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사절단이 왕에게 인사하며 선물-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의 전쟁 배상금-을 진상했다.
아리스티네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진귀하고 사치스러운 것들이었지만,그녀의 시선은 단 한 남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러는 사이 진상이 끝났다.
“실바누스의 호의를 잘 보았소. 짐 역시 아리스티네 황녀와 사절단을 환영하오. 오랜 전쟁의 끝이 양국 간의 결합이라는 기쁨으로 맺어지니 송축할 일이오.”
왕이 술잔을 위로 올렸다.
“아이루고와 실바누스의 평화 를 위해.”
모두 잔을 위로 올려 예를 표한 후 그대로 마셨다.
본격적인 환영 연회의 시작이었다.
무희들이 춤추고 입맛을 돌게하는 음식이 나왔지만 아리스티네의 마음은 계속해서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타르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리스티네의 시선을 따라가니 한 남자가 보인다.
‘저 남자.’
앉아 있는 위치를 보니 아까 왕후가 앉으라고 했던 말석 근처 였다.
‘설마 아까 눈을 반짝였던 게 저 남자를 봐서 그랬던 건가?’
타르칸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안이 아리스티네에게 향하며 따끔한 시선이 그녀의 뺨을 건 드렸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예비 남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온 신경은 오로지 남자를 향해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아리스티네가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앗,저 스테이크 맛있겠네. 일 단 식기 전에 나도 먹을까.’
남자의 먹는 모습에 식욕이 돈 아리스티네가 서둘러 스테이크를 집었다.
‘엄청 맛있어……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는 말이 이거였구나,싶었다.
소스도 여러 개라서 여기저기 찍어 먹어 보는 맛이 있었다.
스테이크만 먹다 보니 옆에 가니시로 나온 구운 야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익숙한 감자부터 먹어 봤다.
아리스티네의 눈이 커졌다.
‘감자에 버터를 더하면 이런 맛이구나!’
감자는 꽤 많이 먹어 봤는데 이렇게 맛있는 건지 몰랐다.
품종이 다른 건지, 질이 다른 건지 파근파근한 감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은은히 달았다.
여기에 적당히 녹은 고소하고 짭짤한 버터가 얹어지니…….
‘행복해!’
아리스티네는 정신없이 아구아구 먹다가 핫,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남자를 향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남자의 이모저모를 홀었다.
‘역시 그 남자가 맞아.’
아리스티네는 제왕안으로 봤던 장면을 상기했다.
실바누스에서 아이루고로 오는 길에 봤던 장면이었다.
[부디 저를 받아 주세요,비전하.]
수면 거울 속에서 남자는 아리스티네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말에 아리스티네 자신은.
[좋아,넌 이제 나의 것이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봤을 때 정말 깜짝 놀랐는데.’
결혼하러 가는 길에 미래의 자신이 다른 남자와 이러는 걸 보게 되다니.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길래 불륜 로맨스를 찍게 된단 말인가.
아리스티네는 사랑 따위에 관심 없는지라 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진 자신의 말은一.
[넌 이 나라,아니,대륙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거야.]
‘전혀 다른 소리였지.’
솔직히 안도했다.
하지만 수면 거울 속 남자는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것처럼 동요했다.
눈동자가 흑 커지며 시선이 떨렸다. 기쁨과 기대,설렘이 가득 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실망으로 고개를 떨궜다.
[정말 가능할까요? 아시다시피 저는…… 손이 이 모양인데.]
남자에게는 오른쪽 엄지가 없었다. 저래서는 망치질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커다란 남자가 추욱 처진 모습은 꼭 꼬리를 내린 대형견 같았다.
수면 거울 속 아리스티네는 까치발을 하여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가능해.]
그가 고개를 들고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너와 함께.]
그걸로 영상은 끝났다.
애석하게도 아리스티네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었다.
남자와 자신은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지.
질책만 받았다는 남자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지.
어째서 자신은 망치도 못 쥐는 그가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거라고 확신하게 됐는지.
자신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 하나 몰랐지만.
‘내가 추진할 메스 사업에 반드시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지.’
그래서 언제 만나게 될까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업의 핵심 인력은 빨리 구할수록 좋으니까!’
그런데 환영 연회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내 돈…… 아니,직원!’
남자를 바라보는 아리스티네의 눈빛은 흡사 버려진 땅을 팠는데 금이 나온 것을 본 사람 같았다.
타르칸은 맛있게 밥 먹던 것도 잊은 채 남자를 향해 눈을 초롱 초롱 빛내는 아리스티네를 못마땅하게 봤다.
그런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묻는 것 아닌가.
“저기,타르칸. 저 남자 누구야?”
“남자?”
그냥 되물음이라기엔 목소리에 꽤 날이 서 있었다.
“왜 그렇게 삐딱해? 그냥 물어 본 건데.”
“저 남자는 왜?”
“그건 사업 비밀인데.”
대박 날 사업 아이템인데 남에게 함부로 알려 줄 순 없었다.
개인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을때 타르칸의 반응은 영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말해 주는 게 좋을 듯했다.
그편이 아이디어도 뺏기지 않을 테고.
아리스티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알려 주지 않을 기세라 타르칸은 불쾌감과 거슬림을 느꼈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그가 미처 생각하기 전에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돌렸다.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나중에 따로 조사해 봐야지.’
앉은 장소, 얼굴과 복장 모두 다 머릿속에 입력했다.
행적을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터.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말을 걸고 싶지만.’
식사가 끝나면 무희도 들어가고 홀에서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할 터다.
그때를 틈타 말을 걸 수도 있겠지만,오늘의 연회는 아리스티네를 위한 환영회인 만큼 그녀 에게 이목이 쏠려 있었다.
‘내가 누구에게 말 걸고 얼마 나 시간을 보냈는지도 분석하려 는 사람이 있을걸.’
안 되지,안 돼. 사업 아이디어를 꼭꼭 숨겨야 했다.
또,오늘은 이미 소란을 피웠 으니 나머지 시간은 조용하게 지내는 편이 좋을 듯했다.
처음부터 너무 시끄럽다는 이미지가 박히면 득 될 게 없다.
‘먹는 데 집중하자!’
사실 입에 넣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엄청나게 집중이 되어서 따로 다짐할 것도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행복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디저트로 나온 것은 무려一.
‘프링프랑 젤리!’
아리스티네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먹어 볼 수 있게 됐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탱글탱글한 연노랑빛 젤리를 콕 집어 입에넣었다.
‘와아一!’
과연 입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맛이었다.
강렬한 신맛과 단맛이 어우러 져 혀 아래에 침이 고였다.
워낙 맛이 강한지라 보통 하나 만 먹고 끝내는 거지만 조금 아 쉬웠다.
괜히 빈 그릇을 바라보는데一.
자신의 앞에 놓인 자그마한 디저트 그릇에 아리스티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릇 위에는 프링프랑 젤리가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들어 타르칸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 전에 타르칸이 먼저 말했다. 흡사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 이거 안 좋아해.”
“정말?”
타르칸은 어째서인지 아리스티네를 보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아리스티네가 재차 물었다.
“그럼 나 먹어도 돼?”
벌써부터 침이 꼴깍 넘어간다.
“먹든지.”
눈도 안 마주치고 툭 던지는 무심한 말이었지만,아리스티네는 기쁨으로 눈을 빛냈다.
“있잖아,타르칸”
“또 왜.”
“네가 좀 수줍음이 많은 변태 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꽤 괜찮은 파트너 같아.”
“뭐?”
기가 찬 타르칸이 결국 아리스티네를 보고 물었다.
그의 미간에 잡힌 세로줄을 보고 의아해진 아리스티네가 다시 말했다.
“괜찮은 파트너 같다구.”
“그 전에…… 아니,됐다.”
타르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에 든다는 칭찬인데 왜 그러냐는 얼굴을 보니 더 물어서 무엇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이상하다니까.’
타르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디저트를 끝으로 식사가 끝났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이동하며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눴다.
보기 드문 실바누스의 사절이 온 만큼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아이루고 귀족들이 많았다.
몰론 가장 관심을 받는 사람은 아리스티네였다.
하미르를 추대하는 세력은 목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아리스티네에게 관심 없는 척했지만, 다른 귀족들은 달랐다.
후계 싸움에서 중립의 거두라 할 수 있는 이사라 후작을 비롯 해 많은 사람들이 아리스티네에 게 접근했다.
단순하게 실바누스의 황녀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껴 접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왕후 폐하.”
스키엘라 공작의 말에 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압니다.”
그녀의 시선이 왕태자비의 자리에 앉아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리스티네에게 꽂혔다.
그 옆의 왕태자 자리에 앉아 있는 타르칸에게도.
그는 본디 그 자리의 주인인 양 방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앉은 채 귀족들과 종알종알 떠드는 아리스티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감히……”
까득,이가 갈렸다.
“심기를 가라앉히십시오,왕후 폐하.”
아버지의 말에 왕후가 표정을 풀었다.
“생각과 달리 저 황녀가 여간 내기가 아니에요. 반편이가 왔다고 좋아했건만.”
여러 귀족들의 반대가 많아 왕이 대놓고 티를 내진 않고 있지만,그의 의중에 타르칸이 후계로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태까지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왕후의 세력은 견고했고, 대귀족들은 천출인 왕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지배 가문의 피를 지닌 황녀가 타르칸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준다면.’
황금의 피.
혈통에 집착하는 보수적인 귀족들도 태도를 바꿀 것이다.
심지어 그 황녀 자체도 대단한 정치적 수완가였다.
‘햇빛도 제대로 못 보고 무시 당한 채 갇혀 살았다면서 어떻게 그런 품위와 기품을 갖추게 된 건지…….’
보고 배울 것도,따라 할 것도 없는 환경이었을 텐데.
‘그렇게 혀가 매끄러울 수 없었지.’
보수적인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
아까웠다.
‘만약 폐하께서 황녀와 하미르를 이어 주었다면.’
말 그대로 자신의 앞을 막을 자는 없었을 텐데.
타르칸 따위 신경 쓸 필요도 없어졌을 거다.
하지만 황녀는 타르칸의 짝이 되었고,태도를 보니 이미 그와 협력하고 있었다.
‘아까운 만큼 반드시 없애야 할 상대야.’
아리스티네에게서 고개를 돌린 왕후가 스키엘라 공작에게 속삭였다.
“하미르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해야겠어요.”
지금은 자리를 비운 첫째 아들에게 서신을 써야겠다.
“좋은 생각입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지금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귀족들도 뭐가 옳은지 판단이 서겠지요.”
왕후와 스키엘라 공작이 아리스티네를 놓고 속닥이는 동안 시선을 느낀 아리스티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아리스티네의 눈에 들어온 건 실바누스 사절단이었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쥐 죽은 듯 지냈던 황녀의 변화에 영 적응을 못 한 얼굴이었다.
‘사절단이 돌아가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겠네. 아니, 오늘 밤에 소식을 보내려나?’
그래 봤자였다.
아리스티네는 이제 아이루고에서 지낼 것이고 타르칸이 그녀를 비호하기로 했다.
‘얼굴 봐 봤자 유쾌하진 않으니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아리스티네를 모시는 기사와 시녀들은 곁에 남지만,사절단은 볼일을 마치고 귀국할 것이다.
오늘로 볼일 하나를 끝냈으니 이제 나머지 볼일은 딱 하나다.
‘내 결혼식.’
Chapter 7. 푹신푹신한
타르칸의 궁은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주인의 성정에 맞게 엄숙하고 딱딱했던 분위기가 축제처럼 풀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주인의 결혼식이 코앞이었다.
거기다가 그 신부님이신 황녀님은 참 모시는 맛이 있는 사람이었다.
황녀다운 품위가 넘치지만 어떨 때 보면 소탈하고,여유로운 어른 같다가도 처음 세상을 접한 아이 같았다.
무엇보다一.
‘예뻐!’
자고로 눈에 좋은 것이 몸에도 좋다고 했다.
궁인들은 존경스럽지만 무서운 주인보다 황녀의 곁에 더 자주 모였다.
“황녀 전하,이제 곧 결혼식이잖아요.”
“한 번뿐인 결혼인데 황녀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어요? 혹시라도 원하시는 거 있나요?”
“가장 완벽하고 멋진 결혼식이 되도록 저희가 노력할 테니까요!”
뭐든 좋으니까 로망을 말해 주세요.
어느새 친해진 궁인들이 그런 눈으로 쳐다봤다.
“원하는 거라. 음,나는 딱 히……”
원래 그런 건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나 가지고 있는 법이다.
아리스티네가 원하는 건 결혼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이었다.
갇혀 있지 않고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삶.
‘그러니까 결혼은 아무래도 좋은一 아.’
불쑥 떠오른 생각에 아리스티네는 입을 열었다.
“하나 있어.”
“하나? 그렇게 적어요? 사소한 것까지 다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그게 무엇인가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저희가 무조건 준비할 테니!”
궁인들이 아리스티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그런데 정작 나온 말이란 게,
“푹신한 거.”
“네,푹신……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결혼하는 신부 입에서 푹신한 게 좋다고 하면 딱 하나 연상되는 게 있긴 한데.
‘설마 아니겠지.’
‘잘못 들은 걸 거야.’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푹신푹신한 거.”
“예?”
“푹신한 거 몰라? 난 푹신푹신한 게 좋아. 누울 때 기분 좋은 거.”
“푸흡……!”
아예 확인 사살까지 해 주는 말에 베테랑 궁인들조차 평정을 지키지 못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