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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9화 (9/183)

9 화

[타르칸 전하가 또 전공을 세웠습니다.]

[음.]

보좌관의 보고에 아이루고 왕은 턱을 쓸었다.

[별로 기뻐 보이시지 않습니다]

[기쁘지 않을 리가. 하지만 이 걸로 또 타르칸에게 살수가 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적대국인 실바누스에서 보내는 자객이 아니라,타르칸의 모국인 아이루고에서 보내는 자객이 갈 것이다.

[손을 쓰시진 않을 겁니까?]

[뭐 하러. 그 정도는 혼자 해결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서 왕은 술병을 들어 술잔에 따르려 했다.

하지만.

챙그랑一. 왕이 놓친 술병이 바닥을 구르고 호박색 액체가 값비싼 융단을 적셨다.

깜짝 놀란 시종이 다가와 서둘러 잔해를 치웠다.

[술을 새로 내오겠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왕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모두 물러가 보도록.]

보좌관을 비롯해 왕의 서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소리 없이 밖으로 물러났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타르칸 전하가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그러시겠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니…….]

[전하께서 귀족의 태내에서만 나셨어도.]

밖으로 나와 떠드는 보좌관과 시종장의 모습을 끝으로,수면이 흔들렸다.

제왕안이 보여 준 영상은 거기 까지였다.

아리스티네는 기억 속의 영상을 반추하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모두 오랜 세월 왕을 지근거리에서 성심껏 모신 자들이지만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왕이 술병을 떨어트린 이유는 그게 아니다.

“부왕 폐하, 이 프링프랑 젤리, 예니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건 데 폐하 것까지……

예니카리나가 애교 있는 웃음을 지으며 왕에게 속살거리던 순간이었다.

“..?!”

갑작스러운 아리스티네의 행동 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함 했다.

‘지,지금 이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 지?!’

두 눈이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 데 상황 판단이 되질 않았다.

스스로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수 없었다.

그간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선 태도로 관조하고 있던 타르칸마저도 이번에는 확실히 놀란 기색이었다.

“황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과연 왕이었다.

네프테르는 자신의 입술 바로 앞에 놓인 프링프랑 젤리를 바라봤다.

보통 평범한 젤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탱글탱글한 이 젤리는 연노랑빛 새콤달콤한 자태를 뽐내며 유혹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프테르가 포크로 젤리를 집어 든 건 아니었으니,당연히 다른 누군가가 포크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포크를 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아리스티네 황녀였다.

“부왕 폐하.”

아리스티네 입에서 나온 부왕 이라는 소리에 예니카리나는 물론,다른 왕족들도 얼어붙었다.

“부,부왕 폐하라니요?!”

우리 아빠한테!

예니카리나가 아리스티네한테 팩 소리를 질렀다.

“예니카,내가 폐하를 부왕이라고 부르는 게 싫어?”

나를 가족이라고 말한 네가?

아리스티네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자 예니카리나의 입이 꾹 다물렸다.

“저도 타르칸과 결혼하면 폐하를 부왕 폐하라 부르게 되겠지요. 폐하께서는 제 가족이,제 아버지가 되시는 거니까요.”

“……그렇지.”

“며칠 더 전에 부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겠지요?”

아리스티네의 태도는 담담했지 만 두 눈동자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혹시 네프테르가 기분 나쁘진 않은지,혹시 거절당하는 건 아 닐까 살짝 겁먹은 눈빛.

내쳐지는 것에 익숙한 사람의 눈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순간 또다시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차갑게 거절당하는 것을 감수하고 변화하기 위해.

네프테르의 입술이 열렸다.

“문제 될 건 없다.”

왕의 선언에 예니카리나는 완전히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아리스티네의 눈이 흔들렸다.

네프테르는 처음으로,이제 막 세상에 나온 이 어린 황녀의 진심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단한 껍질 속의 여린 진심.

아리스티네의 뺨이 살짝 상기 되었다.

“기뻐요.”

불쑥 그녀가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핫,하고 정신 차린 아리스티네가 얼굴을 굳히고 변명했다.

“아니,그게. 폐하께서도 제 상황을 아시겠지요. 저는 그냥.”

어째서인지 진짜로 부왕이 생긴 것 같아서 기뻤다.

그저 앞으로 부르게 될 테니 호칭을 미리 허락한 것일 뿐인데.

큰 의미 부여를 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어린 시절 제왕안으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황제의 무릎 위에서 그에게 프링프랑 젤리를 먹여 주던 동생의 모습.

아리스티네도 아빠에게 예법을 잘 익혔다며 프링프랑 젤리를 먹여 주며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흙덩이를 뭉쳐 포크로 집어 보곤 했다.

“그래서,이건 뭐지? 날 주려고 하는 건가?”

횡설수설하는 아리스티네의 말을 끊고 네프테르가 말했다.

아리스티네의 눈이 흑 부풀어 오른다.

“네!”

힘차게 대답한 그녀가 포크를 좀 더 내밀었다.

“아〜 하세요,부왕 폐하.”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싸한 침묵이 티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아니,눈치 빠르게 굴었으면서 방금 부왕의 뜻은 읽지 못한 거야?’

파엘라미엔은 제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싶었다.

방금 부왕의 질문은 ‘나 주려 고 한 거면 어서 빨리 줘’가 아니었다.

‘이건 뭐냐. 설마 네가 날 주려고 이딴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어서 치워라.’

이런 뜻이었다.

적어도 파엘라미엔이 듣기엔 그랬고,마르텐이 듣기에도 그랬 으며,스탈리나가 듣기에도 마찬 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네프테르가 누군가.

이 거칠고 포악한 마수 평원을 지배하는 위대한 군주였다.

무려 철혈의 제왕에게 젤리를 콕 집어서 입에 넣어 주려는 것 도 모자라서 아예 ‘아〜 하세요’ 라며 채근하다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졸아붙을 것 같다.

오직 아리스티네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제왕의 입이 열리기만 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네프테르의 억양은 누가 들어도 기가 막힌다는 톤이었다.

절대 아리스티네가 시키는 대 로 입을 벌린 게 아니라,‘아? 지금 나한테 아,하라고 했냐?’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느낌이 아니라 그게 확 실했다.

네프테르의 파란 눈동자는 그 어느때보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니까.

파엘라미엔은 지금이라도 아리스티네가 제정신을 차리고 무례를 범했다며 싹싹 빌길 바랐다.

왕후의 명에 따라 여기에 올 때까지만 해도 쉬운 마음으로 가볍게 왔는데,이건 뭐 첩첩산중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가 어디 파엘라미엔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사람이던가.

아무리 제왕안으로 주변 상황을 잘 본다고 해도 인간관계 경험은 실질적으로 제로에 가까웠다.

사람과의 대화를 글로,전생으로 따지면 텔레비전으로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직접 경험한 전생조차 기억하기보다 제왕안으로 ‘보는’ 것에 더 가까웠으니.....

그 전까진 긴장하고 있어서 숙고를 많이 하고 움직였지만,기 쁨에 빠지자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네프테르의 입이 벌어 지자마자 프링프랑 젤리를 쏙 집어넣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입이 다물렸다.

“맛있죠?”

아리스티네가 빙긋 웃으며 왕 에게 물었다.

모두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제왕의 반응에 대비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왕의 진노가 벼락처럼 꽂히지 않았다.

“음.........”

그저 애매하고 모호한 소리를 홀리는 게 전부였다.

그다지 화를 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니,전혀 없어 보였다.

모두가 지금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챙그랑一!

날카로운 파열음이 다실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트렸다.

입술 색을 잃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린 예니카리나가 멍하니 테이블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찻잔에서 쏟아져 나온 찻물이 테이블보를 적셨다.

새하얀 천에 붉은 얼룩이 점점 더 몸피를 부 풀린다.

예니카리나의 손이 찻잔을 친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잘게 떨리 고 있었다.

“왜 그래,예니카?”

“아……”

예니카리나가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뭔가 문제라도 있어?”

그 물음에 흠칫한 예니카리나가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무슨 문제라니요? 아무 문제도 없는데요?”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엉망이 된 테이블 위를 향했다.

“이,이건……. 찻잔이 잘못 만들어졌나 봐요. 균형이 안 맞아서 혼자 넘어진 거예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궁인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제대로 검수했어야지! 이런 것을 감히 어전에 내오다니! 제 정신인 거야?”

평소와 달리 애교가 쏙 빠진 음성이었다.

항상 모든 이의 사랑을 받길 바라는 예니카리나가 왕의 궁에서 이렇게 행동한 것은 처음이 었다.

궁인들은 억울했지만 공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그 모습을 바라 보다 고개를 외로 기울였다.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잘 모르겠다.

왕이 술병을 떨어트린 이유. 그건 오른쪽 팔목의 통증 때문이다.

평소엔 거의 괜찮지만 힘이 들 어가거나 손목 근육을 세심하게 다뤄야 할 땐 미세한 경련이 인다.

프링프랑 젤리는 아이루고의 특산품으로 표면의 탄력이 강한 데다가 매끄럽기까지 해 포크로 집기 힘들다.

아이루고와 적대국인 실바누스의 귀족들조차 식사 예법을 익힐 때 이 프링프랑 젤리를 쓸 정도다.

포크로 단 한 번에 우아하게 프링프랑 젤리를 집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손목 근육을 세심하게 쓰기 힘든 상황에서는 절대 못 집어 먹지.’

그러면 아주 간단한 인과가 형성된다.

네프테르는 이 젤리를 좋아한다.

하지만 팔목의 통증으로 혼자 먹기 어렵다.

게다가 그는 팔의 부상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

이 세 가지 사항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다른 사람이 먹여 주면 되잖아.’

이보다 명료한 일이 없다.

그런데 왕의 반응부터가 뭔가 심상찮으니…….

‘아,설마 누가 먹여 주는 걸 싫어하나?’

제왕안으로 그런 것까지 보지 못했다.

어쩌면 아이 취급 받았다고 기분 나빠 할 수도 있다.

“어떠세요?”

“……맛있군.”

약간의 침묵 끝에 왕이 나직하게 답했다.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프링프랑 젤리를 향한다.

‘더 달라는 건가.’

아리스티네는 하나 더 집어서 네프테르에게 먹여 주었다.

야만의 나라를 지배하는 제왕은 얌전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물론 받아먹는 얼굴은 위엄 있는 제왕의 풍모에 걸맞게 한없이 굳어 있었다.

‘아,생각보다 많이 먹네.’

아리스티네는 아기 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처럼 계속해서 프링프랑 젤리를 집어 주며 생각했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했다.

인원수에 맞춰 총 일곱 개가 나왔는데 벌써 다섯 개째 먹고 있다.

프링프랑 젤리는 자극적인 젤리였다. 워낙 산미가 강한 데다가 단맛까지 강렬해 사람들은 보통 하나만 먹었다.

‘손목이 멀쩡했을 때 일부러 가져오라 명해서 먹을 때도 두 세 개 먹고 말았는데.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제왕안으로 봤을 땐 세 개가 최대였다.

아리스티네는 젤리가 튀어나가 지 않도록 신경 써서 탱글탱글 한 표면을 쿡 집었다.

이걸로 여섯 개다.

‘좀 귀찮지만. 부상자에게 이 정도 배려는 해 줘야지.’

그리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게 조금은… 아주 조금은 기뻤다.

아리스티네는 젤리를 왕의 입에 쏙쏙 넣어 주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하나. 솔직히 조금 고민됐다.

‘나도 먹어 보고 싶은데……’

프링프랑 젤리. 제왕안으로는 정말 많이 봤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다.

‘진짜 맛있다던데. 달고 신맛이 강하게 어우러져 딱 하나로도 입 안에서 파티를 하는 느낌이라던데.’

심지어 지금 눈앞에 있는 건 프링프랑 젤리의 고장에서 만든 것이다.

그것도 왕에게 진상될 정도로 최고급품.

‘에잇!’

아리스티네는 마지막 하나를 포크로 집었다.

어쩔 수 없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프링 프랑 젤리를 먹기 위해서가 아 니다.

약을 팔러…… 아니,타르칸에 게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법.

눈 딱 감고 왕에게 마지막 젤리를 양보했다.

물론 왕은 맛있게 냠남 받아먹었다.

진짜 맛있나 보다. 중간에 차도 안 마시고 연달아 일곱 개나 먹다니.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허,하고 기가 막힌 숨을 흘리는 게 들렸다.

아리스티네는 의아해서 타르칸을 바라봤다.

대체 뭐가 기막힌 걸까? 왜 그러지?

아리스티네는 사실 스스로가 대견했다.

지금 그녀는 타르칸에게 꽤 강력한 어필을 했다고 생각했다.

권력자의 환심을 사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

이거 아주 핵심적인 수완 능력을 보여 주는 거 아닌가?

근데 기막힌 한숨이라니…….

시선은 그녀가 아니라 왕 쪽으 로 더 향해 있는 느낌이지만,어쨌든 왕과 아리스티네는 옆에 앉아 있었다.

‘하긴,타르칸은 왕의 손목 상태를 모르니 좀 생뚱맞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왕은 몇 년 동안 못 먹던 좋아하는 음식을 그녀 덕에 먹게 됐으니 꽤 만족할 터.

‘게다가 이 일 때문에 나를 경계하지도 않을 거야.’

그 누가 아리스티네가 왕의 부상을 알아서 먹여 준다고 생각 하겠는가.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보통 의심병으로 치부한다.

게다가 왕의 시종도 모르는 것을 아리스티네가 안다고 짐작이나 하겠는가.

이 일은 왕후조차 모른다.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둘.

왕의 주치의와一.

‘예니카리나 공주.’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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