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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8화 (8/183)

8 화

“어머,저런.”

아리스티네는 스탈리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냥 무슨 할 말이 있나 물어 봤던 건데 일이 이런 식으로 흐를 줄이야.”

그녀는 낮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이 이렇게 무릎 꿇고 앉아있는 걸 보니 내 마음이 편치 않네요. 자,어서 일어나세요.”

스탈리나를 일으켜 세우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은 그야말로 윗 사람 그 자체였다.

너그러움을 보이고 관대하게 말하는 느긋한 태도.

그 모습을 보던 아이루고 왕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영리하군,아리스티네 황녀.’

스탈리나가 무릎 꿇게 되기까지 아리스티네는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꾸짖지도 않았고 사과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행동하기 전에 파엘라미엔이 먼저 움직였으니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아는 것을 너머 활용까지 하고 있어.’

둘째 딸은 꽤 머리가 잘 돌아 가는 아이였다.

항상 주변에 잘 녹아들던 파엘라미엔을 저렇게 동요시키고 원 하는 대로 끌고 가다니.

자칫 잘못하면 아리스티네 역시 아이루고에 도착하자마자 평화 분위기를 깼다는 오명을 쓰게 될 수도 있었다.

‘대담해. 하지만 적당해. 결코 과하지 않아.’

만약 아리스티네가 조금만 더 선을 넘었다면 상황은 악화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스탈리나에게 가만히 당하고 있는 것보다 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했을 터.

아이루고와 실바누스는 오랜 적대 관계를 유지하다 이제야 우호 관계가 되려는 차다.

스탈리나가 무례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실바누스의 황녀가 아이루고의 공주에게 무릎 꿇고 빌라고 한다면?

갓 시작된 평화는 살얼음처럼 파사삭 깨질 것이다.

심지어 아이루고는 승전국이고 실바누스는 패전국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떤가.

결과적으로 손위 공주가 손아 래 공주를 꾸짖은 것이니 이건 아이루고 내부의 일이었다.

지금 왕은 아리스티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말없이 지켜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딱 히 왕이 그녀를 책할 수 없게 처리했다.

아리스티네의 언사에는 꼬투리 잡을 게 없었다.

설령 꼬투리를 잡히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다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 눈이나 제대로 마주칠 줄 알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는 데.’

왕의 시선이 아리스티네의 무표정한 얼굴을 훌었다.

사실,그가 원한 것은 당연히 실바누스의 둘째 황녀였다.

그 누가 유폐당했다는 큰 문제를 가진 첫째 황녀를 원하겠는가.

첫째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이루고 왕은 쯧,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이 전쟁을 끝내고 타르칸의 정치적 약점을 없애 줄 존재다.

정통성이나 혈통이나 육신에 하자가 있어서 유폐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황제에게 밉보였을 뿐이다.

타르칸이 뛰어난 만큼 총명한 정치적 파트너를 만나길 원했지만.....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최 소한의 가치는 다하는 거니 사고만 안 치면 돼.. 라고 생각했건만.’

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의 판단이나 생각이 전혀 틀린 건.

하지만 기분 좋은 오판이었다.

‘실바누스의 황제는 이런 보석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이루고에 보내다니.’

원래 탐욕스럽고 멍청한 작자이긴 했다.

“부산스럽게 서 있지 말고 어 서 앉도록. 갑자기 티타임에 들이닥쳐 뭔 짓들인지.”

왕이 왕자와 공주들에게 손짓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들은 그제야 앉지도않고 서서 이야기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만큼 아리스티네에게 흔들렸다는 뜻이었다.

“맞아요, 부왕 폐하. 예니카는 깜짝 놀랐어요.”

예니카리나가 왕의 팔에 착 달 라붙으며 애교를 부렸다. 종달새 처럼 속삭이며 눈을 깜빡인다.

“다들 이 기쁜 날에 왜 그러는 거야? 황녀님께 무례한 말을 하 질 않나,동생에게 과하게 화를 내지 않나.”

예니카리나의 시선을 받은 스탈리나와 파엘라미엔이 움찔했다.

“예니카는 너무 슬퍼.”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이제 곧 가족이 될 텐데 처음 보이는 모습이 이렇다니. 황녀님이 우리가 자길 싫어한다고 오해하면 어떡해.”

투정이 섞인 귀여운 울상이었다.

아리스티네가 별 반응이 없자 예니카리나는 아예 그녀를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다들 황녀님께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커다란 눈은 왕의 눈과 똑같이 튀르쿠아즈 블루였다.

“예니카는 언니 한 명이 더 생긴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은 걸요?”

헤햇,하고 귀엽게 웃어 보인다.

가만히 그녀가 하는 꼴을 지켜 보던 아리스티네 역시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마주 되돌아오는 미소에 예니카리나는 친밀하게 아리스티네 에게 손을 뻗었다.

“있죠,예니카가 황녀님을 리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아리스티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물론이죠.”

“와아一!”

예니카리나가 두 손을 가슴 위 에 모으며 활짝 웃었다. 그 몸짓 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꼭 내 동생을 보는 것 같네요.”

아리스티네는 실바누스에 있는 여동생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둘째 황녀님이요?”

“네,굉장히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정말 그런 애였다.

아주 어렸을 적 직접 봤을 때도,유폐당한 채 제왕안으로 봤을 때도.

‘심지어 나를 유폐시킬 때도 참 사랑스러웠지.’

희미했던 아리스티네의 미소가 만개하는 꽃처럼 깊어졌다.

“예니카를 황녀님의 동생처럼 생각해 주시는 거예요? 너무 기뻐요!”

예니카리나는 부끄럽다는 둣 얼굴을 붉혔지만,기쁘고 설레는 마음을 채 감추지 못했다.

두 눈이 기쁨을 담아 반짝이며 반달 모양으로 흰다.

그러나 그 순진한 얼굴 밑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흥,너무 쉽잖아.’

역시 자신의 이 사랑스러운 얼굴은 어디에서나 통하는,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타국인인 아리스티네조차 단번에 자신에게 홀려 정신을 못차리지 않는가.

‘하긴,유폐당한 채 혼자 살아 왔으니 누가 조금만 다정하게 말 걸어 줘도 껌뻑 죽겠지.’

이곳에 와 아리스티네는 저보 다 머리통 하나는 큰 아이루고 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 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봤으니 당연히 마음이 움직일 터.

‘체구가 그나마 조금 비슷한 편이니 고향 생각도 날 테고 말 이야.’

예니카리나의 외조모는 타국 출신이었다.

예니카리나 역시 그 피를 받아 다른 아이루고인치고는 말랑하게 생긴 편이었다.

그래서 여동생을 떠올린 것이리라.

‘아,재미없어. 부왕 앞에서 망신 주지도 못하고. 이 모지리가 날 너무 좋아하게 되면 귀찮은데.’

예니카리나의 눈이 슬쩍 부왕을 향했다.

아이루고 왕은 아리스티네에게 흡족한 기세였다.

그걸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일단 지금 눈치로는 이 모지리랑 친한 척해 놔야 할 것 같네.’

그래야 부왕이 좋아할 것이다.

‘좋게 생각하자. 나중에 뒤통수 치기도 편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타르칸을 보 는데,즉시 눈이 마주쳤다.

예니카리나는 예의 그 사랑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타르칸의 얼굴에 혐오감이 떠 오르는 것을 잠시 즐겼다.

‘어쨌든 저 멍청이 황녀를 잘 구슬리면 우리 오빠한테 도움이 되겠지.’

타르칸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아리스티네에게 경고해도 좋았다.

홀로 오래 살아서 사람 온기가 그리울 황녀에게 밝고 친밀하게 다가가는 자신.

커다랗고,거칠고,마수 피를 묻히고 다니는 데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무서운 정략혼 상대.

과연 황녀가 누구를 경계하게 될까?

‘그래,그래도 그런 건 꽤 재밌겠네.’

예니카리나가 아리스티네를 향 해 사르르 미소 지었다.

“리네 언니,궁에서 지내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예니카한테 찾아오세요. 예니카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지 도울 테니까요. 정말 무엇이든지요.”

남편과의 관계를 포함해서 말이지.

예니카리나의 눈짓에 아리스티네가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그것 참 고마워라.”

원하던 대답이었지만 예니카리나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지금…… 은근히 말이 짧아지지 않았어?’

지금 이 반편이가 자기를 아래로 보는 건가?!

“아,실례. 예니카 공주님,말을 편하게 해도 될까요?”

‘어딜 감히.’

하지만 예니카리나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짜증 나는 여자다.

실례라고 말은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이 하나도 안 미안해 보여서 더더욱.

“그게,실은 제가 생각보다一.”

낯을 가려서요,라는 말이 나 오기 전에 아리스티네가 입을 열었다.

“제 동생 같아서 그래요. 예니카 공주님도 내가 동생처럼 생각하는 게 좋다고 했죠?”

‘뭐?’

예니카리나는 기가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 혹시 예의상 해 본 말이 었나요? 제가 그런 거 잘 구별 못해서. 저는 진심인 줄 알았는데.”

아리스티네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과연 미인은 미인인지라 그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처연해진다.

마르텐이 안타까운 한숨을 홀리며 아리스티네를 보는 게 눈에 들어와 더 짜증이 났다.

‘진심일 리 있겠어?!  너 따위가 감히 날 동생으로 생각하는 게 뭐가 좋다고!’

자신을 동생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하미르 오빠뿐 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 온 말은…….

“물론! 진심이에요,진심”

예니카리나는 억지로 환하게 웃었다.

“그럼 괜찮지?”

바로 툭 말을 놓는 아리스티네 의 모습에 예니카리나의 웃는 얼굴에 쩌적 금이 갔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항상 웃음 을 잃지 않으며 살았건만,오늘 만큼 웃기 힘든 날은 없었다.

‘젠장. 혼자 벽 보고 지내서 눈치가 없는 거야,뭐야?’

아까 파엘라미엔에게 했던 것을 보면 영 눈치 없는 건 아닌듯한데.

어쨌든 저쪽이 말을 놓는데 이 쪽이라고 존대를 쓸 필요는 없다.

“으응,그럼 예니카도 언니한테-”

“아.”

아리스티네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 동생은 나한테 꼬박꼬박 존대해서. 아주 어렸을 때도 말 놓은 적이 없어.”

“..............”

예니카리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머리가 멍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크핫!”

마르텐이었다.

그는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어깨가 들썩거린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예니카리 나가 생긋 웃었다.

“마르텐 오빠.”

“어,어?”

“뭐가 그렇게 재밌어? 예니카도 알고 싶어.”

“어? 아니,그게……”

“그게?”

“……미안.”

“뭐가 미안할까아? 예니카한테 잘못한 게 있는 걸까?”

아리스티네는 예니카리나의 공격에 마르텐이 쩔쩔매는 것을 무감하게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녀가 상대하고 싶은 사람은 아까부터 따로 있었다.

바로 아이루고의 제왕,네프테르.

타르칸과 닮은 날카로운 눈매가 그녀를 향했다.

튀르쿠아즈석같이 새파란 눈동자에는 약간의 흥미가 깃들어 있다.

‘좋은 징조네.’

스탈리나가 싸움을 걸어오길래 편의상 입을 다물게 했을 뿐이었지만,뜻밖의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아이루고 왕이 그 덕에 제게 흥미를 가졌으니까.

‘타르칸을 아끼니 타르칸의 짝으로는 처세를 잘하는 여자를 원했겠지.’

지금 아이루고는 왕세자가 책봉되지 않았다.

두 계파로 나뉘어 후계 싸움이 치열한데,그중 한쪽이 자신의 예비 남편인 타르칸이고 나머지 한쪽이 왕후 소생의 적장자인 하미르였다.

예니카리나는 하미르와 마찬가지로 왕후의 소생이다.

나머지 왕자와 공주는 모두 다른 후궁의 소생이고.

‘아니,타르칸은 예외지.’

타르칸은 제대로 봉작을 받은 후궁의 배에서 난 게 아니다.

후궁도 아닌 평민 어미의 태에서 났다.

바로 그 출생이 타르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약점이었다.

그 탓에 대부분의 왕족들은 모두 하미르의 편에 섰다.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천출을 타고났다며 타르칸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복잡하게 들어가자면 기존의 귀족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나눠 가질 새로운 세력을 배제하려 해서고.

귀족들은 똘똘 뭉쳐서 기성 권력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했다.

‘정치는 결국 이권 다툼이기 마련이지.’

아리스티네가 제왕안으로 봐온 모든 정치가 그랬다.

* * *

왕족들이 다 자리에 앉자 궁인들이 새로 따뜻하게 끓인 차와 다과를 내왔다.

아리스티네는 찻잔에 담흥빛 차가 담기는 것을 황홀하게 바 라보았다.

찻물이 찻잔을 구르며 공기와 섞여 확 퍼지는 향이 좋다.

함께 나온 반짝이는 광택을 자랑하는 젤리도 맛있을 것 같아 계속 시선이 갔다.

‘하지만 오늘은 약… 아니, 상품을 팔러 왔으니까.’

아리스티네는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매물인지 타르칸에게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꽤 자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굉장히 기억력이 좋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제왕안으로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유폐궁에서 아리스티네가 할 수 있는 것이란 한정적이었다.

제왕안은 그녀가 원한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아리스티네는 이미 봤던 것을 반추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게 그녀가 유일하게 삶을 사는 방법이었다.

혼자 가만히 앉아 우연히 물에 비쳤던 바깥세상을 떠올리고, 떠올리고,또 떠올리는 것.

기억도 훈련이 되기 마련이다.

아리스티네는 잊지 않는 게,잊지 못하는 것이 많아졌다.

또한 그 습관 덕에 제왕안으로 과거와 현재,미래를 볼 때도 점차 다양한 것을 살피게 되었다.

사람들의 대화뿐만 아니라, 그 들의 뒤에 핀 꽃이 얼마나 예쁜 지,하늘이 얼마나 파란지,햇빛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그런 것들을 항상 가슴에 꼭꼭 담아 볕도 잘 안 드는 방 안에서 소중히 꺼내 보곤 했다.

관찰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런 게 왜 중요한가.

아리스티네는 이미 아이루고 왕을 제왕안으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 덕에 아리스티네는 타르칸도 모르는 왕의 비밀마저 알고 있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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