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무칼리의 얼굴이 굳었다.
험상궂은 얼굴이 딱딱해지자 위압감이 대단했다.
“그러니까 우리 주군과의 혼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다른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뒤를 캐고 있다고?”
“설마,아닐 거예요. 황녀님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타르칸 전하와 혼인할 분인데……”
디오나가 고개를 숙이며 아픈 미소를 지었다.
“디오나.”
무칼리의 부름에 디오나는 애 써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타르칸 전하의 행복뿐이니까요. 그러니 정말 좋은 상대를 만나서 아름답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무칼리의 투박한 손이 디오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이 속 깊은 아이가 얼마나 마음고생하는지 손에 잡힐 듯 보여 안타까웠다.
‘전하께서도 참 무심하시지. 이런 아이를 두고 실바누스 황녀 따위와 혼인하다니……’
물론 황녀와의 결혼은 왕명이 었고,무엇보다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타르칸도 마음에 없는 혼사를 받아들인 거라는 걸 안다.
“황녀님이 아이루고에 도착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지.”
“아직 아이루고에 적응도 하기전인 데다가 만나는 사람도 극소수인데 ……. 궁에서만 지내는 분이 어디서 남자를 보고 그러시는지.”
디오나의 말에 무칼리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황녀에게 시커먼 속내가 있는 것만 걱정했지,이런 식으로 생각 없이 남자를 밝히는 여자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도 결혼을 바로 앞두었으면 자중할 만도 한데……”
디오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 는 말에 무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남자에게 관심 가지고 쫓아다니는 분이라면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서도 계속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게 분명해 서……”
디오나는 차마 생각하기도 싫 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무칼리 역시 결혼해서는 온갖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니야,그럴 리 없어요. 벌써 남자를 만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다니.”
디오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리스티네를 변호하는 양 굴었다.
그러나 그녀의 헛바닥 위에서 아리스티네는 끊임없이 격하되고 있었다.
그저 ‘남자를 조사하는 것’에서 어느새 ‘남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여자’로.
“만약 그렇다면 타르칸 전하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전하께서.....”
디오나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다는 양 침통한 표정으로 무칼리를 올려다봤다.
타르칸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무칼리의 얼굴 역시 함께 침통해졌다.
잘못된 결혼 생활로 고통받는 주군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겨 나갈 것 같았다.
“품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 지 않겠지요? 저는 황녀님이 품위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전 그렇게 믿어요.”
디오나는 진심으로 아리스티네가 품위 있는 사람이라 믿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리고 그 의도대로,단순한데다 디오나에 대한 의리와 연민으로 가득한 무칼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황녀라는 자가 품위도 없이……! 도대체 디오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지?’
이렇게까지 황녀를 좋게 생각 하려고 하는 디오나가 딱할 뿐이다.
“디오나,네가 워낙 착한 아이라 황녀를 좋게 생각하려는 건 안다.”
무칼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처음부터 뿌리 뽑아야 해.”
“오,오라버니!”
당황한 디오나가 따라 일어나며 무칼리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봐요. 혼자 생각하고 말 것을,오라버니가 너무 편해서……”
“그렇지 않다,디오나.”
“저 때문에 결혼 전에 큰 소란을 만드는 건 아닐지……. 제 탓이에요. 잊어 주세요.”
“디오나, 이게 왜 네 탓이냐. 잘못한 건 모두 그 황녀다.”
“무칼리 오라버니……”
디오나의 바닷빛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흔들렸다.
“샌드위치 잘 먹었다. 솜씨가 더 늘었더구나.”
무칼리가 디오나의 어깨를 툭 툭 두들기며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디오나의 얼굴이 서서히 변했다.
불안했던 눈빛은 통쾌함으로 물들고,침울했던 입꼬리는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킥킥거리며 웃던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피크닉 바구니를 챙겼다.
일부러 무칼리가 혼자 남길 기다렸다가 만난 보람이 있다.
단순하고 의리파인 그라면 분명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줄 알았다.
그렇게 돌아서는데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듀란테 오라버니.”
디오나는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그렸다.
‘들었을까? 설마……’
언제 어디서나 냉정한 듀란테는 디오나가 상대하기 조금 힘든 존재였다.
듀란테의 표정을 살폈지만 딱 히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디오나,여긴 무슨 일이지?”
“쉬실 때 요기하시라고 샌드위치를 싸 왔어요. 그런데 다들 가시고 무칼리 오라버니만 만나서요.”
디오나가 빈 피크닉 바구니를 흔들었다.
“무칼리가 운이 좋군.”
그 말에 디오나가 쿡쿡 웃었다.
“무칼리 오라버니도 같은 소리 를 하셨어요. 듀란테 오라버니와 만날 줄 알았으면 조금 남겨 놓을걸.”
“내가 운이 없는 거지.”
그 역시 무칼리와 같은 소리라 디오나가 다시 한번 웃었다.
“다음에는 듀란테 오라버니 것을 꼭 남겨 둘게요. 그런데 오라버니께선 왜 여기에……”
지금 분위기는 괜찮지만,설마 떠나지 않고 계속 여기 있었던 건가 떠보았다.
“난 지도를 챙겨야 할 것 같아 서 다시 돌아왔지.”
그렇다면 계속 있었던 건 아니다.
완전히 안심할 순 없지만,그 래도 듀란테의 반응으로 봐선 아까 이야기를 못 들었을 것 같 았다.
다행한 일이었지만 디오나의 얼굴은 가라앉았다.
“평원 전투인가요?”
“그래,실바누스와의 전쟁으로 평원의 마수 처리를 잘 못 했으니까. 겨울이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괜찮긴 하지만.”
듀란테는 평원 지도를 챙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주군의 결혼식이 끝나고 상황이 진정되고 나면 평원으로 출정 갈 거다.”
“부디 무탈하시길.”
그 말에 듀란테가 가만히 디오나를 내려다보았다.
디오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 는지 깨달았다.
평원 전투에서 죽은 그녀의 오라버니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약해지는 순간. 디오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듀란테 오라버니는 황녀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듀란테가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난 주군의 검일 뿐이니까.”
바깥에는 오후의 볕이 찬란했다.
그 빛나는 빛의 산란을 보며 듀란테는 언젠가 보았던 황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먼지투성이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지만, 그 속에서 홀로 살아 숨 쉬듯 빛나던 눈동자.
“주군의 앞길을 막는 모든 것을 벨 뿐.”
그 말은 황녀가 타르칸에게 방해된다면 제거하겠다는 걸까?
아니면一.
듀란테의 시선이 디오나를 향했다.
디오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감정을 배제한 듀란테의 얼굴이 무기질적으로 보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불편했다.
디오나는 입매를 애써 끌어 올렸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에요. 타르칸 전하를 방해하는 것은 전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정확히는 타르칸 전하와 내 사이를 방해하는 모든 것은,이었다.
“그래,디오나. 네 오라버니도 참 충성스러운 전사였지. 그 동생인 네게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
경고인지 독려인지 모를 소리였다.
디오나가 듀란테의 표정으로 진의를 확인하려 했을 때,이미 그는 그녀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 * *
“손님?”
아리스티네의 물음에 로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칼리 장군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누구지?”
“무칼리 장군도 몰라요?”
“그 흉악한 괴물 놈이 우리 실바누스를 얼마나 괴롭혔는데!”
“하,정말 기가 막혀서. 자신의 나라에 관심도 없으신 거예요? 이제 아예 아이루고에 뼈를 묻으시겠어요?”
이때다 싶어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는 시녀들을 보니 참 건강하고 혈기왕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스티네가 뭐라 반응하기 전에 로잘린이 시녀들을 혼내기시작했다.
사냥개와 들개가 으르릉컹컹왈 왈 짓는 소리를 배경 삼아 아리스티네는 생각에 잠겼다.
‘뛰어난 전사라는 뜻이네. 음, 타르칸의 수하겠지?’
왜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티타임!’
오늘의 다과가 기대되었다.
“장군을 안쪽으로 모시도록.”
“데,데려오라고요?”
“그러지 말고 그냥 돌려보내세요.”
“맞아요, 그딴 괴물은 문 앞에서 내쳐야지요!”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조금 겁먹은 얼굴이었다.
“정말 만나시게요?”
로잘린 역시 주춤하며 조용히 물었다.
“응. 날 만나러 왔다잖아.”
“무칼리 장군은 야만인 중에서도 야만인이에요.”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피식 웃었다.
“그거 기대되네.”
난 야만인들하고 잘 맞는 거 같거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리스티네는 소파에서 일어나 티 테이블로 다가갔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시녀들이 서로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해서 결국 로잘린이 무칼리를 데려왔다.
“안녕하시오,황녀.”
이윽고 문이 꽉 찰 것처럼 커다란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루고인들은 워낙 덩치가 크지만,무칼리는 그중에서도 상당한 것 같았다.
그는 공포와 경멸로 표정이 일 그러진 시녀들을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아리스티네의 앞으로 다 가갔다.
‘확실히 작군.’
멀리서 봤을 때도 작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자신의 그림자가 아리스티네를 다 뒤덮고도 한참 남았다.
‘황녀는 무슨. 그냥 아까 태어난 엄지 공주 같은데.’
행,콧방귀가 나왔다.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면 황녀에게 퍽 위압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알면서도 그는 비키지 않았다.
엄지 공주가 새파랗게 질려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아니나 다를까,그를 올려다보는 황녀의 미간은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 곧 소리를 지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황녀의 입술이 열렸다.
“어서 와.”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그렇게 서 있으면 고개가 아프니까 앉는 게 좋겠어.”
느긋하게 자리를 권하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무칼리는 저도 모르게 가리킨 곳에 앉았다.
푹신한 것이 엉덩이에 닿고 나 서야 무칼리는 자신이 아리스티네와 마주 보고 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뭐지? 인상을 썼던 건 그냥 목이 아파서인가?’
그의 의문이 가시기 전에 아리스티네가 시녀들에게 명했다.
“자,무칼리 경께 차와 곁들일 것을.”
‘내게 다과를 대접한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무칼리가 움찔했다.
다과를 대접하는 것은 환대의 의미였다.
또,원하는 만큼 이곳에 있어 도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에게 이런 대접을 할 줄은 몰랐다.
하물며 무칼리 자신은一.
“..............”
무칼리는 시녀들을 바라봤다.
시녀들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둣 꽁지 빠지게 방을 나가고 있었다.
나가면서도 질 나쁜 호기심과 혐오감이 가득한 얼굴로 무칼리 를 힐끔거렸다.
정확히는 그의 왼쪽 얼굴을.
저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이제 아플 리 없는 상처가 욱신거려 왔다.
무칼리는 입매를 굳힌 채 황녀를 바라봤다.
역시 저게 정상 반응이었다.
황녀도 실바누스인이니 다를 게 없을 터.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곧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계속해서 마주 할수록 감정을 숨기기 힘들 테니까.
“마침 좋은 때 왔어.”
아리스티네가 그를 향해 말했다.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지만 뺨이 살짝 상기되어 있는 데다가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도저히 꾸며 낸 표정이라고 볼 수 없었다.
황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반기 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아리스티네는 입이 심심하던 차에 그의 방문으로 자연스레 이뤄진 티타임을 진심으로 반기 고 있었으니까.
“어떤 남자를 조사하고 계신다고 들었소만.”
“응,맞아.”
그렇게 긍정하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엔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다른 남자를 뒷조사하며 졸졸 쫓아다니는 상황이라면 당황해 야 하는 것 아닌가?
하물며 자신은 남편이 될 사람의 수하인데.
혹시 아리스티네가 모르고 있나 싶어서 무칼리는 설명했다.
“나는 무칼리,타르칸 전하 휘하의 장군이오.”
아까부터 무칼리는 일부러 하오체를 쓰고 있었다.
아이루고 예법에서는 크게 어긋난 건 아니었으나,실바누스 출신이라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터였다.
“아, 역시 타르칸의 사람이었구나.”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자기소개를 들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내가 조사하고 있는 건 왜?”
당연히 다른 남자를 스토킹하 는 그녀를 비난하기 위해서 말을 꺼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짓을 벌이는지 낱낱이 밝혀내 이 결혼을 막으려고.
황녀에게 어찌 그럴 수 있냐며 퍼부으러 왔지만,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상황은 그의 예상과 너무나 다 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혹시 도와주려고?”
“예?”
“고마워!”
아리스티네의 입 끝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건 미소라고 부를 수 없는, 그녀 자신은 자각조차 하지 못 하는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 별거 아닌 미묘한 변화에 무칼리는 어째서인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냥 느껴졌다.
아리스티네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게.
이 엄지 공주는 손바닥만 한 주제에 전혀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디오나마저도 처음 자신을 보고 얼굴을 굳혔건만.
당신이 다른 남자를 스토킹하는 걸 내가 왜 도와주느냐고 소리쳐야 했다.
하지만.
“예.. 니오!”
무칼리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예니오?”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험상궂은 무칼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