 쏟은 것뿐이다.

황녀는 우리에게 반항하지 못 한다. 해 봤자 말 몇 마디일 뿐, 여전히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조심하고 있다.

‘무섭 거든’

아리스티네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으려 했던 시녀는 얼굴 반절에 걸쳐 화상을 입었다.

경도 화상이고 아이루고에 도착하면 말끔히 치료할 수 있겠지만,지금은 얼굴에 커다란 수포가 검붉은 풍선처럼 부푼 상태다.

시녀들은 매일매일 그 얼굴을 마주하며 저도 모르게 위축될 터.

남을 괴롭히다가 자신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다 처음으로 제가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당연히 괴롭히는 것 자체를 예전보다 주저하게 된다.

‘그래서 안전하게 이런 심술밖에 못 부리고.’

끊는 물을 끼얹는 것과 입을 옷을 발로 밟아 주는 것을 비교하면 후자는 귀여운 수준이다.

무엇보다 아리스티네는 이 정도로 상처받지 않았다.

의복 하나하나에 신경 쓰기엔 유폐된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그래도 정말로 내가 입던 옷만 가져왔을 줄은 몰랐는걸.’

유폐당한 채 홀로 지내온 아리스티네에게는 허름하니 낡은 옷밖에 없었다.

시녀들이 짓밟지 않았어도 신행 마차에 탄 새 신부가 입기엔 부적절한 옷이었다.

그것도 보통 혼사도 아니고 국가 간의 정략혼인데.

새 의복을 단 한 벌만 준비한 건 황제의 명일 터.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아이루고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을 최대한 꼬질꼬질하고 엉망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휘황찬란한 마차와 예물,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호위대와 아름다운 시녀들.

그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시궁 쥐 같은 몰골의 황녀.

‘너희 야만인들에게는 이딴 쓰레기가 잘 어울려라는 걸까.’

시궁쥐 황녀와 달리 한껏 호화롭게 꾸민 일행과 값비싼 예물은 실바누스의 국력을 보여 주고 더 나아가 아리스티네와 아이루고를 조롱하기 위해서다.

종전을 진정으로 원하는 아이루고와 달리,황제는 시간만 벌어 다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니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는 것이다.

아리스티네가 아이루고에서 어떤 취급을 받든 상관없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어쩐지 내 혼삿길치고는 화려하다고 생각했지.’

막연히 아이루고에서 많은 예물을 요구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뭐,아이루고에서 요구한 것도 있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쩜 그렇게 순진하신지.’

정말 모든 것이 본인 뜻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제왕안을 얻지 못한 모자란 딸은 어렸을 때 유폐당해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 천치이니 제 입맛대로 쓰다 죽이면 그만이라고.

‘괜찮은 옷을 구하고 씻는 것이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겠지만.’

아리스티네는 풀썩 몸을 누였다.

‘도착할 때까지는 광대놀음에 어울려줘 볼까.’

반격은 찔끔찔끔하면 재미가 없다.

단번에,예상치 못한 순간에 해야 제맛이다.

* * *

아리스티네가 실바누스에서 출발한 지 한 달후,아이루고 왕도 서쪽관문.

“어떤 사람일까.”

정확히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지금 이 순간에 아이루고 사람들,그중에서도 타르칸의 수하가 궁금해할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바로 그들의 주군과 혼인할 실바누스의 황녀,아리스티네.

“실바누스 놈들은 모두 교활하고 음흉한 구석이 있다고 하던데.”

“겁쟁이에 심약하지.”

“황녀님이 우리 보고 기절하는 건 아닌지 몰라.”

껄껄껄.

황녀를 맞이하는 인원은 모두 전사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건 귀빈을 환대하는 아이루고의 예법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짓궂은 의도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겁쟁이 실바누스인들이 전사를 보고 오줌이나 지리며 자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조용히.”

맨 앞에 있는 짧은 머리에 스크래치를 넣은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실바누스 사절단의 선두가 보였다.

“대체 왜 포털을 이용하지 않고 마차로 오는 거랍니까.”

투덜거리던 전사가 스크래치의 시선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사절단이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저렇게 꾸미는 데 치중해서야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어?”

“검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도 없는 놈들 같은데.”

“장식품이지,뭐.”

번쩍 빛나는 갑옷을 보고 아이루고 전사들이 피식 웃었다.

시녀들은 모두 곱고 아름답고 사치스러웠다.

그들은 아이루고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얼굴에는 경멸과 거만함이 반반씩 배어 있었다.

이쯤 되니 아이루고 전사들도 황녀가 어떤 사람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

‘저런 기사와 시녀의 우두머리라면 뻔하지.’

곧이어 황금과 상아,토파즈로 장식된 가장 화려한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어라?’

‘뭐지?’

허름한 낡은 옷을 뒤집어쓰고 나온 자그마한 여인의 모습에 아이루고 전사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렸다.

“저게 황녀……?”

옆에 있는 시녀들에 비하면 거지나 다름없었다.

옷만 허름한 게 아니라 정말로 꼬질꼬질했다.

얼굴도 씻지 않았는지 먼지와 땀으로 더러운 데다가 머리카락 역시 기름기가 잔뜩 끼어 번들 거렸다.

“이건……. 정말 예상 밖인데.”

“하! 감히 우리를 대체 뭐로 보고.”

화려한 사절단 가운데 아이루고로 시집오는 비렁뱅이 같은 신부.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치졸한 실바누스인답군.”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더럽게 꾸미다니..?”

“우리 주군께 시집오는 게 그만큼 모욕적이라는 거냐?!”

“아니,그렇다기엔 황녀를 대하는 시중인들의 태도가 좀 이상한데…”

“긴장 놓지 말고 조용히 해. 황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상대는 실바누스인이다. 주군을 노릴 수 있어.”

스크래치의 말에 전사들의 눈 빛이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 * *

‘음,역시나.’

아리스티네는 그런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삐까번쩍한 마차에서 먼지 덩어리 같은 그녀가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아이루고인들이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위대하신 실바누스 제국 분들은 참지 않고 비웃음을 홀렸다.

키득키득하는 소리에 아이루고 인들이 얼굴을 굳혔다.

분명 이건 사기 결혼이네,뭐네 따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진 않았다.

그 점은 다행이었다.

‘내 몰골에 대한 소동은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예상했던 범위 안이다.

아리스티네에게 중요한 건 이 다음 아이루고 사람들의 태도였다.

아이루고인들은 빠르게 당황을 감추고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엄청나게 경계하고 있네.’

아리스티네는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름대로 결혼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말이지.’

아무리 봐도 새 신부를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적국의 사자-정확히는 암살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면 좀 슬픈데.

‘아,적국의 암살자가 맞을 수도 있으려나?’

황제가 그녀에게 따로 내렸던 명령이 떠올랐다.

〈타르칸을 죽여.〉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뱀이 기어가는 기척처럼 소름 끼쳤다.

〈그 씹어 먹어도 부족할 놈의 심장에 독을 바른 칼을 꽂든가, 술에 독을 타든가.〉

황제는 자신의 대에서 아이루고를 무릎 꿇리겠다는 염원을 좌절시킨 원흉이 타르칸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타르칸이 출정하는 전투마다 실바누스군은 번번이 퇴각해야 했으니까.

그랬던 만큼 황제는 타르칸이라면 치를 떨며 분노했다.

그의 손이 아리스티네의 턱을 들어 올렸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이 얼굴을 훑는다.

〈넌 하등 쓸모없는 존재지만 생긴 것 하나만큼은 봐 줄 만하니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비릿한,기분 나쁜 미소가 황제의 입가에 떠오른다. 엽색적인 천박한 미소였다.

〈잘됐어. 네년은 내 피를 이은 고귀한 황녀 같지도 않으니 오히려 지저분한 야만인의 취향에 잘 맞춰 줄 수 있지않겠어? 침대에서 천박하게 말이야.〉

글쎄. 적어도 지금 천박한 생각을 하며 천박하게 구는 건 황제였다.

〈네년이 성공하면 그 공을 봐 내 딸로 인정해 주마.〉

큰 포상이라도 내려 준다는 어조였다.

‘그다지 댁의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인정받고 싶지 않은데요.’

아리스티네의 턱을 뿌리치듯 손을 땐 황제가 그녀의 손에 유리병을 쥐여 주었다.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이 죽음처럼 선명했다.

그 유리병은 지금 아리스티네의 마차 안에 있었다.

타르칸을 죽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정말로 아리스티네가 성공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을 것이다.

‘시도하다 실패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겠지.’

어쨌거나 평화 협정을 깨고 새로운 국가 분쟁이 일어날 계기가 된다.

언제라도 전쟁으로 번져도 이상하지 않은 계기.

‘역시 멍청해. 내가 제 말에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독을 쥐여 주다니.’

그것도 단숨에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극독을.

사절단의 맨 앞으로 나온 아리스티네는 의식적으로 입매를 늘 였다.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 그간 제왕안으로 봐 왔다.

‘그래 봐야 꼬질꼬질하겠지만.’

그래도 부끄러워하며 위축되어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

아이루고인들 중 가운데 서 있던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짧은 머리에 스크래치가 있는 남자였다.

‘저 사람이 타르칸인가.’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

일단 생긴 것도 나쁘지 않고 풍기는 분위기가 괜찮았다.

성격은 겪어 봐야겠지만,살면서 비위가 상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황녀 전하.”

목소리도 괜찮다.

무엇보다 전혀 황녀 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꽤 신선했다.

‘근데 너무 깍듯하게 예를 차리지 않나?’

마치 아랫사람처럼.

“안내를 맡게 된 듀란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스크래치가 자신을 소개했다.

“잘 부탁하네, 듀란테 경.”

아리스티네는 듀란테에게 인사 하며 재빠르게 도열해 있는 아이루고 인들을 훑었다.

하지만 아이루고의 왕자 같아 보이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이들 중 듀란테의 지위가 가장 높은 것 같았다.

‘타르칸이 왕도 관문에서 나를 맞는다고 들었는데.’

“내 남편 되실 분은?”

“사냥에 가셨습니다.”

아하.

아내가 될 사람이 오는데 사냥 이라?

결혼 생활에 좋지 않은 징조였다.

예비 남편님의 의도는 알겠다. 이런 냉대로 실바누스의 기를 꺾겠다는 거겠지.

‘더불어 내 기도 꺾고.’

아쉽게도 이 정도 일로 온갖 일을 다 겪은 아리스티네의 기가 꺾일 리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내 예비 남편께선 수줍음이 많은 분인가 보군.”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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