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왕 말하는 것,자칼렌은 자 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로 했다.
“한 번만 더 내 시간을 낭비하면 너를 불쏘시개로 써 주겠다 一라고 저를 위협,아니,말씀하셨지요.”
그래서 그 후로 황녀의 ‘ᄒ’도, 아리스티네의 ‘ㅇ’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왜 보고하지 않았냐고 물으시면……”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자칼렌의 눈이 물기로 아련하게 반짝였다.
그러나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단단히 자리 잡은 커다란 남자의 눈물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의 마음도 흔들지 못했다.
“……앞으로 그녀에 관한 것은 빼놓지 말고 내게 보고해.”
타르칸은 이 화제를 종결시키겠다는 둣 한 마디로 마무리했다.
“예?”
그 말에 놀란 것은 자칼렌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내비 치며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특정인에 관한 정보를 빼놓지 않고 듣겠다는 건 타르칸답지 않았다.
그는 항상 중요한 것만 간략히 정제한 정보를 원했다.
‘설마,주군께서 새 신부에게 마음이라도 끌리신 건가……?’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국과 종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니까. 정보를 알아 둬서 나쁠 건 없겠지.”
그 말에 대다수의 전사들이 납득했다.
그럼 그렇지. 주군이 어디 그렇게 쉽게 마음을 내줄 분이던가.
하지만 자칼렌의 속은 더 터지기만 했다.
‘아니,그걸 아시는 분이 여태 까지 보고하려 할 때마다 왜 그렇게 역정을 내셨답니까! 왜 이제 와서..!’
그러나 갑은 갑이었기에 을은 속으로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회의는 더 길게 이어졌다.
논의할 사항을 마무리하고 이제 해산할 무렵이었다.
“……그리고.”
입을 연 타르칸은 드물게 뜸을 들였다.
자칼렌을 비롯해 회장에 있는 전사들의 귀가 종긋 섰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지?’
저번에 타르칸이 뜸을 들였을 땐 전사의 희생이 불가피한 작전을 말했을 때였다.
그러나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 리할 수 있는 최적의 수이기도 했다.
전사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실바누스 제국과는 종전 협상이 오가는 중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대는 언제나 평원에 있었다.
제국 놈들보다 더 지독하고 끈질긴 마수들.
그들은 모두 치열한 전투에 나설 각오를 다졌다.
“……스콘을 잘 만드는 파티시에를 섭외해라. 다른 궁 소속이어도 상관없다.”
“예,주군!”
주군의 명이니 일단 무조건 따르겠다고 답한 전사들이 이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 었다.
“……더 보고할 건 없겠지.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주군께서는 다시 말씀하시지 않고 어째서인지 자리를 피하듯 회장을 나가셨다.
‘하하,주군께서 자리를 피하다니 그럴 리 없지.’
‘급한 일이 있으셨나 보지.’
‘원래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분이시니까.’
각자 저마다 타르칸을 위한 핑계를 마련해 주며 애써 납득했다.
정말 눈물겨운 충정이었다.
“그런데 웬 스콘? 주군께서 스콘을 좋아하셨나?”
“빵 하나에 호불호가 있으실 분이냐. 열량이 얼마여서 비상시 섭취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만 생각하실 분이시다.”
“스콘 열량이 높긴 한데……. 새로운 전투 식량을 개발하시 나? 근데 왜 하필 스콘? 더 열 량 높은 게 있을 텐데.”
“주군의 높은 뜻을 우리가 어 찌 이해하겠나.”
그렇다. 그들은 정말 타르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햇볕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눈 가를 두드렸다. 아리스티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와,이불이 엄청 포근포근해.’
수마에서 벗어나자마자 든 생각이다.
손을 들어서 이불을 내리누르자 폭 가라앉았다.
‘푹신해!’
아리스티는 저도 모르게 볼록 솟은 옆을 푹 내리눌렀다.
푹,푹,푹! 계속 반복한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 정했지만 두 뺨은 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밌어.’
어젯밤에는 침대에 눕는 것을 끝으로 기억이 없다.
아마 푹신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기절하듯 잠들었나 보네.’
그럴 만했다.
실바누스에서 아이루고로 오는 내내 아리스티네는 제대로 된 휴식 한 번 취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어제는 아리스티네의 인생에 없었던 사건들이 가득가득 일어났다.
모두 잘 해냈지만, 심력이 소모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깨끗이 씻고,깨끗한 옷을 입고,흔들리지 않는 침대 위에 몸을 누인 게 얼마 만인지.
‘거기다가 이렇게 푹신하기까지 하고! 베개도 푹신해!’
팡팡! 파바바방!
아리스티네는 베개를 두드리는 감촉을 즐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타르칸?”
침대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 옆에 앉아 있는 타르칸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햇빛이 들어올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곳은 유폐당했던 곳이 아니다.
침대 주변에는 당연히 햇빛을 차단하는 커튼이 달려있다.
자고 있는데 햇빛이 비친다는 건 누군가가 그 커튼을 걷었다는 소리다.
‘보통은 시녀가 깨우기 위해 걷겠지만.’
“좋은 아침…… 아니,점심인가.”
타르칸이 오후 햇살을 받아 한껏 나른해진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는 가운데가 파인 베개를 눈짓하며 물었다.
“재밌어?”
“어,뭐. 푹신하길래.”
아리스티네는 답지 않게 얼버무렸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방금 그 모습을 들킨 건 조금 창피했다.
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남편이 아내의 침실에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타르칸의 얼굴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야릇한 말이었지만 아리스티네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그녀는 그와 비슷한 미소를 돌 려주며 답했다.
“우리 아직 혼전인데.”
어제도 했던 말이었다.
“그럼 결혼 후에는 마음대로 와도 된다는 뜻인가?”
아리스티네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대답없이 빤히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타르칸이 뭐냐는 둣 한쪽 눈썹 을 치켜올렸다.
“아니,너도 참 한가하구나 싶어서.”
한가하다는 말은 타르칸이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그냥 깨워도 됐는데 무작정 기다리다니 …. 일정 없어?”
아리스티네의 말에 타르칸의 얼굴에 혈관이 솟았다.
당연히 깨우려고 했다. 왜 안 그랬겠는가.
처음 아리스티네의 방에 방문했을 때 타르칸은 침실 밖에서 대기했다.
여자,아니,남녀를 통틀어서 자고 있는 사람을 기다려 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아침 수련을 끝내고 보좌 회의 까지 마치고 나서,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리스티네의 방에 온 거라 타르칸은 조금 당황했다.
사람이 아직까지 잘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곧 그녀가 긴 여행을 마친 직후라는 것을 떠올렸다.
긴 여행이라고 해 봤자 고작 마차 여행이 아니었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자그마한 아리스티네의 체구를 생각하면 마차 여행에도 지칠 만했다.
자게 내버려 두고 타르칸은 군기를 살필 겸 잠시 훈련장에 다녀 왔다.
아리스티네가 숙면을 취하는 바람에 괜히 전사들만 오전부터 지옥을 맛봤다.
‘이쯤이면 일어났겠지. 사람이라면.’
하지만 타르칸이 돌아왔을 때, 아리스티네는 여전히 쿨쿨 자고 있었다.
〈저희도 깨워 봤지만 황녀님께서 일어나시지 않습니다.〉
아리스티네를 모시는 시녀가 그렇게 고했다.
타르칸은 시녀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궁인들 간의 일에 신경 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더러운 몰골의 아리스티네를 안아 들기 전,눈앞의 시녀 들이 손가락질당하는 그녀를 보고 깔깔 웃고 있던 게 떠올랐다.
타르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제 피를 봤는데도 잔혹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아리스티네에게 생각이 미쳤다.
〈당연하지만 난 죽고 싶지 않아.〉
한없이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말하던 모습.
시녀들이 벌써 손을 썼을 리가 없다.
지금 아리스티네를 죽이면 바로 전쟁이 일어난다.
아직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실바누스에서 그걸 원할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타르칸은 초조하게 침실 문을 열었다.
〈타,타르칸 전하!〉
시녀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녀들은 감히 레이디의 침실 에 제멋대로 침입한 타르칸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부릅떴다.
‘이런 야만인 같은 행동이라니……!’
아무리 결혼할 사이여도 이건 명백한 무례였다.
‘아무리 보기 좋다 해도 역시 아이루고 야만인은一.’
그렇게 하던 생각도 타르칸의 다음 행동에 뚝 끊겼다.
좌아아악!
타르칸이 아리스티네가 잠들어 있는 침대의 휘장을 거칠게 열어젖힌 것이다. 일말의 망설임도
〈타,타,타르.... 기,기사를 불러!〉
〈아니,기사를 어찌 침실에 들이려고!〉
이 초유의 사태에 시녀들은 패 닉에 빠졌다.
시녀들이 아리스티네를 생각하는 마음에 혼란에 빠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황녀를 무시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자체의 충격이 너무 컸다.
그녀들이 정말 충성심 넘치는 시녀였다면 몸을 던져서라도 타르칸을 막았을 것이다.
시녀들이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사이,타르칸은 넓은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다.
다음 순간,타르칸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아 올렸다.
아리스티네의 몸에 감긴 새하얀 이불이 물고기의 꼬리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녀의 몸이 타르칸의 품 안에서 흐드러 졌다.
〈세,세상에…….〉
그 광경을 본 시녀들이 기함했다.
아리스티네는 여전히 깨지 않았다.
타르칸은 굳은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들여다보았다.
‘혈색은 나쁘지 않은一.’
쌕,쌕,쌕.
그때,살짝 열린 그녀의 입술 에서 자그마한 숨소리가 들렸다.
타르칸은 순간적으로 아리스티네를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침대 위로 그녀를 내려놓았다.
내려놓았다기보다는 떨어트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거친 움직임에도 아리스티네는 잠시 입맛을 다셨을 뿐,깨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인간이긴 한 건가…….〉
타르칸은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타르칸이 침실에 있는 것에 대해 포기했는지 시녀들은 조용했다.
그 김에 타르칸은 아예 침실에 자리 잡고 앉아 그녀들에게 명했다.
〈차〉
시녀들은 무뢰한 보듯 타르칸을 바라봤지만 잠자코 차를 내왔다.
어째서인지 트레이를 세 명이서 함께 가져왔다.
〈여기 드시어요,타르칸 전하.〉
〈아직 전하의 취향을 몰라 설탕을 넣지 않았습니다. 제게 전하의 취향을 가르쳐 주셔요.〉
〈크림은 필요 없으신가요?〉
정신 사납게 셋이서 돌아가며 사람을 귀찮게 했다.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차 가져오는 것도 혼자 못 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자 시녀들이 붉어진 얼굴로 씨근덕대며 물러갔다.
순식간에 몰려온 피로 때문에 타르칸은 차 한 잔만 마시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삼 일 밤낮을 자지 않아도 피로를 느껴 본 적이 없는데 피로라니.
참 대단한 여자였다.
그렇게 실소하고 있었을 때 푹,하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잠자는 침실의 황녀님이 깨어난 것이다.
아리스티네는 고개 숙인 채 한 참 동안 말이 없는 타르칸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 저러지? 부끄러워하는 건가?’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왜 안 깨웠냐는 말에 저렇게 부끄러워하다니. 수면 거울에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여자가 너무 천사같이 자서 차마 깨우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던 남자가 있었다.
여자가 일어나 왜 깨우지 않았느냐 묻자 저렇게 굴었다.
정답을 알게 된 아리스티네가 환하게 웃었다.
티 없이 맑고 깨 끗한 미소였다.
“아,알겠다. 내가 너무 천사같이 자서 깨우지 못한 거구나? 부끄러워하긴.”
“..............”
타르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힘이 꽉 들어가 떨리는 손이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조금만 더 힘주면 도기 찻잔이 파사삭 조각날 것이다.
“그런데 음……”
아리스티네는 살짝 말을 망설 였다.
불안하다. 타르칸은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가 더 빨랐다.
“침대 휘장까지 몰래 걷고 차를 음미하며 자는 사람의 모습을 감상하는 건……”
보랏빛 눈동자가 묘한 색을 띠 고 타르칸을 위아래로 훑는다.
“뭐,취향은 자유라지만.”
변태.
그렇게 말했을 때의 눈빛과 똑 같았다.
“적어도 내게는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뒷골이 당겨 왔다. 타르칸은 진한 차를 한 잔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