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죽는 게 당신의 역할 아닙니까!”
죽어서 실바누스가 정전 협정을 쩔 빌미를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리스티네의 본분이다.
“알아들었으면 어서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아리스티네의 무감한 음성이 로잘린의 말을 끊었다.
“여긴 아이루고야. 실바누스가 아니라.”
그 말에 로잘린이 움찔했다.
그녀는 망치로 얻어맞은 사람처럼 충격받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로잘린이 대꾸하지 않자 다른 시녀들이 앞으로 나섰다.
“하! 고작 그거 때문에 기고만 장해진 거군요!”
“설마 하고 걱정하긴 했지만 진짜로 이렇게 주제 파악이 안 돼서야.”
“아무리 여기가 아이루고라고 해도一.”
“확실히 개만도 못하네.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그렇게 감이 안 오는 걸 보면.”
감정 없는 목소리가 시녀들의 말을 싹둑 잘랐다.
아리스티네가 손바닥에 뺨을 묻으며 시녀들을 훑어봤다.
“나는 기르는 개만 집안에 들이자는 주의인데 어쩌지.”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친 시녀들이 흠칫 떨었다.
황녀가 저런 눈빛을 할 줄 알던가.
기억을 뒤져 봐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황녀와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위압감에 짓눌린 시녀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키우지 않는 들짐승은 보통 어떻게 되더라...”
느긋하게 중얼거리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분노도, 짜중도,재미도.
그게 시녀들을 더 질리게 만들었다.
“사냥감이 되었나,아니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혔나.”
어느 쪽이든 결말은 다르지 않다.
“황녀!”
압박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시녀들이 더 강하게 소리를 질렀다.
“내 이 일을 황제 폐하께 보고 할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하세요!”
“아까 아이루고 왕족들의 반응을 못 봤습니까? 착각하나 본데, 이곳이라고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할 거 같아요?”
“진짜 멍청하네.”
아리스티네는 질린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간 고분고분하게 있어 주었 더니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졌나 보다.
앞뒤 생각 안 하고 아래로 깔아 보던 사람이 대든다는 사실 에만 집중하고 있다.
‘뭐,됐어.’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이라는 강력한 파트너와 손을 잡았다.
그 말인즉슨,이제 이 궁에서 마음껏 활개를치고 움직여도 된다는 뜻이다.
슬슬 이들을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말로 해선 안 되는 바보들에게 이만 현실을 알려 줘 볼까.
그때였다.
“머,멍!”
좀 전부터 갑자기 조용해졌던 로잘린이 아리스티네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개처럼 짖으면서.
“로,로잘린 영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다른 시녀들의 경악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무릎 꿇은 로잘린의 얼굴이 수 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최대한 온 순한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올려 다보았다.
주인을 바라보는 개처럼.
“어머나.”
아리스티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 놀라지 않고 여유롭게 굴어야 한다는 걸 제왕안으로 봐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리스티네가 놀란 것은 로잘린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 때문이지,강아지 흉내 때 문이 아니었다.
인격이 형성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낸 아리스티네의 사고는 어딘지 남달랐다.
‘사람이 배고프다 보면 흙 좀 먹을 수 있지’ 하고 생각하듯 ‘사람이 급하게 어필하려면 개 흉내 좀 낼 수 있지’ 하고 납득 했다.
“귀여워라.”
아리스티네는 일부러 로잘린의 턱을 긁어 주었다.
로잘린은 얼굴을 더 붉혔지만 얌전히 손길을 받았다.
“무리 중에 개 한 마리가 섞여 있었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나긋 하고 부드러워,자신의 개를 아 끼는 자애로운 주인 같았다.
로잘린은 수치스러움을 느끼면 서도 꿇어앉은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다른 시녀들이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
여긴 실바누스가 아니다. 아이루고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 쩍 들었다.
아리스티네가 여태 반항이라곤 모르는 듯 고분고분하게 굴었기에 아이루고에 와서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황녀가 여태까지 고분거렸던 게 발톱을 숨기고 있었던 거라면.’
시녀들 모두 아이루고에 연고 하나 없는 사람들이다.
아리스티네를 무시하면서 깔깔 거렸지만 그들의 신세라고 좋진 않았다.
곧 죽게 될,버림받은 황녀의 감시 역으로 적대국에 온 처지.
쟁쟁한 가문의 영애들은 모두 이 자리를 피해 갔다.
사실상 그들은 모두 제국에서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었다.
궁내 관리인이 황녀를 위해 조금 남겨 준 예산을 뜯어먹는 것 에 희열을 느끼는 정도의 가문.
황녀를 괴롭히고 무시한 것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아래로 깔아 보며 불안을 잊고 희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기사 하나가 타르칸 왕자에게 얻어맞고 끌려갔다고 했지.’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 없다면서.
아리스티네는 기르는 개가 아니면 집안에 들여놓는 성미가 아니라고 했다.
만약 발톱을 드러낸 아리스티네에게 내쳐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내가 개가 되는 수 밖에.’
로잘린은 그간 아리스티네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사람이었다.
모욕과 힐난은 기본이고,밥에 다가 자갈을 섞고,구멍 난 옷을 흙발로 짓밟은 다음에 주었다.
조금 전에는 죽는 게 네 본분 이라며 소리치지 않았는가.
이제 와서 살갑게 구는 걸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할 땐 확실하게.’
“멍멍.”
로잘린은 아리스티네의 손길을 받으며 순종적으로 짖었다.
“애교도 피우고,귀여운 강아지야.”
아리스티네가 만족스러운 눈으 로 로잘린을 내려다봤다.
어제,아니,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로잘린이 이렇게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자신의 몰골은 어떤가?
시궁쥐 같던 황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수치심에 절로 이가 갈리려 했다.
하지만 로잘린은 어떻게든 턱에 힘을 빼려 노력했다.
아리스티네는 자신의 턱을 긁 고 있다. 이 가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눈치첼 것이다.
그럼 이 수치스러운 개 흉내도 물거품이 된다.
‘그럴 순 없어!’
로잘린은 최대한 눈을 온순하게 뜨며 부드러운 천에 감싸인 아리스티네의 종아리에 얼굴을 비볐다.
“미,미쳤나 봐..
“히익..”
아연한 시녀들이 로잘린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저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
고 생각했지만,똥물 보듯 피하 는 걸 보자 눈에서 절로 불똥이 튀었다.
아리스티네에게 향하지 못하는 분노가 그들을 향했다.
그런 마음을 읽은 것처럼 개의 주인이 노래하듯 명했다.
“나는 네가 사냥개로 자라났으면 좋겠어.”
로잘린의 진녹색 눈동자가 번 뜩였다.
사냥개.
아주 좋았다.
“멍!”
‘그래,이왕 개가 되는 것,단 번에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죽이는 사냥개가 되도록 하지.’
첫 사냥감은 바로 눈앞에 있는 시녀들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함 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로잘 린의 눈동자는 잔혹하기만 했다.
‘상황 판단도 못 하는 것들이 감히 그딴 눈으로 날 쳐다봐?!’
아드득,이가 갈렸다. 꼭 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로잘린은 더 이상 이 가는 걸 숨기지 않았다.
사냥개는 주인의 뜻대로 사냥 할 것이다.
사냥감을 물어뜯고,물어뜯고, 물어뜯어 전부 다 잡으면.
그 후에 남는 건 단 하나다.
아리스티네.
‘내 맨 마지막 사냥감은 너야.’
로잘린은 아리스티네를 향해 비굴하게 웃었다.
이깟 개 흉내는 얼마든지 내 줄 수 있다.
최후의 순간,자신의 개에게 물린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생각 하면.
아리스티네가 자신의 아래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녀가 아무리 애원해도,멍멍 짖고 네 발로 기어도,심지어 개 밥을 먹더라도!
‘내 결코 오늘을 잊지 않을 거야……!’
아리스티네는 로잘린을 쓰다듬던 손을 뗐다.
속마음을 들켰나 흠칫하는 로잘린을 향해 그녀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사냥 솜씨부터 한번 볼 까.”
* * *
타르칸의 벗은 등에서 하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움 푹 들어간 그의 척추를 따라 땀 방울이 흘러내렸다.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짐승의 안광과도 같은 빛이 그 의 금안에 일순 어렸다.
타르칸이 검을 횡으로 넓게 휘 둘렀다. 검날이 남기는 궤적이 마치 반월 같았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짐승의 갈기처럼.
타르칸이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을때까지 주변은 아무런 변화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돌 인형은 모두 그에게서부터 스무 발자국은 떨어져 있었다.
검격이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그러나.
쿠구구구궁一!
굉음과 동시에 멀리 있던 석상들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쓰러졌다.
“주군.”
연무장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듀란테가 다가와 타르칸에게 수건을 건넸다.
“슬슬 회의 시간입니다. 다들 모였습니다.”
두꺼운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한 번 홈친 타르칸이 고개를 끄덕이곤 회장을 향해 걸음을 옮 겼다.
“전하.”
“주군.”
“오셨습니까,전하.”
타르칸은 자신의 보좌들이 건네는 인사를 눈짓으로 받았다.
그들은 모두 다 뛰어난 전사들이었다.
“어제 잡았던 마수 사체 처리 에 대한 보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타르칸이 상석에 자리하자마자 보좌들은 거두절미하고 보고부터 들어갔다.
주군이 시간 낭비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회의는 길게 이어졌다.
“……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대규모 소탕을 나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실바누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평원 관리에 소홀했지 않습니까.”
실바누스.
그 말에 마수에 대한 것만 이야기하던 전사들이 모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황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듀란테 녀석에게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더군요. 재미 없는 놈.”
“듀란테 밑의 녀석들은 그 반대여서 문제요. 황녀가 마음에 든다며 경거망동하질 않나.”
“거참,실바누스의 황녀 따위가 마음에 들다니. 말이 됩니까?”
“주군의 신부가 될 사람이다. 말을 조심해라.”
지켜보던 듀란테가 조용히 한 마디 했지만 역효과였다.
“실바누스인에게 말조심할 게 뭐가 있나! 무슨 속셈으로 왔는지 모르는데!”
단조롭게 보고가 이어지던 회 장이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졌다.
말보다 검이 나가는 게 더 빠 른 전사들이다.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타르칸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칼렌.”
나직한 목소리에 전쟁통 같던 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예,주군.”
자칼렌은 뛰어난 전사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뛰어난 책략사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잔뜩 달고 있는 외양과 달리 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한 문관이었다.
“황녀가 유폐당했었단 사실을 왜 보고하지 않았지? 조금만 조사해 보면 나오는 간단한 사실 이라는데.”
질책이 담긴 금안이 자신을 향하자 자칼렌은 채찍을 맞은것처럼 흠칫했다.
그러나 그는 억울했다.
“저는 분명 보고하려 했습니다,주군.”
“보고하려고 마음먹는 건 중요 하지 않아. 실제로 보고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하지.”
나지막한 꾸짖음이 자칼렌에겐 천둥처럼 들렸다.
그는 더더욱 억울해졌다.
“실제로 말씀드렸는데…. 주군께서 들을 필요도 없다고 안 들으셨습니다.”
타르칸이 입을 다물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실바누스에서 정략혼으로 오는 황녀 따위 최소한의 책임만 다 하며 평화를 위해 살려 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부왕 네프테르가 원하는 건 정략혼을 통한 전쟁의 종언만이 아니었다.
황녀의 혈통을 통해 평민 모친을 둔 타르칸의 정치적 약점을 보완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걸 알기에 타르칸은 황녀에 대해 알기를 거부했다.
황녀의 배경 따위는 감히 그에 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테니까.
타르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피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고귀한 피를 가졌다는 여자의 혈통이 더해져야 왕좌에 더 가 까이 다가갈 수 있다니.
부왕은 자신을 너무 우습게 보 는 게 틀림없다.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후계자 자리에 들이밀고 싶으신 건가.’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는 타르 칸의 부적격 요소를 하나하나 배제해서 어떻게든 후계로 삼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까지 안달 내는 이유는 하나였다.
정작 타르칸 본인이 왕좌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도,염원하는 것도 아니다.
타르칸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정치 다툼은 성미에도 맞지 않고 제왕의 자리가 욕심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복형 하미르는 왕이 되는 순간 타르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도륙할 것이다.
하미르가 도륙할 수많은 것들에 이제 한 명이 더 추가됐다.
어두운 모발을 가진 아이루고 인들에게선 쉬이 볼 수 없는 찬란한 은발.
새벽하늘을 닮은 고귀한 눈동자.
여자의 모습이 눈가를 스쳤다.
그렇다고 해도,타르칸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놓지 못한다.
“그래도 황녀가 오기 전에 보시라고 보고서를 올려뒀습니다. 그런데……”
생각에 잠긴 타르칸의 모습에 불안해진 자칼렌이 자신의 빈틈 없는 일처리에 대해 보고했다.
“그런데?”
“주군께서 좋은 불쏘시개라며 그대로 불에 태워 버리셨죠.”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커다란 자칼렌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