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0화 (10/183)

10화

그것이 바로 아이루고 왕이 예니카리나를 총애하는 이유였다.

왕의 손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예니카리나는 오늘처럼 집기 힘든 음식이 나왔을 때 자신에게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네프테르는 못 이기는 척 딸에게 그 음식을 넘겼다.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서.

물론 왕이 음식을 가려서 먹지 않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먹기 싫은 때가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항상 그런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온갖 말이 따라온다.

하물며 프링프랑 젤리는 아이루고의 전통 디저트라 이런 다과나 식후 디저트로 많이 나왔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사소한 것이라도 의미가 부여되기 마련이다.

네프테르에게 병증이 나타났을 때 아이루고와 실바누스는 한창 전쟁 중이었다.

밀정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데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릴 수 없었다.

‘거기다 왕위 다툼의 균형을 깨고 싶지 않기도 했겠지.’

직접 선언한 적은 없지만 왕은 타르칸을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왕후 소생인 하미르와 기반 세력 자체가 크게 차이나는 타르칸이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런 왕의 의중이 눈에 보였기때문이다.

왕이 건재하고 타르칸을 아끼기에 하미르의 편에 선 귀족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 는 것이다.

손목 문제는 목숨과 관계없는 사소한 병이다.

그러나 왕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소문으로 번지면 후계 싸움의 균형이 흐트러질 수 있다.

예니카리나는 자신의 동복 남매인 하미르를 위해 바로 그 점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미인 왕후에게도,그렇게나 아끼고 사랑하는 친오빠에게도.

그저 모르는 척,부왕에게 애교를 떠는 척 네프테르가 스스로 먹기 힘든 것을 달라고 해서 대신 먹었다.

예니카리나는 본디 아이루고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주였다.

결국 공주의 애교에 왕이 녹았다면서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었다.

이 드넓은 평원의 지배자가 가장 총애하는 딸.

그런 수식어가 예니카리나에게 붙었다.

그건 곧 하미르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왕의 환심도 사고, 하미르에게 정치적인 도움도 되었고,대외적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격상시키기까지 했다.

‘정말 잘했어.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야.’

아리스티네는 예니카리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예니카리나는 미소를 되돌려 주었지만,맨 처음 봤을 때와 달리 경직된 미소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착각에 빠져 방심하면 안 되 지.’

기어코 일곱 개의 젤리를 다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셔 혀를 씻은 네프테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 혼사는 내가 한 결정이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군.”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귀를 종긋 세웠다. 시중을 드는 궁인들까지도.

“황녀 덕에 꽤 즐거운 티타임 을 가졌으니 나도 답례를 해야겠지.”

흡족한 눈빛이 아리스티네에게 향했다.

“리네, 원하는 것이 있나?”

왕이 아리스티네를 애칭으로 불렀다.

마치 자신의 딸들을 부르는 것처럼.

모두가 놀랐지만 아리스티네보다는 아니었다.

새벽하늘 같은 눈동자가 찬란 하게 빛났다. 여명이 깃드는 것 처럼 밝게.

그 얼굴을 본 예니카리나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야!’

그녀가 아리스티네의 알현을 받아 달라고 청했던 것은 모두 부왕 앞에서 망신 주기 위해서 였다.

어려울 것 하나 없는,아주 쉬 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티네에 대한 소문도 그 렇지만 실제로 보기까지 했으니 까.

심지어 모후 덕분에 세 사람이 지원 오기도 했다.

그들은 예니카리나와 아리스티네를 비교해 예니카리나를 추켜 세우기 위해 온 것이다.

덩달아 모자란 아내를 맞게 된 타르칸도 까 내리고.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오히려 자신들이 왕의 환심을 깎아먹고 아리스티네는 호감을 사고 있지 않는가.

이윽고 아리스티네의 입술이 열렸다.

“폐하,제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나요?”

섭섭하다는 음성에 네프테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라고 할 생각인가?”

“아니요.”

아리스티네가 당당히 말했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전 원하는 게 있어요.”

그 말에 네프테르의 푸른 눈동 자가 당황으로 흑 커졌다.

그 누구도 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왕태자 시절부터 함께한 왕후도,가장 총애받는 후궁도,피를 이은 딸과 아들도, 신임하는 신하와 전사까지도.

그 누가 감히 왕에게 ‘내가 너에게 잘해 준 건 원하는 게 있어서 그런 거야’라고 말하겠는가.

건방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흥미가 일었다.

다른 사람들은 입에 담지도 못 하는 말이지만 사실 속이 빤히 보이는 일 아닌가.

“그게 뭐지?”

왕이 말한 것은 고작해야 티타임의 유흥에 대한 포상일 뿐이

여기서 과한 것을 말하면 아리스티네는 바로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프테르는 그녀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인지 확신인지 모를 것을 품었다.

그리고 아리스티네는.

“아이루고가 야만의 나라라는 오명을 씻는 것.”

그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아리스티네가 던진 자그마한 돌이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 으켰다.

수면을 가로지르는 원은 점점 커져 물가에 닿을 때에는 파도 가 되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오늘 아리스티네는 여러 사람을 당황시키고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지금 이 말에 비할 순 없을 것이다.

‘그래,말했잖아?’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 동요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에 내 능력을 증명하겠다고.’

오랜 시간 웅크려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일어나 기지개를 켠 것이다.

‘나는 계약서 조항 안 읽고 도장부터 찍을 만한 물건이라서 말이야.’

아리스티네는 자신을 직시하는 타르칸을 향해 가뿐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오후 햇빛을 받아 빛났다.

Chapter 4. 고갱님,아니,남편님

타르칸은 자신 쪽은 쳐다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아리스티네 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봤다.

‘아까와는 완전히 딴판이군.’

조금 전 다실에서 왕과 함께 있을 때만 해도 몇 번이나 그를 돌아보며,

‘나 잘했지? 내 능력 괜찮지?

어때? 이제 나와 손잡을 생각 들어?’

그런 생각이 와다닥 읽히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다실을 나서자마자 그에겐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 이미 타르칸의 궁까지 들어왔는 데도.

‘뭘 원하는지 알겠어.’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길 바라는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어떤 도옴도 주지 못한다고 단언했던 타르칸이 직접 먼저 도옴을 청하는 것.

타르칸의 얼굴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본래 그라면 절대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남의 도움 없이 언제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 왔다.

“잠깐.”

하지만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붙잡았다.

“이야기 좀 할까?”

잠시 타르칸을 올려다보던 아리스티네가 눈매를 나른히 휘었다.

“내가 워낙 바쁜 몸이라서.”

좀 더 안달 내라는 거였다.

타르칸은 어째서인지 피식 웃음이 나오려 했다.

“잠깐이면 돼.”

“흐응.”

“아주 조금만.”

그를 응시하던 보랏빛 눈동자가 도로록 굴렀다.

“아주 잠깐이라면,바쁘지만 특별히.”

“그것 참 고맙군.”

그렇게 두 사람을 위한 티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연달아 세 번째 차를 마시는 거지만 아리스티네가 질렸을 리 없다.

처음 차를 마셨을 땐 한 모금 만 제대로 마시고 나중에 속 터져서 식은 차를 들이켰고,두 번 째는 왕에게 젤리를 먹여 주느라 차에 입도 대지 못했다.

그러니 내심 반가웠다.

“인정하지.”

궁인들이 차를 우리는 사이 타르칸이 말했다.

“뭐를?”

“네가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어머나.”

아리스티네가 사르르 웃었다.

정말 의외라는 둣 입가에 손까지 착 대는 걸 보고 타르칸의 입매가 뒤틀렸다.

“적어도 오늘처럼 내 형제자매들이 웃긴 광대놀음을 하는 걸 관람할 재미는 줄 수 있겠지.”

절대 아리스티네가 원하는 말은 해 주고 싶지 않아졌다.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있을 텐데?”

“글쎄. 뭐가 있더라.”

모르는 척하자 아리스티네의 입가에 힘이 들어갔다.

“나 수완 좋은 거 못 봤어? 오늘 바로 폐하께 원하는 게 뭐냐 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그래서 그걸 내가 어디에 쓴다고.”

“네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내정을 안정시키는 것에? 마수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우는데 그 때마다 어수선해지지 않아?”

“그건 내가 돌아와서 진정시킬 수 있어.”

“다른 왕족들이 괜히 네 아래 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비 거는 거 막아 줄 수도 있고.”

“그건 각자 견뎌야 할 몫이지.”

“너 없을 때 다른 귀족들이 이때다 싶어서 추진하는 정책들을 막을 수도 있고?”

“나중에 처리해도 돼.”

아리스티네는 무표정했지만,그 를 쳐다보는 시선은 어찐지 골이 나 보였다.

속으로 자신을 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왜인지 모르겠지만,타르칸은 유쾌했다.

“그걸 낭비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궁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뒤치다꺼리라는 소리잖아. 난 그 낭비를 줄여 줄 수 있는데.”

아리스티네가 종알종알 투덜거렸다.

타르칸은 말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저녁을 향해 가는지라 햇빛은 조금 더 색이 짙어졌고,바 람은 습기를 머금어 정원의 향 기를 가득 싣고 있었다.

투덜거리던 아리스티네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 혼자만 너무 말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나를 불러 세운 이유는?”

삐딱한 말에 타르칸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네 말대로 어쨌든 정략혼 상대이니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하. 왜 내가 그런 먼지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왔는지 궁금한 거구나.”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꼬았다.

어쩐지 자신의 말과는 조금 뜻 이 달라진 기분이 들었지만,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타르 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티네는 차를 홀짝이며 시선을 내려 티 테이블을 바라 봤다.

긴 속눈썹이 그녀의 눈매에 고아하고 깊은 음영을 만들었다.

시선이 저절로 접시 위에서 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라즈베리 콤포트와 스콘에 고정된다.

먹고 싶지만 스콘이 딱 하나다.

아리스티네는 얌전히 차만 마셨다.

‘이 남자에게 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아니.’

비록 갇힌 채 살아 직접적인 인간관계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 도 이제 막 만난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제왕안으로 수많은 인간관계를 봐 왔으니까.

‘나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을까?’

일단 황궁에서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알고 있을 거다.

실바누스의 황제는 아리스티네를 박대하는 걸 숨기지 않았다.

물론 제국민들에게 황실 안의 어두운 사정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아리스티네는 병환으로 칩거 중이라고 알려져 있긴 했다.

하지만 궁인들을 비롯해 궁정에 드나드는 귀족들 대다수가 진실을 알고 있으니 공공연한 비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까 다른 왕족들도 모두 아는 눈치였고,당연히 타르칸도 알고 있겠지.’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까지 말해도 좋을지 생각하는데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울고 있을 줄 알았어.”

“응?”

“여기 도착해서. 다른 왕족들이 네게……”

타르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획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위로해 본 적이 없다.

실의에 빠진 사람을 신경 써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 그녀가 신경이 쓰여 이런 말까지 꺼내는 건지 스스로가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 눈을 살며시 내리깐 여자의 모습이 처연하고 창연해서.

아리스티네는 말을 정리하는 타르칸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뭘 그런 것 가지고 울어.

그 눈빛을 읽은 타르칸이 눈매를 찡그렸다.

“실바누스의 황녀님이시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을 것 아니야.”

“익숙한데?”

게다가 자신의 몰골이 몰골이었던 만큼 뭐라 한 소리 들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눈치를 보다가 슬쩍 라즈베리 콤포트를 스콘에 얹었다.

타르칸은 별말이 없었다.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그는 어쩐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눈치였다.

용기를 얻은 그녀는 스콘을 조각 내 클로티드 크림까지 야무지게 발랐다.

그리고 그대로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빵은 처음 먹어 본다.

어쩌면 아주 어렸을 때 먹어봤을 수 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으니까.

차를 한 모금 마셔 함께 넘기자 말 그대로 황홀했다.

아리스티네는 너무 행복해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타르칸한테도 권해야 하나?’

하지만 스콘은 너무 작아 서너 조각밖에 남지 않았다.

솔직히 다 먹고 싶었다.

힐끔 그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굳어 있다.

그럴 만도 했다.

하나밖에 없었던 데다가 스콘은 엄밀히 말하자면 타르칸의 재산이다.

‘멋대로 먹은 건 내 잘못이야.’

그런데도 권할지 말지 망설이다니.

시무룩해진 아리스티네가 입을 열려던 차였다.

“익숙하다고?”

현저하게 낮아진 목소리가 마치 바닥을 긁는 것 같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