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아리스티네에게 망신살을 제대로 주고 이곳의 실세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 주겠다고 벌인 짓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녀라고 해 봤자 아이루고의 정치 사교계에서는 밑바닥이나 마찬가지다.
그걸 황녀 본인에게는 물론, 이 자리의 다른 귀족들에게도 확실하게 보여 주려 했는데.
‘설마 오히려 황녀가 역공할 빌미만 준 건가.’
지금까지 아리스티네가 보여준 정치사교술이 워낙 대단했던 지라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건 왕후만이 아니었다.
타르칸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 지였다.
물론 왕후와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부가 얼마나 황당한 여자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설마 여기에서 변태니 뭐니 운운하는 건 아니겠지.’
아리스티네가 눈을 반짝 빛내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보통이라면 생뚱맞은 생각이겠지만 상대가 누구던가.
‘이 여자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마수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마저 동요한 적 없는 타르칸을 순식간에 불안에 빠트리다니 참으로 대단한 재주였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가 사고를 치기 전에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가날픈 어깨가 그의 손바닥 안 에 미끄러지듯 잡혔다.
아리스티네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홀려 넘기며 타르칸은 왕후를 향해 말했다.
“아직 연회는 시작 전인데 왕후께서 벌써 취기가 오르셨나 봅니다.”
“취기?”
“그렇지 않으면 황녀에게 말석에 앉으라는 소리 따위 하실 리가 없잖습니까.”
한마디로 제정신으로는 할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왕후의 얼굴이 설핏 굳는 것을 보며 타르칸은 아리스티네를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당겼다.
“아이루고에 온 황녀는 그 자체로 평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지요. 한데 황녀를 말석에 앉히시겠다니……”
금빛 눈동자는 이 순간에조차 나른하고 여유로웠다.
“왕후 폐하께서 평화를 가장 낮은 위치에 두겠다고 선언하시는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왕후의 입매가 떨렸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왕족과 귀족들,심지어 왕조차도 지금 일어난 일에 놀랐다.
‘타르칸이 나서서 다른 사람을 보호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정치적인 언변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타르칸이 제 사람을 챙기긴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낀 사람들이 알아서 몸을 사리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처음 아리스티네를 안아 들었던 때처럼.
‘호오,그 타르칸 전하가 이렇게 나오시다니. 이거 일이 재밌 게 돌아가는군.’
그간 중립을 지켜 왔던 이사라 후작이 눈을 빛냈다.
타르칸은 전사라는 말에 걸맞게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해 왔다.
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인간을 대하는 선택지는 딱 두 가지였다.
무시하거나 베거나.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정치적인 언사나 사교적인 언행을 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귀족들이 더더욱 하미르에게 편승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일로 타르칸이 그간 못 해서 안 한 게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저 할 마음이 없어서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건 타르칸을 무시하던 사람 들에게 꽤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왕좌에 관심이 없으시더니 이제 마음을 돌리신 걸까? 그게 아니면一.’
이사라 후작의 시선이 타르칸 의 품에 있는 아리스티네를 향했다.
‘설마 황녀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시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타르칸이다.
그럴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후작은 어째서인지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꽉 붙들고 있는 커다란 손에서 시선을 델 수 없었다.
‘전하의 정확한 의중은 몰라도 처음 이렇게 나서는 게 황녀 때문이라는 건 뜻밖이군.’
타르칸의 행동 자체가 의표를 찔렀던 만큼,그 행동의 원인이 아리스티네라는 것은 더더욱 놀 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 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들 틈에 앉아있던 디오나의 안색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까맣게 죽어 있었다.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둔 그 녀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핏줄이 불거졌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든 타르 칸은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면,취기 이외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노망났냐?
타르칸의 말 속에 담긴 뜻이 적나라했다.
왕후가 입매를 뒤틀었다.
“물론 내 뜻은 그게 아니었네. 황녀를 언제까지 벌서듯 세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빈 곳을 찾았을 뿐이야.”
“자리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타르칸의 시선이 직계 왕족들이 앉아 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의전 서열상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은 그쪽에 앉아야 했다.
“다들 평화를 위해 자리 정도는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싸늘한 안광이 도는 금빛 눈동자가 공주와 왕자들을 훑었다.
사실상 일어나서 자리를 만들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무형의 기운이 압박하며 쇄도해 오는 감각에 왕족들은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이게 싫었다.
저 천출한테 압도된다는 게.
하지만 자존심으로 버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가장 시선을 많이 받은 마르텐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아름다운 황녀님을 위해 당연히 제 자리를 양보해 드려야지요.”
왕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르텐을 향했다.
마르텐은 모르는 척하며 아리스티네를 향해 웃었다.
“고마워요,마르텐 왕자님.”
“별말씀을 "
아리스티네의 감사에 마르텐은 상황도 잊고 헤벌쭉거렸다.
‘저놈이 여색에 정신 못 차리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왕후가 쯧,혀를 찼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타르칸과 동갑이면서 어쩜 이리 다를 수 있는지.
“가자,타르칸. 부부는 함께여야 하잖아.”
그 말에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감싼 손이 움찔했다.
‘내가 이상한 말 했나?’
아리스티네가 의아하게 올려다 보았지만 타르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에스코트해 상석으로 올라갔다.
‘기분 탓인가.’
그렇게 생각한 아리스티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 사업 파트너가 자신을 위해 힘써 줬는데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타르칸 자리는 내가 챙겨 줘야지!’
누구 남편인데 저런 땅바닥에 앉게 할 순 없다!
아리스티네와 눈이 마주친 스탈리나가 흠칫했다.
어제 일로 한 소리 들었던 그녀는 자신이 비켜 줘야 하나 안절부절못했다.
황녀는 두렵지 않으나 파엘라미엔은 무서웠다.
여기서 가장 입지가 약한 사람 역시 스탈리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시선은 그녀를 비껴 다른 사람에게 향했다.
‘누구의 자리에 앉느냐는 나름대로 정치적 의미가 있는데 쭉정이를 건들 이유는 없지.’
1왕자 하미르가 없는 이곳에서 가장 실세인 직계 왕족.
“곧 혼인할 사이인데 역시 바로 옆에 앉는 게 좋겠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단 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의 혼약이 평화의 상징이니까 말이야.”
예니카리나 공주.
말은 타르칸에게 하면서도 아리스티네의 시선은 예니카리나를 향해 있었다.
3왕자 마르텐의 양 옆자리는 원래 2왕자 타르칸, 2공주 예니카리나의 자리다.
타르칸의 자리가 없으므로 지금은 1공주 파엘라미엔과 2공주 예니카리나가 앉아 있다.
아리스티네는 예니카리나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예니카는 우리가 결혼해서 굉장히 기쁘다고 말했지?”
자,이제 행동으로 보여 줄 때야.
그리고 이거 너네 엄마가 벌인 짓 아니니?
보랏빛 눈동자가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빛났다.
아직 혼인하기도 전이건만 퍽 타르칸과 닮은 눈빛이었다.
“예,예니카는……”
예니카리나의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귀족들,그리고 부왕까지 모두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니카리나는 애교 많고 순진 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원했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고,그런 시선을 즐겼다.
그런 만큼 여기서 뻗대기 힘들었다.
순진하고 착한 아이는 당장 일어나서 ‘아,그럼 예니카가 양보 해 줄게요!’ 하고 환하게 웃어야 하니까.
하지만 자리를 뺏기고 말석으로 물러나는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해 입방아를 찧어 댈 사람도 있었다.
자신은 하미르의 동복누이,이 자리를 타르칸에게 내어 주고 귀족들도 안 앉는 저 구석으로 간다면 一.
‘아니,그게 아니더라도 이 버러지 황녀에게 내 자리를 내주 긴 싫어!’
죽어도 싫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 했다.
예니카리나가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예니카는 다리가 아프니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좋을 거다.”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왕 폐하!’
예니카리나는 감격한 눈으로 부왕을 바라봤다.
그녀는 얼른 그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요. 예니카의 마음 같아서 는 당장이라도 평화를 위해 양보해 주고 싶은데에……”
귀엽게 말꼬리를 길게 끌던 예 니카리나가 고개를 획획 저었다.
“아니, 굳이 평화가 아니라 새 언니를 위해서라도 양보해 주고 싶어요. 예니카는 정말로 리네 언니가 좋거든요.”
좋아한다면서 환하게 웃던 그 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오므렸다.
“그치만 다리가 불편해서……. 보다시피 예니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구가 조그맣거든요.”
나 연약해요.
커다란 눈이 그런 뜻을 담고 아리스티네를 올려다봤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체 구가 대비되어 꽤 효과적이었을 거다.
하지만 인종이 다른 아리스티네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몸이라 설득력이 떨어졌다.
아리스티네는 가만히 예니카리나가 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런. 예니카의 몸이 불편할 줄은 몰랐어. 괜찮은 거야?”
“불편해도 리네 언니를 환영하는 자리인데 예니카가 나와야지요!”
“고마워라.”
아리스티네는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서 아이루고 왕이 끼어들 줄이야.’
왕은 그간 가만히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던지라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으니 더더욱.
‘흠……. 왕이 가장 총애하는 딸이니까. 한순간에 예니카리나 보다 더 총애받을 거라곤 생각 하진 않았어.’
고작 어제,오늘 딱 두 번 본 사이다.
겨우 그걸로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게 된다면 아이루고 제왕은 어리석은 군주라는 뜻이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왕태자 자리를 비워 두지 않았겠지.’
타르칸을 벌써 왕태자로 책봉 했을 것이다.
네프테르는 타르칸을 후계로 생각하지만 나라의 분열이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왕태자로 만들 마음은 없다.
강행하기보다는 돌아가려 했고,그래서 아리스티네를 타르칸과 맺어 준 것이다.
‘일단 왕이 내게 호의적인 건 맞아.’
그러나 인정한 만큼 시험하려 는 생각도 있다.
‘오? 꽤 괜찮은데? 그럼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 一같은 느낌일까.’
아리스티네가 잠시 아무 말이 없자 예니카리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어제 네가 부왕에게 좀 잘 보였지만 어차피 부왕은 예니카를 가장 총애해!’
그녀는 보란둣이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을 쳐다봤다.
‘부왕의 약점을 알면서 그걸 감싸 줄 수 있는 사람은 예니카 밖에 없거든!’
왕후 역시 자신의 딸을 자랑스럽게 쳐다봤다.
두 모녀가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였다.
“대신,리네의 말대로 부부는 함께여야겠지.”
왕의 입에서 홀러나온 애칭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리네라고……?’
‘황녀를 마치 친딸처럼 부르시다니.’
‘뭐지? 예니카의 손을 들어 주신 게 아니었나?’
사람들이 당황한 사이에도 왕의 말은 막힘없이 홀러나왔다.
“타르칸의 말대로 자리는 만들면 되는 법이고.”
그렇게 말한 왕이 궁인들에게 눈짓했다.
“의자를 가져와라.”
궁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왕의 명에 따랐다.
서둘러 타르칸과 아리스티네가 앉을 의자를 가져왔지만 직계 왕족이 앉는 상석에는 놓을 곳이 애매했다.
의자를 추가하기 힘들도록 왕후가 일부러 간격을 조정해 놨던 것이다.
가져온 의자를 상석에 놓으려면 지금 왕족들이 앉아 있는 모든 의자를 다 움직여 다시 배치해야 했다.
“번거로울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말한 네프테르가 자신의 바로 아래를 눈짓했다.
그 시선이 닿은 곳을 본 사람 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왕과 왕후 바로 아랫단.
그 자리는 비워 두어야 하는 자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이 나라의 왕태자와 왕태자비를 위한 자리니까.
“폐,폐하!”
왕후가 비명처럼 왕을 불렀다.
왕의 청안이 느릿하게 왕후를 향했다.
“왜 그러시오,왕후.”
경고가 섞인 음성이었지만 왕후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저 자리에 타르칸을 앉히다니, 그럴 순 없다. 그런 일은 막아야만 했다.
스키엘라 공작 역시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저곳은 왕태자 부부를 위한 자리입니다,폐하! 계승 서열 순위에서도 이인자로 밀리는 타르칸 전하가 그 자리에 앉다니요!”
“공작의 말이 맞습니다. 왕실에는 법도가 있고 질서가 있어야 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왕후가 공작의 말에 힘을 실어 주며 왕에게 호소했다.
두 사람을 바라본 왕이 호탕하게 웃음을 흘렸다.
“다들 생각이 과하구려. 뭐 그 렇게까지 생각할 것 있소. 그저 빈자리에 의자를 놓는 것뿐이오.”
정말로 자리에 의미가 없다면 아리스티네를 말석에 앉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여야 했다.
‘타르칸이 감히 내게 평화를 최하위에 두겠다는 뜻이냐 대들 었을 땐 가만히 있으셨으면서!’
왕후의 눈이 분노로 번쩍거렸다.
왕은 그 모습을 보고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다.
“어쩔 수 없지 않소. 자리를 마련하는 데 실수가 있었으니.”
왕후가 움찔 몸을 굳혔다.
처음부터 이건 그녀의 계략이었다.
그저 궁인들의 실수인 척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왕이 그걸 지적하니 이번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왕후는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분노에 찬 시선은 왕태자의 자리에 앉는 타르칸과 아리스티네에게 향했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였다는 둣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앉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예비부부는 각각의 미모를 뽐내고 있어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