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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6화 (6/183)

6화

마치 그곳에만 햇살이 머무는 것 같은 은발이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타르칸의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유독 더 선명하게 보였다.

‘설마……’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은발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왜 그렇게 서 있지? 들어오지 않고.”

왕이 우뚝 멈춰 서 있는 세 사람에게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들은 티 테이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리스티네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불길하게 술렁여 와 애써 내리눌렀다.

생각과는 다소 다른 광경이라 놀랐을 뿐,별로 이상할 건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몇 번이고 다독였다.

‘그냥 은발일 뿐이야. 흑발,적발,금발도 있듯 세상엔 은발도 얼마든지 있어. 그냥 평범한 은발일 뿐이라고.’

그냥 은발이라고 하기에는 색 도,반짝임도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 꽃향기가 느껴질 것만 같은 색이었다.

‘그,그래. 원래 은발이었구나. 먼지같이 칙칙한 잿빛인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있지. 씻었으니까. 머리카락은. 머리카락 정도는.....’

‘맞아. 아무리 깨끗해졌다고 해도 그 얼굴이 예뻐질 일은 없어’

그렇게 서로 속닥이자 움츠러 들었던 어깨가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당황했던 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서,그들은 입 안 가득 독을 품고 아리스티네를 향해 헛 바닥을 놀렸다.

“아바마마를 뵈러 왔는데 이거,소문의 황녀님께서도 계셨네요.”

“생각지도 못한 분이 계셔서 놀랐어요.”

그래서 멈춰 섰던 것뿐이라는 변명이었다.

“미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천년 제국의 황녀님이시니 분명 그만큼 기품 있고 총명하신 분 일 거라 기대가 많았습니다.”

“오라버니,그냥 솔직히 말해 요. 얼마나 미인일지 기대했다고. 실바누스 황실은 미남과 미 녀로 유명하니까요.”

“하핫,티가 많이 나나? 타르칸 녀석도 참 복이 넘치나 봅니다.”

지나치게 아리스티네를 칭찬하 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높이,더 높이 띄웠다가 진창에 처박기 위해서.

“실바누스 황실은 가장 오래된 핏줄이기도 하지요. 재색을 겸비한 고귀한 피를.........”

사르르 웃으며 티 테이블로 다가가던 1공주 파엘라미엔은 예니카리나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예니카리나는 언제나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입매가 미묘하게 굳은 데다가 안색이 살짝 질려 있었다.

‘가장 좋아하고 있을 애가 왜……’

뭔가 이상했다.

아까 아리스티네의 뒷모습을 보았던 순간부터 괜찮다,괜찮다 내리눌렀던 술렁임이 몸피를 부풀린다.

이 제 는 도저히 내리 누를 수 없 을 정도로 거대하게 커졌다.

확실하게 뭔가가 잘못됐다.

그걸 느낀 순간,아리스티네가 그들을 돌아봤다.

사라락 은발이 흩어지며 자그 마한 얼굴이 드러난다.

긴 속눈썹 아래 잠긴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생크림처럼 매끄러워 보이는 하얀 뺨, 설탕 과자처럼 달콤해 보이는 입술.

선이 강한 아이루고인들과 달리 가느다란 목과 팔다리가 꼭 요정같았다.

‘저 사람이 아까 봤던 그 거지 황녀라고……?’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야 깨끗해졌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잔뜩 꾸몄을 거라고.

하지만 그래 봤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아까 봤던 아리스티네의 몰골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을 넘어 추했다.

그 속에 미인,그것도 단 한 번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시궁쥐 같았다며?’

‘나도 몰라!’

소리 없는 대화가 시끄럽게 오갔다.

“누구?”

아리스티네의 입술이 열리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비현실 적으로 느껴졌다.

그냥 아름다운 것과 그 대상이 살아 움직이고 자신을 향해 반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 저,저는 아이루고의 3왕자 마르텐이라 합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황녀님.”

원래부터 여자를 밝혔던 마르텐이 홀린 둣 아리스티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누구냐 묻던 아리스티네의 태도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은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여간 저놈은 머리가 아니라 다리 사이에 뇌가 달려 있지.’

파엘라미엔은 인상을 찌푸리며 도도하게 부채를 확 펴 들었다.

“1공주 파엘라미엔이라 해요, 황녀. 이번엔 넘어가겠지만 다음 부터는 언사를 조심하도록 하세요.”

그녀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과장스럽게 “하!” 하고 코웃음쳤다.

“누구냐니. 우리가 수발들러 온 궁인으로 보이진 않았을 텐데요.”

“그러니까. 실바누스의 황녀라면서 그런 기본적인 예법도 모르나?”

4공주 스탈리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리스티네를 노려봤다.

대놓고 지적하고 무시해도 아리스티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변화는커녕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렇게 되니 움찔하게 되는 것은 파엘라미엔이었다.

분명 공격을 했고,그게 반격당하지도 않고 먹혔는데 어떤 타격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찝찝해지기만 했다.

미묘한 침묵 후에야 아리스티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 데……”

“오해라고요? 대체 어디가 오해인데요?”

정말이지 멍청하다는 소문답게 황당한 핑계였다.

파엘라미엔은 아리스티네가 대 답하는 순간 고개도 못 들 정도로 반박해 줄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들에게 누구인지 물은 게 아니라 누구였지,하는 혼잣말이 었어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

아리스티네의 대답을 듣는 순간 파엘라미엔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도리어 뜨끔해서는 부채를 부치는 척 제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내 얼굴을 정확히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파엘라미엔과 마르텐은 타르칸의 궁에 막 도착한 아리스티네를 구경했던 왕족들 사이에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스쳐 본 탓에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아서 이러는 거겠지?’

이미 황녀를 한 번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방금 모르는 척,처음 보는 척하며 다실에 들어왔으니 들키는 순간 제 꼴만 우스워진다.

‘그것도 부왕 앞에서.’

부왕에게 책잡힐 일을 만들진 말아야 한다.

결국 여기서 더 파고들어 갈수 록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니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알고 이러는 건 아닐 거야. 유폐당해서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사람 상대조차 못 했다던데. 당연히 돌려 말할 줄 모르겠지.’

파엘라미엔은 그렇게 뜨끔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저 낯이 익숙해서 별 생각없이 물어본 게 분명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부채를 팔랑팔랑하며 얼굴을 가리고 딴청 피우는 파엘라미엔을 보고 타르칸이 큭,웃음을 홀렸다.

항상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던 1공주가 아무 말 못 하고 저러는 걸 보니 재밌었다.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는데’

아리스티네는 무려 천 년을 유지해 온 실바누스 황가의 적통으로,가장 고귀하고 귀한 피를 타고 났다.

당연히 타르칸이 천한 어미의 배에서 났다고 경멸할 줄 알았다.

피의 반이나 섞인 이복 형제자매들조차 그를 멸시했다.

아리스티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 만나 보고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 지만.

‘확실히……’

수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지 만 타르칸은 뭐든 혼자 해결하는 데 익숙했다.

아리스티네가 뭘 하든 제게 득이 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재밌는 광경을 계속 보여 준다면 생각이 달라질 지도 모른다.

“하! 핑계도 가지가지야. 무슨 혼잣말을 그런 식으로 한다고.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변명만 하는 거 보니까 진짜 황족인지 의심스러운데.”

4공주 스탈리나가 콧방귀를 뀌며 아리스티네를 노려봤다.

“아,맞다. 황녀 취급도 못 받던 모자란 반편이라고 했었지?”

피식 웃은 스탈리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더더욱 입꼬리를 올렸다.

“왜요? 나도 혼잣말이었는데.”

동생의 말에 파엘라미엔은 머리를 감싸고 싶었다.

이 눈치 없고 멍청한 동생이 또 사고를 쳤다.

‘괜찮아. 진짜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사고 친 것도 아니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오히려 왕후 폐하는 황녀를 괴롭히라고 우릴 보낸 거니까……’

되레 잘된 건지도 모른다.

아리스티네가 아까 자신과 마르텐을 본 걸 기억하지만 않는다면.

‘시중인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기억하겠어. 그것도 그런 정신없 는 상황에서. 나랑은 눈도 마주 치지 않았는걸.’

그러면서도 파엘라미엔은 슬쩍 아리스티네의 눈치를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분노조차 읽을 수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마르텐 전하.”

아리스티네는 스탈리나는 상대도 하지 않고 3왕자 마르텐을 불렀다.

무시당한 스탈리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에 반해 마르텐은 꿈꾸듯 몽롱한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 봤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지 않아요?”

푸른빛과 붉은빛이 오묘하게 섞인 보랏빛 눈동자는 마치 우주와 같았다.

심지어 그 눈동자를 담고 있는 우아한 눈매가 가느다랗게 휘며 자신을 향해 눈웃음을 짓는다.

마르텐은 저도 모르게 고개부터 끄덕였다.

“네……. 그랬던 것 같기도 합 니다. 아니,분명 그랬을 거예요. 제가 실바누스에 간 적이 있어서……”

마르텐은 순식간에 헤벌쭉해져 서는 횡설수설하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황녀님께서 저를 기억하고 계신다니 영광입니다. 하긴,제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얼굴이긴 하죠. 하하!”

물론 마르텐은 실바누스에서 아리스티네를 본 적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이런 미인이 ‘우리 전 에 만난 적 있지 않냐’며 작업을 거는데 그렇지 않다고 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야 타르칸 놈보다야 내가 훨씬 낫지!’

마르텐은 혼자 착각 속에 빠져 우쭐했다.

“글쎄요,나는 실바누스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던 것 같은데.”

아리스티네가 생긋 웃으며 마 르텐을 빤히 바라봤다.

“하하,어디요? 꿈? 꿈에서 뵈었나요? 저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크하핫!”

파엘라미엔은 마르텐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었다.

‘타르칸의 궁에 나랑 마르텐이 있던 걸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 없어!’

이제 확실해졌다. 알면서 저러는 것이다.

‘……못 배워 멍청한 데다가 유폐당해 미쳤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자기가 패를 쥐고 있다는 것만 알려 주고 정작 패를 쓰지는 않고 있어.’

차라리 패를 써 버리는 게 상대하기 더 낫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리스티네가 패를 쓰지 않도록 계속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파엘라미엔은 힐끔 부왕의 기분을 살폈다.

그는 개입할 의사 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황녀를 바라보고 계셔.’

그것도 꽤 흥미로운 시선이었다.

파엘라미엔은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설령 부왕께서 타르칸의 궁에 서 있었던 일을 이미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계신 거여도,황녀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져.’

왕은 더 이상 그 사건을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된다.

딸인 자신의 편을 들어 줘 작은 벌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一.

‘지금 부왕께선 명백하게 황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하고 계셔.’

아리스티네가 흡족한 결과를 내면 분명 그녀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몸을 사리자.’

가장 좋은 것은 아리스티네가 패를 꺼낼 일을 만들지 않는 것 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스탈리나가 입을 열었다.

“뭐야,결혼 상대가 있는 앞에 서 지금 딴 남자랑 노닥거리는 거야? 몇 번을 지적해도 정말 천박하게一.”

“스탈리나!”

파엘라미엔은 언성을 높여 그 녀의 말을 끊었다.

스탈리나가 깜짝 놀라 파엘라미엔을 바라봤다.

타르칸을 제외한 형제자매들에게는 항상 유했던 첫째 언니가 호통을 치다니.

“황녀님은 그냥 물어보신 것뿐 이야. 그걸 딴 남자랑 노닥거린다고 말하다니. 네 눈에는 대체 뭐만 보이는 거냐.”

“하, 하지만 언니,쟤가 꼬리를......”

“아직도 그 소리니?! 모든 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법이야.”

“뭐라고? 언니, 무슨 말을 그 렇게一.”

“그렇게,뭐. 계속 말해 봐.”

낮은 되물음에 스탈리나는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잘못을 지적해도 인정하긴커녕 내게 따져 묻는 거니?”

스탈리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파엘라미엔이 작게 혀를 찼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여기서 사고치진 않겠지.’

다소 강하게 나가긴 했지만 스탈리나의 입만 막을 수 있다면 성공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네 평소 행실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도록 해.”

스탈리나는 고집스레 입술에 꾸욱 힘을 주었다.

분하고 서운하고 화가 났다.

파엘라미엔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 선을 넘어도 그냥 넘어가 주던 착한 언니가 아니던가.

‘왜 나한테……’

“스탈리나.”

파엘라미엔이 답을 재촉했다.

스탈리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 었다. 이렇게 화를 내는데 더는 고집을 피울 순 없다.

“……알겠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1공주 전하.”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스탈리나는 파엘라미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 *

‘클린 샷이군.’

타르칸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리스티네는 훌륭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깨끗하게 적을 사냥했다.

그것도 정작 그녀 자신은 손 하나 까딱이지 않은 채,가만히 있으면서.

마수 사냥에만 관심 있지,이런 인간 사냥에는 전혀 흥미 없는 타르칸이 보기에도 감흥이 일 정도로 멋진 사냥이었다.

전사 중의 전사인 타르칸의 눈에도 아리스티네는 정말 뛰어난 사냥꾼이 었다.

만약 이곳이 마수 평원이고, 아리스티네가 잡은 게 마수였다면 당장 제 휘하로 들이고 싶을만큼.

타르칸의 금안이 아리스티네의 옆얼굴을 훌어 내렸다.

섬세하고 가녀린 얼굴 어디에 이런 공격성을 숨겨 둔 건지.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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