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화
당연한 말이지만,타르칸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는 사람의 모습을 감상하는 취미를 가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명백한 용건을 가지고 아리스티네의 방에 방문했던 거였다.
“사절단이 왕을 알현하기 전에 사전 지식을 알고 가는 게 좋지 않겠나.”
“어머나,친절해라. 그걸 알려 주려고 직접 찾아오다니. 역시 어제 내가 보여 준 능력에 꽤 감동했나 봐?”
“……잘못 찾아온 것 같군. 이만 가 보지.”
당장 일어날 기세인 타르칸을 보고 아리스티네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렇게 쉽게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역시 용건이란 건 핑계 였고 천사처럼 잠든 나를……”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타르칸은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따뜻한 차가 냉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속이 뜨거웠다.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은 아리스티네가 침대에서 빠져나와 타르칸의 앞에 섰다.
“어느 쪽이야? 내 능력에 감동받은 거야,아니면 천사처럼一.”
“네 능력에 감동받았다.”
타르칸이 짓씹듯이 내뱉었다.
아리스티네의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그래,당연히 그렇겠지. 나도 내가 꽤 대단한 거 같아.”
무표정하게 돌아온 아리스티네의 얼굴엔 장난기 하나 없이 진심만이 가득했다.
진짜 이런 여자는,아니,이런 사람 자체를 보지 못했다.
타르칸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삼키며 고개를 까닥였다.
“일단 천사가 잠잔다는 이 빌어먹을 침실에서 나가자고. 밥도 먹어야 하니까.”
그 말에 아리스티네의 눈이 빛났다.
어제 저녁밥도 엄청 맛있었던 지라 무척 기대가 되었다.
그녀가 깨어난 후로 가장 진실 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반짝반짝 별무리가 깃든 보랏 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타르칸은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여자.’
이런 모습만 보면 왕의 앞에서 다른 왕족들을 물 먹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어쩐지 오늘 밤 열리는 사절단 환영회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고?’
타르칸은 자신의 생각에 조금 놀랐다.
그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기대가 아니다. 기대일 리 없다.
“우리 이따 알현 시간에 딱 맞춰 가자. 미리 가지 말고.”
식당으로 이동하며 아리스티네가 재잘재잘 말을 걸었다.
“그래, 그게 좋겠지. 미리 가 봤자 부딪칠 일만 생기고.”
“응,그것도 그렇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바라보 자 아리스티네가 싱긋 웃었다.
“우리 잘해 보기로 했잖아? 파트너.”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자세한 건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구. 아, 그 전에 좀 준비해 주었으면 하는 게 있는데……”
Chapter 6. 수줍음이 많은 변태
“뭐야,로잘린 영애.”
“지금 와서 황녀한테 달라붙어선……”
“자기가 제일 많이 괴롭혔으면 서 저러는 것도 웃겨.”
시녀들이 아리스티네의 치장을 돕는 로잘린을 보면서 입술을 삐죽였다.
황녀의 개가 되어 꼬리를 흔드는 꼴을 보니 짜증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위기감에서 비롯된 감정이었으 나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침한 표정으로 아리스티네에게 다가갔다.
“황녀님,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호기롭게 말을 걸었지만 아리스티네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에 시녀들은 허,하고 기가 찬 숨을 내뱉었다.
로잘린이 앞으로 나섰다.
“감히 황녀 전하께 무슨 망발이냐!”
“로잘린 영애야말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시녀라는 자들이 아이루고 왕을 알현하러 가는 전하의 준비를 돕지는 못할망정 고개를 뻣뻣이 들고 따지다니!”
로잘린이 진녹색 눈동자를 날 카롭게 치뜨며 시녀들을 노려봤다.
그 기세에 다른 시녀들이 주춤 했다.
여태까지 로잘린이 주도적으로 아리스티네를 괴롭혔던 만큼 시녀들 중 가장 성격이 드센 사람 역시 그녀였다.
하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잘린 영애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웃기네요.”
“브로디 영애!”
브로디는 저 버러지 같은 황녀에게 무릎 꿇고 멍멍 짖은 로잘린 따위를 무서워하는 게 더 우습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은 저 황녀 때문에 얼굴에 화상까지 입지 않았는가!
치료를 받고 있긴 하지만,신관이나 마법사에게 상처를 보이지 못해서 회복 속도가 더뎠다.
거울을 볼 때마다 흉측하게 부 푼 수포에 이가 갈렸다.
사실 화상을 입은 건 먼저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쏟으려 했던 자신 때문이었지만, 그런 건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해하는 거 같은데,우린 황녀님께 따지는 게 아니에요. 간언하는 것 역시 시녀의 역할 아 닌가요?”
브로디는 그렇게 말하곤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대 실바누스 제국의 대표로서 아이루고 왕을 만나러 가는 자 리입니다. 그런데 아이루고 의복을 입다니요.”
그 말대로 아리스티네는 아이루고 양식으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제국에서 제대로 된 옷을 가져 오지 않았기에 아이루고에서 준 비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바누스의 대표면 실바누스의 옷을 입어야지요!”
브로디의 눈짓에 다른 시녀들 이 아리스티네의 옷을 가져왔다.
보름이나 입은 채 여행해 때가 타고 모양도 어그러져 너절해진예복이었다.
“자,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의 결혼을 축하하며 직접 선물하신 옷입니다. 폐하의 신하로서도 딸 로서도 응당 이 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아리스티네는 그 말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로잘린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로잘린이 홈칫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짜악一!
날카로운 파열음이 방 안에 울렸다.
브로디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눈을 깜빡였다.
왼뺨이 화끈거리며 타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멸리는 손을 들 어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지,지금,내 뺨을 때린 거 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지저분한 옷을 황녀 전하께 내밀다니,이는 전하를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반성 하도록 해!”
“하! 어디까지 하나 싶었는데 미쳤어? 뭐가 잘났다고 훈계질 이야? 이 옷이 지저분해진 이유 중 태반이 네 탓인데!”
악에 받친 브로디가 로잘린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개싸움.’
아리스티네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느낌으로 시녀들을 보 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일을 통해 시녀들의 화살은 아리스티네가 아니라 서로를 향할 듯 했다.
‘귀찮은 게 좀 줄어들겠지.’
시계를 확인한 아리스티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둘째가 아니라 첫째 황녀가 왔다죠?”
반미치광이라 괴상한 몰골로 왔다던데……
귀족들이 떠드는 소리에 왕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제 아리스티네가 더러운 몰골로 타르칸의 궁에 왔던 이야기는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졌다.
그에 반해 네프테르와 함께 차를 마시며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게 그건 타르칸에게 유리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 대다수는 하미르를 추대하고 있지만,왕의 의중이 있는 이상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도 상당수 있었다.
타르칸의 핏줄에 있는 결함은 아리스티네와의 혼약으로 어느 정도 상쇄된다.
아무리 적대국이라고 해도,실 바누스 황가는 전 대륙을 통틀 어 가장 오래된 지배 가문이었다.
몸에 붉은 피 대신 황금이 흐른다는 귀하디귀한 혈통.
왕후의 눈매가 살짝 경련했다.
‘그 천것에게 실바누스 황녀를 붙여 주다니……!’
왕의 결정에 속에서 천불이 솟았지만 티를 낼 순 없다.
어쨌거나 전쟁의 끝을 가져온 혼사였다.
반대하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은 욕심에 나라의 평안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아리스티네나 타르칸에 대해 이로운 말이 퍼져 나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왕후의 언질을 받은 예니카리나와 파엘라미엔,마르텐,그리고 스탈리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함구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황녀가 광인이라는 편견이 높아져 봤자 도옴이 안 돼.’
예니카리나는 그깟 모지리 황녀 따위 자신보다 못하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지만,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 황녀가 정치적 수완이 있다면 이 편견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전으로 다가와 도움이 될 것이다.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왕후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왕후.”
네프테르의 부름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예,폐하.”
“자리가 부족한 것 같은데.”
“예?”
왕후는 의아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족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모두 의전 서열에 따라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알현 시각 전이라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은 아직 들지 않았다.
올 사람은 있는데 빈자리는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 했다.
왕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궁내부장이 실수를 했나 봅니다. 제가 당장……”
“이런 일을 왕후께서 확인도 하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당연히 확인했다.
사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의 자리를 없애라고 지시한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침통한 얼굴을 했다.
“……제 불찰입니다,폐하. 드디어 종전이 찾아오고 양국 간의 오랜 적대 관계가 끝난다는 사실에 들떠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왕후는 말을 길게 이으며 시간을 끌었다.
무엇을 위해 자리를 됐는데 지금 와서 허사로 만들 순 없다.
‘조금만 더.’
어차피 곧이었다.
아니나 다를까,시종의 목소리가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타르칸 전하와 실바누스 제국 의 황녀,아리스티네 전하께서 사절단과 함께 당도하셨습니다!”
그 말에 왕족들과 귀족들은 모두 성대한 비웃음을 홀릴 준비 를 했다.
오늘 타르칸은 새 신부 탓에 톡톡히 망신당할 것이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타르칸의 손을 잡은 아리스티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알현장 내에 있던 사람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눈이 찢어질 둣 커졌다.
상상했던 장면이 있었던 만큼, 그들은 아리스티네가 움직이는 모습을 비현실적으로 바라봤다.
등나무 꽃잎이 소복이 내린 것 같은 긴 은빛 머리칼을 늘어트린 채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아리스티네는 이 세상에 저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선명했다.
“아이루고의 제왕을 뵙습니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그제야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모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온갖 생각들이 와글와글 시끄럽게 느껴졌다.
소란한 정적을 뚫고 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소,황녀. 아이루고는 황녀를 환영하오.”
“아이루고의 환대에 감사를 표합니다.”
발성과 발음,그리고 시선과 표정. 무엇 하나 부족하지도,넘치지도 않았다.
긴 시간 유폐를 당해 모자라다는 평을 듣는 황녀라기엔 너무나 차분했다.
‘아이루고에 우습게 보이지 않겠다고 인사만 수십 번 연습한 덕분이겠지.’
‘주변에서도 첫 알현만큼은 계속 연습시켰을 테니까.’
시궁쥐 같은 몰골만 봤던 왕족들은 애써 납득했다.
그렇게 결론 내기에는 입궁할 때 거지꼴로 온 것이 이치에 맞지 않았지만,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 생각이 옳아야만 하니까.
“긴 여정이라 들었답니다. 오는 길이 힘들지 않았나요? 포털이 아니라 구식 마찻길을 이용했다 들어 걱정이 많았습니다.”
아리스티네에게 왕후가 일견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속에 담긴 뜻은 조소가 가득했다.
이번 혼사를 위해 적대적인 양 국 간의 포털이 270년 만에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실바누스 측에서 이를 거절했다.
이 상황에서 왕후가 포털과 마찻길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는 명백하다.
황제가 일부러 고생시킨 걸 알고 있다.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너는 포털 이용도 허락 못 받은 천더기가 아니더냐.
‘대강 그런 뜻일까.’
왕후를 향한 아리스티네의 입술이 살포시 호선을 그렸다.
“전쟁으로 흐르던 피를 멎게 하기 위한 여정인데 어찌 힘들다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혼담에 나라의 평안이 달렸는데 지금 시비 거냐?
아리스티네의 말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아리스티네를 반쯤 미친 광인이라 알고 있던 왕족과 귀족들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백치까진 아니어도 왕후의 속뜻을 못 알아듣고 바보처럼 헤실댈 거라 생각했다.
혹여 알아듣더라도 현명히 받아치지 못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기대했다.
‘뭐지? 소문과 다르잖아?!’
‘어제 분명 광인처럼 이상한 몰골로 왔다던데……’
‘유폐당해서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거 아니었어?’
타르칸은 그 멍청한 면면들을 조금 유쾌한 기색으로 바라봤다.
과연 그의 파트너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동요를 수습하기도 전에 아리스티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포털은 편하지요. 하지만 몸이 조금 고생하더라도 실바누스와 아이루고를 직접 두 눈에 담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는 강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양국 백성들의 삶이 많이 황폐해졌더군요. 그게 제 마음을 아프게 했지, 몸이 고단한 것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이끌고 통치하는 자로서 이보다 귀감이 되는 대답은 없었다.
왕후의 입매가 경련했다.
‘그게 아니라 황제가 막은 거잖아!’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평소라면 스탈리나가 멍청하게 한마디 했겠지만,그녀는 어제 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
“호오,실바누스 황제가 자식을 잘 두었군. 포털을 이용하지 않은 것에는 황녀의 깊은 뜻이 있었어.”
아이루고 왕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게 팔 받침을 탕탕 쳤다.
그 선언과도 같은 칭찬에 왕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