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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16화 (16/183)

16화

이로써 아리스티네가 구식 마찻길을 이용한 것은 황제에게 냉대받아서가 아니라,오릇이 그녀의 결정 때문인 것이 되었다.

아이루고 왕이 그렇게 인정했으니 다른 사람이 여기서 더 파고들 수는 없었다.

‘만만치 않아.’

왕후는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며 우아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속은 새까닿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정적을 뚫고 호방한 남자 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실바누스의 황녀님이라 콧대 높을 줄 알았는데 이거,생각보다 소탈하신 분이셨군. 새 가족의 성격이 좋아 다행입니다.”

‘소탈’이라고 발음할 때 유난히 과장된 느낌이었다.

다분히 의도 적이었다.

아리스티네는 말을 건 상대를 바라봤다.

‘스키엘라 공작.’

알현 전 타르칸과 함께 밥을 먹으며 파악했던 정보를 다시금 상기했다.

‘왕후의 부친. 즉,1왕자 하미르와 2공주 예니카리나의 외조부로 하미르의 최측근이라고 했지.’

나라 이야기를 꺼내며 콧대 운운하는 것은 당연히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에게 호의적이었던 왕은 그 점을 딱히 꾸짖진 않았다.

온갖 허례허식에 찌든 실바누스와 달리 아이루고에서 이 정도 방만함은 용인되는 수준이어서도 있지만一.

‘나를 시험하고 있어.’

아리스티네는 왕의 생각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 정도쯤이야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겠지.’

왕뿐만이 아니다. 타르칸 역시도 명백하게 그녀를 재어 보고 있었다.

아리스티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저도 황녀께서 소탈하신 게 마음에 듭니다. 실바누스의 대표로 이 자리에 나오시며 우리 아이루고의 의복을 갖추셨잖아요. 그만큼 아이루고에 호의적이라 는 뜻이겠지요.”

‘호의적’이 아니라 정확히는 ‘비굴하다’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저 뒤에서 실바누스 시녀들이 꿍얼거리고 있을 게 눈에 선했다.

그것 보라며 실바누스 의복을 입어야 했다며 속닥거리고 있겠지.

그딴 옷을 입어 봤자 아리스티네에게 더 해가 되었으면 해가 됐지,득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에게 잘 보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실바누스는 전쟁에서 밀려 종전을 제안한 건데”

응당 우리 비위를 맞춰야지. 그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하긴,저 많은 공물을 보세요. 거기에 황녀까지 얹어서……”

이젠 아예 면전에서 아리스티네를 공물 취급 했다.

그렇게나 야만인의 나라라며 아이루고를 무시했던 실바누스에서 가장 고귀한 황가의 핏줄을 내준 것이다.

제국의 황녀지만 전쟁에서 져서 팔려 온 주제를 자각하라는 말이었다.

우리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게 당연하니,설설 기라고.

왕족과 귀족들의 대화는 갈수록 선을 넘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였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황녀는 멀쩡 했다.

아니,멀쩡한 것을 넘어 단순한 몇 마디에서 정치적인 수완마저 엿보였다.

이제 막 아이루고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 기를 눌러 놔야 한다.

마침 왕은 방관하고 있다.

타르칸 역시 아리스티네를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제 그가 아리스티네를 안아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의외였지만 오히려 잘됐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날카롭게 혀를 놀렸다.

“하기야 감히 우리 아이루고를 우습게 보고 덤볐다가 오히려 역공당해 영토까지 빼앗겼으니……. 황녀를 내주는 게 대수였겠습니까.”

“아무래도 유폐당했다는 홈결이 있는 황녀보다는 제국의 보석이라는 둘째 황녀가 왔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황녀께서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아실 테니 알아서 그에 맞게 행동하시겠지요. 그 정도 현명함은 갖추셨을 겁니다.”

아무런 제지도 없는 상황에서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과열된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일부러 이때를 기다렸다.

아리스티네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또렷한 목소리에 이목이 한순간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예상 밖의 모습에 사람들은 입 을 다물었다.

필시 붉으락푸르락해서 화를 내거나 모멸감에 말도 제대로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미미한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본 황녀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실바누스와 아이루고,양국의 오랜 적대 관계를 끊어 내고 평화를 위함인데.”

여유 있는 어조,완벽한 발성과 발음,곧은 허리와 반듯한 어깨.

황족의 풍모에 걸맞게 위엄있는 태도는 ‘흠결있는’ 황녀라고 할 수없었다.

“마차를 타고 온 것부터 시작 해 아이루고의 의복으로 성장(盛 裝)한 것까지 책잡으며 이 화평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발언만 하시니.”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을 훌었다.

“마치 여러분께서 전쟁을 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당황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없었다.

반박하려 했으나 사실 아리스티네의 말에 논리적으로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아리스티네를 깎아내리기 위해 입을 놀린 것뿐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막 체결되는 평화에 어떻게든 흠집을 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는 아이루고의 제왕,네프테르 폐하의 뜻을 전면으로 거스르겠다는 것입니까.”

그 말에 완벽한 침묵이 찾아왔다.

뒤늦게나마 뭐라 반박하려고 했던 사람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신중해야 했다.

아까처럼 우습게 보고 생각 없이 아리스티네를 공격했다간 정말로 왕의 뜻에 거역하는 자로 몰릴 수 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전혀 없으셨겠지만요.”

아리스티네가 눈매를 접으며 생긋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요.”

“그런 뜻이었을 리가요. 우리 모두 평화를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건데.”

“황녀께서 알아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동의하는 귀족들을 보고 아리스티네가 입꼬리를 올렸다.

원래 도망칠 구멍 없이 몰아세 우는 것보다 숨구멍 하나쯤 뚫어 주는 게 효과적이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거든.’

그녀가 뚫어 준 숨구멍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이 모든 귀족들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생을 봤을 때 그랬어.’

장수를 잡으려면 장수가 탄 말을 쏘라.

‘하미르가 탄 말은一.’

“스키엘라 공작.”

아리스티네의 부름을 받은 스키엘라 공작이 긴장했다.

이 황녀가 예상과 달리 물렁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잘 알겠다.

“말씀하신 대로 내가 아이루고의 의복을 입은 것은 아이루고에 대한 내 호의를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一.”

“하나 공작의 눈에는 하나만 보이시나 보군요.”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티네의 보랏빛 눈동자는 애석함과 실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대들이 내게 기대를 한 것처럼 본 황녀 역시 그대들에게 기대가 컸는데……”

아예 작게 혀를 차기까지 한다.

그 누가 왕후의 아비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하미르의 외조부인 스키엘라 공작에게 이렇게 굴 수 있을까.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자신의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완전히 공작을 깔아 보고 있었다. 방금 그들이 그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다수가 한 사람을 압도하는 것과 한 사람이 다수를 압도하는 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본 황녀가 마차를 타고 온 게 전쟁으로 고통받은 양국의 땅을 직접 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랬지요. 그래서 지금 내게 그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겁니까? 내 기억력은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황녀.”

“이런,실례. 기억하고 계실 줄은 전혀 몰랐어요.”

아리스티네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기억하신다면 아이루고 의복을 입은 데에도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一.”

말을 느릿하게 끈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一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실거라고 여겼거든요.”

한순간에 시선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 의미는 잔혹했다.

명백한 비웃음에 스키엘라 공작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보아하니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하는 분이신가 보군요.”

저 건방진 황녀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며 가지고 놀고 있다.

‘대체 저 옷이 뭐라고! 흘껏 보기만 해도 완전히 우리 아이루고 옷이거늘!’

스키엘라 공작의 시선이 아리스티네의 드레스로 향했을 때였다.

“……실바스티안 카리엘 비단.”

아리스티네의 말을 듣고 그녀가 입은 옷을 유심히 보던 파엘라미엔이 작게 중얼거렸다.

“맞아요, 파엘라미엔 공주님.”

아리스티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옷자락을 쥐었다.

“실바누스의 실바스티안 카리엘 비단으로 만든 옷입니다.”

자,이제 이 정도면 제 뜻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상냥하고 친절하게,무지한 어린아이에게 가르침을 베풀듯이.

실바누스는 원래도 아름답고 질 좋은 비단으로 유명했다.

그중에서도 실바스티안 카리엘 비단은 생산하는 전량이 황궁에 진상되는 특상품이다.

그 비단으로 지은 아이루고의 의복.

‘양국의 화합에 이보다 더 적절하고 상징적인 건 없지.’

“원래는 네프테르 폐하께 진상될 비단이었지만,결혼 선물로 제가 받아도 되겠지요?”

아리스티네가 네프테르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왕이 잠시 침묵 했다.

이윽고 그 침묵을 몰아내듯 커다란 웃음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래,내 황녀에게 그 비단을 선물하지. 선물한 보람이 있게 아주 잘 어울리는군.”

왕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진정으로 평화를 생각하고 양 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이 자리에 오직 황녀뿐인 것 같군. 모두 황녀를 본받도록.”

그 말은 이 자리에 자리한 모든 사람의 뇌리에 박혔다.

왕이 이렇게 흡족해하는 것은 타르칸이 열 살 때 대마수 무르지카의 숨통을 끊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 기대도 안 했던 어린 왕자가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아리스티네에게 기대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향한 모 욕을 능숙하게 받아넘긴 것을 넘어 보기좋게 한 방 먹이기까 지 했다.

그런 그녀가 타르칸의 짝이 된다니.

‘범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 아닌가.’

‘아리스티네 황녀라.’

‘어릴 적 유폐당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광인이라 들었건만……’

‘흠,이거 꽤 재밌게 돌아가는군.’

주변의 수군거림에 끼지 않고 조용히 정황을 살피고 있던 귀족들이 눈을 빛냈다.

‘좋아. 생각대로 움직여 줘서 참 고맙다고나 할까.’

아리스티네는 스키엘라 공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타르칸의 정략혼 상대이기도 하지만,아리스티네는 실바누스 사절단의 대표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사절단의 공식 알현 때 아이루고의 옷을 입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실바누스의 시녀들도 지적한것을 이 하이에나들이 노리지 않을리가 없다.

‘그래서 타르칸에게 부탁했지.’

다행히도 아이루고 의복은 천 자체의 아름다움과 흐름을 강조 하는 스타일이었다.

만약 실바누스의 드레스처럼 재단과 재봉이 많이 필요했다면 절대 시간 안에 옷을 만들지 못 했을 거다.

거기다 장식 역시 실바누스같이 보석과 리본,자수 등을 직접 드레스에 꿰매는 형식이 아니었다.

아이루고에선 드레스 자체를 꾸미기보다는 백금이나 금을 메인으로 해 각양각색의 보석을 물린 화려하고 섬세한 보디 체인이나 암 링을 착용했다.

‘덕분에 이렇게 제시간에 짜잔, 하고 완성되었고.’

슬슬 장내가 조용해지자 아이루고 왕이 입을 열었다.

“인사도 나눴으니 이만 자리에 앉으라 말해야 할 텐데.”

그의 시선이 왕후를 향했다.

“아랫것들이 자리 계산을 잘못 했나 봅니다. 설마하니 의자가 부족할 줄이야.”

왕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처 확인하지 않은 내 불찰입니다. 황녀를 볼 면목이 없군요. 혹여 내게 심기가 상하더라도 이해합니다.”

자신을 낮춰 비난해도 된다고 말하는데 정말로 비난할 순 없는 법이다.

“왕후께서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 신경 쓰시겠습니까. 저는 개의치 않아요.”

아니나 다를까,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 한 마디 지지 않던 아리스티네가 한발 물러섰다.

왕후가 홋, 하고 미소 짓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왕후 폐하의 사과는 기쁘게 받겠으니 염려하지 마시길.”

아리스티네가 호의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후의 얼굴에 웃던 그대로 금이 갔다.

아리스티네의 말은 왕후가 사과를 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왕후는 그녀에게 사과한 적도, 사과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사과한 적 없다곤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겸양의 미덕을 갖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만, 왕후는 분명 자신의 불찰임을 인정했고,면목이 없다고 말했으니까.

사과한 건 아니었다고 말하면 제 얼굴에 먹칠만 하게 된다.

왕후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자애로운 모습을 가장했다.

“하하,황녀의 마음씨가 이리도 고울 수가. 이런 신부를 맞이하다니,타르칸은 참 복이 넘치는 구나.”

“예,왕후 폐하의 말씀대로 제 복이 넘치는 둣합니다.”

피식,입매를 뒤틀며 하는 말에 왕후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나저나 두 사람의 자리가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왕후의 시선이 알현장을 훑었다.

그리고 마치 지금 발견했다는 듯 빈자리를 가리켰다.

“아,마침 저기 빈자리가 있군요.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 저쪽에 앉는 게 어떻겠습 니까.”

왕후가 아리스티네에게 권한 곳은 말석 중에 말석이었다.

사실상 자리랄 것도 없이 시중드는 궁인들이 대기하기 편하게 비워 놓은 곳이었다.

당연히 의자는 없고 차가운 바닥밖에 없었다.

‘자,어떻게 할래?’

왕후의 눈이 먹이를 눈앞에 둔 뱀처럼 아리스티네를 향했다.

그러나 정작 화를 내야 할 아리스티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것도 오롯한 기쁨으로.

난처한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웃어도,무표정하게 있어도,심지어 비웃음을 지을 때마저도 감정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던 황녀에게서 이토록 강렬한 감정이라니.

‘……뭐지?’

아리스티네가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것을 보니 왕후는 덜컥 불안해졌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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