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머머머,세상에……!”
“흠흠,그렇군요.”
“황녀님 보기보다……. 어후.”
궁인들이 아리스티네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엄지를 척, 치켜드는 궁인도 있었다.
“네,푹신한 것으로요. 잘 알겠습니다.”
“걱정 말고 저희만 믿으세요. 그 어떤 충격도, 그 어떤 움직임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걸로 준비할 테니까!”
“그렇죠. 흔들리지 않는 편안 함!”
후후후,호호호.
기묘한 웃음소리에 아리스티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저러지?’
푹신하고 편한 걸 좋아하는 게 이렇게 반응할 일인가?
어쨌거나 적극적으로 나오는 궁인들이 고마웠다.
그간 아리스티네에게는 시중은커녕 자신에게 원하는 걸 물어 보는 사람도,들어주겠다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다들 고마워.”
“별말씀을요.”
“호호호, 푹신푹신한 것도 그렇지만 넓은 것도 좋지 않아요?”
“어머,얘!”
궁인들이 꺄르록꺄르록 웃었다.
“아니,나는 넓은 건 딱히……. 너무 좁지만 않으면 돼. 넓어 봤자 공간만 남고.”
여상한 아리스티네의 말에 궁인들의 눈이 반짝였다.
공간이 남는다니…….
‘얼마나 꼭 붙어 자려고!’
“그래요,그래요. 넓을 필요가 뭐가 있나요! 쓸데없이!”
“맞아요. 몸 하나 누일 공간 정도면 충분하지!”
“넓은 걸 권하다니. 제가 부족 했어요. 역시 황녀님은 총명하세요”
‘아니,이게 총명하다는 말까지 들을 일인가.’
아리스티네는 의아함을 넘어 떨떠름해졌지만 궁인들이 기뻐 하는 것을 보니 이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면 내 기분도 좋아지는구나.’
처음 알았다.
“그럼 저희는 완벽한 물건을 찾기 위해 이만 물러가 볼게요.”
“황녀님께서 깜짝 놀라실 것으 로 준비해 올 테니 기대해 주세요”
“타르칸 전하도 놀랄 것으로!”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궁인들은 또 꺄르록거렸다.
‘참 노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구나.’
저렇게 열정적인 직원이라면 사업할 때 스카우트하고 싶었다.
‘나중에 사업 성공해서 내가 월급 더 많이 준다고 하면 이직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궁인들이 나가는 걸 지켜봤다.
궁인들은 문을 향해 가면서도 묘한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홀껏 대며 응흥흥,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시선이 엉큼하고 야릇 했다.
아리스티네를 힐끔대느라 정작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궁인들은 뒤늦게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타,타르칸 전하.”
궁인들이 서둘러 예를 취했다.
그리고 타르칸이 뭐라 말 걸기 전에 도망치듯 빠르게 밖으로 물러났다.
삐딱하게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타르칸이 방 안으로 들 어 왔다.
“어서 와.”
아리스티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타르칸이 왔으니 당연히 차가 나올 것이고,차가 나오면 당연히 디저트도 나올 것이다.
‘오늘은 무슨 차랑 무슨 디저트일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의 맞은편 에 앉았다.
왠지 설레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그녀와 자신은 사랑 따위는 하나도 없는,사무적인 부부가 되기로 하지 않았나.
“궁인들과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들었구나.”
예상과 달리 아리스티네는 반색했다.
“나 분명히 말했어. 난 푹신푹신한 게 좋다고.”
아예 재차 강조하기까지 한다.
타르칸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답 없는 그를 보고 아리스티네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았지?”
아리스티네가 타르칸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확인했다.
긴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팔에서 늘어트린 천이 사르락 움직이며 새하얀 팔목과 팔 꿈치가 드러났다.
햇빛을 받은 보랏빛 눈동자는 평소보다 신비로웠다.
거리가 가까워 더 선명했다.
반짝이는 유리체에 온 세상이 비치는 것 같다.
“너……”
드르륵,소리와 함께 타르칸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랑 내가 그럴 일은 없어.
낮은 목소리가 짓씹듯 흘러나왔다.
그 말을 남기고 타르칸은 그대 로 뒤돌아 나갔다.
원래도 성큼성큼 걷는 남자지 만 지금은 평소보다 걸음이 더 빠르다.
알 수 없는 행동에 아리스티네는 테이블에 팔을 얹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쟤도 갑자기 왜 저러지?’
궁인들도 그렇고 타르칸도 그렇고 오늘 다들 이상하다.
“뭐가 그럴 일 없다는 건데?”
아리스티네는 막 문을 나서는 타르칸을 향해 물었다.
그는 흠칫 멈춰 서더니 아까보 다 더 빠른 움직임으로 방을 나갔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바퀴가 빨겠다.
‘뭐야,대답도 안 하고.’
투덜거림은 궁인들이 들고 온 다과를 보고 한순간에 잊혔다.
“어머,전하께서 나가셨어요? 그럼 차는 어쩌죠.”
“이왕 가지고 왔는데 물릴 필 요 없지. 그냥 이리로 줘.”
“네,황녀님.”
아리스티네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근사한 차와 스콘을 보고 속으로 환호했다.
오늘의 잼은 딸기후추 잼과 살구 콤포트였다. 당연히 클로티드 크림을 곁들여서.
향긋한 차로 입을 적신 후 따끈따끈한 스콘에 딸기후추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바르며 아리스티네는 벌써부터 행복해졌다.
입 안에 넣자 달콤하고 고소한 맛 너머로 버터의 풍미가 깊게 느껴졌다.
클로티드 크림 덕에 모든 것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가운데 후추가 주는 스파이스는 또 다른 기쁨이었다.
‘기분 탓인지 스콘이 전보다 더 맛있어진 것 같단 말이야.’
타르칸과 궁인들의 이상 행동은 까닿게 잊은 아리스티네는 즐겁게 차와 스콘을 먹어 치웠다.
* * *
“전하께서 정말로 결혼하시다니.”
“몇 달 전부터 정해진 일을 왜 이제 와서 새삼스레.”
“이제 정말 실감이 나나 보지.”
훈련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전사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화제는 당연히 곧 있을 주군의 결혼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실바누스 황녀라고!”
왼쪽 눈에 끔찍한 흉터가 있는 전사가 소리쳤다.
“뭐,그렇게 싫어할 이유 있나?”
“실바누스의 황녀라고 했을 때 걱정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과 좀 다르고……”
“나 환영 연회에서 보고 깜짝 놀랐잖아.”
“그때 황녀님 말에 대애단하신 왕후 폐하가 지은 표정 봤어? 진짜 웃겼는데.”
“스키엘라 공작은 또 어떻고. 보는 내가 불쌍해지더라.”
“헛바닥이 검이었다면 아주 피투성이가 됐을 거야.”
“실바누스 사람들은 다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뛰어난 전사가 있을 줄이야.”
사절단의 공식 알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전사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아리스티네에 대한 불만을 토해 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 전사였다.
“전사는 무슨! 세 치 혀 놀린 게 검을 다루는 것과 어떻게 같아! 원래 실바누스 놈들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했다고.”
“무칼리,왜 그렇게 황녀님을 싫어하냐.”
결국 듣다 못한 자칼렌이 한마디 했다.
“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는 실바누스인을 좋아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황녀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그분은……”
타르칸의 책사로 아리스티네에 대해 예전부터 조사했던 자칼렌은 입을 다물었다.
비록 마수를 반 토막 내는 것을 즐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제삼자에 게 말을 옮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분은 뭐. 너 완전히 편든 다? 좀 예쁘장하다고 홀랑 넘어 갔냐. 마르텐 왕자도 아니고.”
“비교할 게 없어서 마르텐 왕자랑……”
“맞아,그 말은 좀 심했다.”
동료들의 비난에 무칼리가 멈칫했다.
“그건…… 내가 사과한다.”
“빠른 사과였으니 받아 주지. 고기랑 술 사라.”
무칼리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마르텐 과 비교하는 건 좀 아니었다.
자칼렌은 무칼리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흉 때문에 험악한 얼굴과 달리 참으로 단순한 친구였다.
의리파이면서 단순한 건 때로는 주변 사람을 참 답답하게 만든다.
방금 그 말도 웃기지 않았나.
‘왜 황녀 편을 들어?’ 같은 건 어린애만 할 법한 소리인데.
편을 든다는 발상은 유치하지만 그건 무칼리가 의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놈이 싫진 않아서.’
픽 웃은 자칼렌이 무칼리에게 말했다.
“난 황녀님이 꽤 마음에 들어.”
처음 서류와 정보로 그녀를 접했을 때는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타르칸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존재라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왜 하필 첫째 황녀인가.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를 직접 보고,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활자가 아닌 실물로 알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똑똑하고 말을 잘해 타르칸에게 힘이 되어 줄 것 같아서 좋기도 했지만,그보다는 그녀란 사람 자체에 매력이 있었다.
“궁인들한테도 황녀님 인기 많 잖아. 매일매일 가까이서 보는 사람이 좋아하는 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그 말에 무칼리가 행,하고 코 웃음 쳤다.
“그건 그냥 작고 예쁜 걸 좋아 해서 그럴 뿐이야. 수다 떨 때도 예쁘다고 난리던걸.”
커다란 아이루고인들 사이에 서 있으면 황녀는 작은 요정처럼 보였다.
선이 가는 데다가,머리카락을 비롯해 체모가 어두운 아이루고 인과 달리 밝은 은발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모시는 분이 특별하다는 것은 사람을 꽤 고취시킨다.
“글쎄. 그냥 그쪽으로 할 이야기가 많은 것일 뿐,그것 때문만은 아닐 텐데.”
아리스티네는 전혀 까다롭지 않은 주인이었다.
요구하는 것도 없고 신분의 벽을 세우지도 않는다.
타르칸의 위압적인 기세에 짓늘려 있던 궁인들에게 숨 쉴 구멍처럼 다가왔겠지.
“그래,나도 주군의 신부로 꽤 괜찮은 거 같아.”
“나쁘지 않지.”
“예상보다는 훨씬 좋지.”
“뭐가 좋아!”
무칼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쉽게 마음을 내주지 마.”
보통 사람이라면 흉악한 얼굴을 한 무칼리가 이런 식으로 말 하면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겠지만,이들은 달랐다.
“뭘 마음씩이나 내줬다고.”
“너도 솔직히 공작이 깨갱하고 꼬리 말 땐 속 시원하지 않았어?”
“그건…… 그랬지.”
무칼리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시원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시원했다.
“그래,괜찮다니까?”
“다음에도 또 그러면 좋겠네.”
“전하랑도 꽤 잘 어울리는 거 같고.”
“주군께서 그러시는 거 처음 봤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 시커먼 남자들을 바라보던 무칼리가 확 인상을 찌푸렸다.
‘황녀를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작고 여린 것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그 겉껍데기에 홀려 이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실바누스인이라고. 분 명 음흉한 꿍꿍이가 있을 거야. 우린 주군을 지켜야 해.”
“꿍꿍이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꿍꿍이가 있을까? 왕후나 스키엘라 공작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던데.”
“사람은 모르는 거야. 너희도 황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보 지 않았잖아. 오며 가며 봤을 뿐이지.”
“그럼 직접 이야기를 나눠 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어때,듀란테?”
그때까지 검을 손질하며 침묵하고 있던 듀란테가 숙 눈을 들었다.
“잡담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지. 다시 복귀다.”
조용히 말하며 일어나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쳇,하고 혀를 찼다.
“재미없게.”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은 성실하게 복귀를 위해 일어났다.
다들 나가고,무칼리 역시 자신의 아랫놈들을 관리하러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머,제가 늦었나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무칼리가 뒤를 돌아봤다.
“디오나.”
군청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 며 디오나가 싱긋 웃었다.
“요기 좀 하시라고 샌드위치를 싸 왔는데 제가 너무 늦었네요.”
“힘들게 그럴 필요 없는데.....”
“어떻게 그래요. 다들 제 오라버니 같으신 분들인데.”
미소 짓는 디오나를 보고 무칼리의 얼굴에 아픔과 그리움,안 쓰러움,그리고 미안함이 뒤섞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디오나의 친오라버니이자 무칼리의 전우이기도 한 찬트라는 이미 죽었으니까.
힘든 전투였다.
이대로 가다간 마수에게 전사의 반절을 잃을 상황이었다.
그때 타르칸이 계책을 세웠다.
그답지 않게 잠시 뜸을 들이고 나온 것은 아군의 희생이 불가피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아군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고,그 죽음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그때 나선 사람이 찬트라였다.
그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찬트라는 전사했다.
무칼리는 찬트라에게 부채감이 있었고,그건 디오나에게 투사되는 형식으로 드러나곤 했다.
“고맙구나.”
“휴식 시간에 맞춘다고 왔는데 너무 늦어서. 다들 가셨고……”
“그놈들이 운이 나쁜 거지. 나 는 운이 좋고. 자,이리 줘 봐. 잠깐 샌드위치 먹을 시간은 되니까.”
듀란테가 시간이 남은 상황에서 자리를 정리했기에 아직 여유가 있었다.
무칼리는 디오나와 함께 벤치에 자리 잡았다.
맛있다,맛있다 연발하며 샌드위치를 먹는데 디오나의 표정이 딱 봐도 좋지 않았다.
미소 짓고 있긴 했지만 감출 수 없는 그늘이 보였다.
“디오나, 무슨 일 있는 거냐?”
“네? 아,아니에요.”
디오나는 재빨리 입꼬리를 올 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무칼리가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나를 네 오라버니라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어. 무슨 일인지 말 해 보거라.”
그 말에 디오나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운을 떼고서도 한참 말 이 없었다.
무칼리는 재촉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제가 무칼리 오라버니를 정말 제 오라버니처럼 여기는 건 아시죠?”
“그래,알다마다.”
“그러니 말씀드리는 거예요. 황녀님에 관한 건데…….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 말에 무칼리가 눈빛을 번쩍였다.
“황녀?”
“그게,황녀님이 웬 남자한테 꽂혀서 조사하고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