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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1화 (11/183)

11 화

타르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어라?’

“너 모르는구나?”

아리스티네는 반쯤 어이없어서 물었다.

‘어떻게 내가 유폐당했다는 걸 모를 수가 있지.’

생각보다 아이루고의 정보력이 별로였다.

‘아니,아이루고에서 모를 리가 없지. 이 경우엔 아이루고가 아니라 타르칸이 몰랐다고 봐야지.’

몰랐던 이유야 뻔하다.

‘나한테…… 자기 신부가 될 사람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것도 어지간히 없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수면 거울로 봤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황녀님이 마음에 드신 건가요?]

[그럴 리가.]

‘대체 뭘까. 내가 마음에 들 리 가 없는 이유.’

[너도 알잖아.]

단순히 ‘황녀가 더러운 걸 알잖아’라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정략혼을 맺을 신부가 온 날, 신부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는 여자.

그 여자에게 알지 않느냐고, 내 마음은 변치 않는다고 말하는 남자.

‘역시 뻔한 이야기일까.’

갇혀 살아서 사회성이 부족하 긴 했지만 제왕안으로 이런 상황을 몇 번 봤다.

‘흐음.’

아리스티네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을 마친 그녀가 타르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우리 사이에 어느 정도 이야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겠지. 아무리 정략혼이라고 해도 부부가 될 사이니까.”

말을 마친 아리스티네가 고개 를 기울였다.

“아니, 정략혼이기에 더더욱 정리해야 하나?”

타르칸은 담백하기 짝이 없는 아리스티네의 태도에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그도 이 결혼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지만 이 여자는 더한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아리스티네는 타르칸과 눈을 마주쳤다.

오후 햇살이 달궈 놓은 공기 속에서 시선이 느릿하게 섞여든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타르칸 전하,혹시 전쟁을 원합니까?”

* * *

“뭐?”

타르칸은 황당해서 아리스티네 를 바라봤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가 몇 번이나 그를 당황시키는지 모른다.

아마 최근 1년간 당황한 횟수를 합쳐도 오늘보다 적을 것이다.

아리스티네는 변함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고요 한 눈빛.

타르칸은 자신의 아내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여자는 생각 없이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다.

타르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있겠 지.”

그가 낮게 말했다.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처럼 형형했다.

“하지만 난 아니야.”

아리스티네는 침묵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다.

이 여자의 미소는 아름답지만 그만큼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표정을 지운 얼굴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타르칸은 신이 심혈을 기울여 직접 빚은 것처럼 아름다운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표정에 그런 의문을 가져 본 게 처음이라는 건 자각하지도 못한 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췄다.

말은 한 마디도 없었으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분명 무언가가 오가고 있었다.

먼저 그 기묘한 대치를 깬 사 람은 아리스티네였다.

“그럼 됐어.”

아주 싱거운 결론이었다.

“왜 그런 걸 묻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날 죽이는 거니까.”

흑 치고 들어온 말에 타르칸이 멈칫했다.

하지만 정작 아리스티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당연하지만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녀가 스콘에 블루베리 콤포트와 클로티드 크림을 바르며 말했다.

기분 탓인지 타르칸은 아리스티네가 크림을 바르면서 눈치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당신도 전쟁이 일어나길 원치 않으면 내가 살아 있어야 하겠지. 어때,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아?”

자신의 목숨을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태도였다.

적어도 타르칸이 보기에 아리스티네는 그다지 자신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살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동전 한 닢처럼 취급한다.

‘대체,이 여자는……’

“안 그래?”

아리스티네가 대답 없는 타르칸을 채근했다.

타르칸은 그녀에게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내리눌렀다.

지금 여자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역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그렇게 말해서 상대를 안심시키고 뒤에서 일을 꾸미는 건 아주 흔한 일이야.”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지.”

반박당했는데도 아리스티네의 눈동자에는 희미한 만족감이 떠 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예비 남편이 겉 만 멀쩡한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꺼웠다.

“맞아. 내가 이곳의 기밀을 빼 내서 실바누스에 던져 줄 수도 있고,전쟁을 원하는 아이루고인 들과 접선할 수도 있지. 그게 아니면一.”

아리스티네가 버터나이프를 들어 타르칸을 가리켰다.

“너를 죽이든가.”

그러곤 자신의 목덜미에 대고 옆으로 숙 그었다.

타르칸은 대답 없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어쩐지 그의 눈을 똑바로 직시 하며 도발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말했듯이 난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이곳에서 누군가를 죽이면 나도 죽을 텐데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아리스티네가 버터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밀정 노릇을 하기엔 수고로운 짓을 할 정도로 실바누스를 좋아하진 않아서.”

아리스티네는 ‘말해도 되는 정보’를 잠시 가늠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타르칸도 알게 될 일이다.

‘그렇다면 내 입으로 말하는 게 낫지.’

“난 어렸을 때부터 쭉 유폐당 했었어.”

아리스티네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타르칸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위대하신 실바누스의 황제 폐하께서는 날 중오하시지. 황제의 눈 밖에 나다 못해 유폐까지 당한 자식이 어떤 취급을 받을 진……”

아리스티네는 뒷말을 생략하고 생긋 미소 지었다. 눈꼬리까지 곱게 휘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타르칸은 불가해한 것을 보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아리스티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입 안에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 럼 까끌까끌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자신은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왜 유폐당했는지.

정확히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타르칸은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형제자매들의 조롱과 비웃음, 그 모든 걸 감내하며 홀로 서 있던 여자의 뒷모습.

‘하나는 알겠어.’

적어도 오늘 그렇게 모욕당한 게 아무런 상처도 안 될 정도라는 건 알겠다.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한 없이 가볍게 제 목숨을 헛바닥 위에 올리는 것은一.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지.’

그들이 여자의 목숨을 푼돈 취급 했을 거다.

그렇다면 이곳에 시집보낸 것도 죽으라고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

아이루고 내부에도 전쟁을 원 하는 사람은 있었다.

타르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더 캐묻는 대신 말을 돌렸다.

“그럼 그런 몰골로 온 것도 네 의지는 아니었겠군.”

“정답.”

아리스티네가 마지막 스콘 조각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유폐당했다는 건 조금만 조사해 봐도 나올 거야” 라고 덧붙이며 물었다.

“이제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어느 정도는.”

“좋아.”

아리스티네는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일단 그걸로 충분하다.

‘이렇게 길게 대화하는 거 오늘이 거의 처음인데 나 나름대로 잘하지 않았나?’

유폐당했을 때부터 홀로 지냈으니 거의 평생을 대화할 상대 없이 지낸 건데 이 정도면 선방 한 것 아닌가.

아이루고까지 오는 길에 시녀들과 말하긴 했지만 고작해야 ‘나오세요’,‘앉으세요’,‘드세요’ 정도의 대화였다.

‘그런 건 대화라고 할 수도 없지.’

오늘 타르칸을 만난 후부터의 대화야말로 아리스티네가 10년 남짓 만에 나눈 제대로 된 대화 였다.

‘열심히 웃었는데 이상하진 않았겠지?’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협상에서 꽤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을 제왕안으로 봐 왔기 때문에 일부러 웃은 거였다.

어쨌든 잘 마무리됐으니 그럭저럭 통한 건가 싶었다.

“그래서 본론인데.”

“본론?”

“내 안전을 위해 힘써 줘. 네가 원하는 세계 평화가 걸린 문제니까.”

아리스티네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서로 윈윈할 때 내 도움을 바란다던 거.”

“응.”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대체 뭐가 있겠냐는 눈 빛이었다.

타르칸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 긴 대화가 사업적 관계니, 윈윈이니 뭐니 했던 게 전부 목숨을 지켜 달라고 하기 위한 거였다니.

도저히 아내가 남편한테 처음으로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뭔가 대단한 걸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이런 걸. 이렇게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을.

‘대체 무슨 취급을 받았길래.’

여자가 첩자가 아니라는 전제하였긴 했지만,타르칸은 마땅히 그녀를 지킬 생각이었다.

혼약으로 묶인 이상 여자는 이제 그의 책임 아래 있는 사람이다.

아까 여자가 형제자매들에게 비웃음당했을 때 끼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이 아리스티네를 모욕한 건 곧 타르칸을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왜 실바누스 놈들이 거슬리는 거지?’

실바누스에서 아리스티네가 어떤 취급을 당했든 그와는 상관없다.

그때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책임이 아니었고 어떤 관계로도 엮이지 않았었다.

“……다른 건?”

“어?”

아리스티네가 되묻고 나서야 타르칸은 제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냥 이런 별것 아닌 걸 요구 하다니,참 쉽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면 될 것을.

정략혼이 결정되었을 때,타르칸은 제 아내에게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윈윈이니 뭐니 하면서 제안해 왔던 아리스티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던 것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여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는 것을 쓸데없다고,손해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도무지 자신의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 원하는 거? 딱히……”

고개를 젓던 아리스티네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을 빛냈다.

“아,그럼 나 개인 사업 좀 해도 될까? 내탕금 말고 아예 내 사재를 좀 만들고 싶어서……”

원래는 더 나중에 신뢰를 쌓고 말하려 했었다.

‘그래도 기회가 왔을 때 말하 는 게 좋겠지.’

“사업……”

“아니,정말 사업병 아니니까.”

아리스티네가 손을 내저었다.

진짜로 괜찮은 아이템이 있었다.

아이루고의 상황에도 딱 맞고, 왕의 염원까지 이뤄 줄 아이템이.

‘의료용 메스 사업!’

항시 마수와 전투를 치르는 아이루고는 야금술이 극도로 발달했다.

그 기술력을 이용해 의료용 메스를 만드는 거다.

‘이건 반드시 성공해.’

지금 쓰는 의료용 메스는 작은 단도 모양이고,쉽게 녹슬며,무엇보다 두께에 비해 날카롭지 않다.

하지만 아리스티네가 고안해 낸 방법대로 메스를 만든다면.

‘수술 성공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거야.’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아이루고와 관계가 안 좋은 타국-실바누스에서도 어떻게든 수입하기 위해 기를 쓰겠지.

거기다 야만적이라는 아이루고의 이미지 역시 쇄신할 수 있다.

즉,왕의 염원 역시 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또 얼마나 큰 이득으로 돌아오게 될까?

‘이 사업만 유치하면 대박이야.’

자고로 황금 보기를 내 것같이 하라고 했다!

하지만 타르칸은 말이 없었다. 왠지 불안했다.

‘돈은 소중한데!’

아리스티네는 열심히 당근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그렇지. 세계 평화 같은 거 말고 너한테 직접적인 이득이 있어야 제대로 된 협상이라 할 수 있지.”

빵빵한 금고를 위해 아리스티네는 열심히 자기 홍보를 시작했다.

“아까 말했듯 네가 부재할 때 내가 널 대리해서 상황을 처리 할 수 있어. 그리고一.”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루고는 지금 후계 다툼 중이지?”

원래라면 정궁의 소생인 하미르가 후계로 지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루고 왕은 결정을 늦추고 있다.

타르칸 때문에.

평민 모친을 둔 타르칸은 열 살 때 마수 사냥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살아 돌아왔다.

기실,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타르칸은 당시 아이루고를 괴롭혔던 주범,대마수 무르지카의 숨통을 끊어 냈으니까.

아이루고 내에서 그의 위치가 급부상한 건 두말할 필요 없었다.

“계승권자인 남편을 위해 아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에게 손을 뻗었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서로 돕도록 하자.”

타르칸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생경하게 바라봤다.

아리스티네의 뜻은 분명했다.

그가 그녀를 지키고,그녀는 그를 지킨다.

파트너.

그건 굉장히 기묘한 단어였다.

타르칸을 따르는 사람은 많았다.

당장 나가기만 해도 중정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치에 입을 맞 출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티네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등한 위치에서 같은 책임을 지고 같은 역할을 하겠다는 것.

“너,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살고 싶다면서 왕에게 찾아가 자신을 증명하고 이 긴 대화를 했던 아리스티네다.

정쟁에 뛰어들면 그녀의 목숨 을 노리는 자들도 새롭게 생길 것이다.

“어머,정략혼의 뜻을 모르는 거야?”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눈을 깜빡일 뿐이다.

타르칸이 씨익 웃었다.

“당연히 알지.”

타르칸의 손이 아리스티네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스치고,곧 손바닥이 맞닿는다.

아리스티네가 웃었다.

“우린 좋은 부부 사이가 될 것 같아.”

사랑이라곤 일절 없는,정략혼 이라는 사업의 파트너로서.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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