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21화 (21/183)

21화

“예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황녀는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캐 물었다.

“응? 어느 쪽?”

무칼리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 질 뿐이었다.

“크홈,홈흠.”

그가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헛기침만 하고 있을 때였다.

다행히도 문이 열리고 시녀들이 들어왔다.

다과를 가지러 간 것뿐인데 찻 잎부터 재배해 온 건지 한참이나 걸렸다.

무칼리는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시녀들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토할 것 같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다가 눈이 마주칠세라 시선을 획 돌렸다.

그의 앞에 차를 놓을 때는 찻잔이 덜컥거려 찻물이 밖으로 될 정도로 손을 떨었다.

재빠르게 던지듯 내려놓고는 무슨 괴물 옆에라도 갔다는 둣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사실 찻잔이 놓인 곳은 무칼리의 앞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잃어버린 왼쪽 눈이 욱신거렸다.

무칼리는 왼쪽 얼굴을 손으로 덮어 꽉 누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런 것에 신경 쓴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우웩! 저 면상 좀 봐!〉

〈역시 야만인답게 괴물 같은 몰골이야.〉

〈인간인지 마수인지 모를 정도인데?! 역겨워.〉

실바누스와의 전쟁에서 그는 항시 그런 조롱을 들었다.

뻔들거리는 얼굴을 한 실바누스 기사들은 그의 앞에서 토악질을 해 댔다.

‘이 상처는 당당한 전사의 증거.’

부끄럽지도, 수치스럽지도 않았다.

그가 치열하게 싸웠고,승리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작고 귀여…… 아니, 하찮은 것들은 모두 그를 무서워했다.

‘저 작고 하찮은 엄지 공주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아리스티네는 시녀들에게 이만 물러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랑 둘만 있어도 괜찮은 건가.’

무칼리는 이상한 것을 바라보 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쳐다봤다.

‘방심하지 말자.’

그는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흉한 실바누스의 황녀니까 속으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몰라.’

모든 것은 주군을 위해서.

무칼리는 콧김을 뿜으며 의지를 다졌다.

* * *

‘좋아.’

다시 무칼리와 둘만 남게 된 아리스티네는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물러가라는 말에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둣 냉큼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평소라면 우리를 내보내고 아이루고인과 단둘이 작당하여 무 슨 일을 꾸밀 생각이냐고 바락 바락 대들었을 텐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아리스티네는 지금 외부의 도 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직 메스 사업과 관련된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타르칸에게 대장장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던 것처럼,어느정도 진행이 되고 나서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벽에 부딪혔으니 어쩔 수 없지.’

시녀들이 두 눈 시퍼렇게 치켜 뜨고 있는 궁 안에만 있다보니 진척이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리스티네는 차와 스콘을 먹는 것마저 잊은 채 무칼리를 바라봤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 말인데 정말 나를 도와주려고 온 거야?”

“허,아직도 그 소리요?”

무칼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가.

그가 실바누스 황녀를 도울 일 따윈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다.

‘궁인들이고, 전사들이고 다 저한테 헤벌쭉해지는 바람에 우리 아이루고가 다 제 뜻대로 움직 인다고 착각하나 본데.’

이 아까 태어난 엄지 공주에게 현실을 똑똑히 일깨워 주어야겠다.

“그 조막만 한 머리에 확실하게 집어넣으시오. 내가 오늘 황녀를 보러 온 것은一.”

무칼리는 말을 하다 잠시 멈췄다.

뭔가가 걸렸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여기서 아리스티네에게 화를 내는 게 현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같은 성정의 그로서는 굉장히 드문 느낌이었다.

“나를 보러 온 것은?”

아리스티네의 재촉에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번에야말로 당당히 현실을 일깨워 주려 했지만 방금 들었던 느낌은 더 강해졌다.

목숨이 걸린 전투에서 항상 자신의 감을 의지하는 그로서는 무시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답답함에 무칼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끙끙 고민하던 그는 갑자기 떠 오른 생각에 ‘아!’ 하고 개운한 얼굴을 했다.

‘그래,여기서 바로 화를 낼 게 아니라 도와주는 척하다가 현장을 잡는 게 더 낫잖아!’

이것 참 완벽한 생각이었다.

이런 방법이 있어 그런 느낌을 받았나 보다.

과연 자신의 직감은 언제나 믿을 만했다.

“황녀의 말대로 그 남자를 조사하는 걸 도우러 온 거요.”

역시.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사람 한 명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비밀로 하고 싶어도 비밀로 할 수 없었다.

타르칸은 어째서인지 협력하지 않았고,그 탓에 궁에 있는 궁인들을 통해 알아봐야 했으니까.

연회에 다녀온 주인이 거기서 본 사람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궁인들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앞에서 물었으니 사실상 타르칸이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타르칸이 허락한 일에 가타부타할 사람은 없다.

그런 상황이라 무칼리가 조사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왜 관심을 갖는지,왜 조사하는지는 아무도 모 르니까!’

그건 웬만하면 사수하고 싶었다.

기실 타르칸의 아랫사람인 무칼리가 이렇게 뜬금없이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도우러 온 건 이유가 빤했다.

‘타르칸도 참……. 그게 왜 궁금하냐며 앙칼지게 굴어 놓고 나한테 미안했나 보네.’

타르칸이 시켜서가 아니면 뭐겠는가.

‘하여간 수줍음이 많다니까.’

물론 도움을 받는 와중에 무칼리에게는 어느 정도 정보를 오픈해야 할 수도 있다.

타르칸이 보낸 만큼,그 정보는 타르칸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타르칸과 나는 협력 관계이기도 하고. 어쨌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티네는 무칼리에게 인사를 했다.

시켜서 왔다지만 그래도 딱 필요할 때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이라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고마워. 안 그래도 아직 운신의 폭에 한계가 있어서 어쩌나 생각 중이었거든.”

“그랬소.”

“시녀들을 다 떼어 놓고 나 혼자 궁 밖에 나가서 그를 만날 순 없으니까. 도와준다니 살았어.”

그 말에 무칼리의 표정이 굳었다.

‘진짜로 몰래 그 남자를 만나 는 걸 도와 달라는 건가?’

분명 현장을 검거할 생각으로 도와준다고 한 거였는데,어째서인지 무칼리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충격이 아니라 곧 밀회 현장을 잡겠구나,하고 쾌재를 불러야 하는데.

무칼리는 고개를 숙였다.

‘역시 디오나의 말이 맞았어.’

왠지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험상궂은 얼굴이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일단 궁인들이 신상 명세는 다 말해 줬거든.”

아리스티네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전혀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의 흉측한 얼굴도, 그가 자신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도 경계하지 않는다.

음흉한 실바누스인이 이렇게 쉽게 위장 수사에 걸려들다니.

생판 남에다가 타르칸의 수하 인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말 한 마디 했다고 이렇게 쉽게 넘어 와도 되나?

아니면.

‘그런 밀회 따위 주군에게 들켜도 상관없다는 건가.’

실바누스인이라면 그럴지도 모 론다.

“그런데 뭘 좋아하는지,뭐에 관심 있는지 모르겠어.”

“그런 건 대체 왜 궁금한 거요?”

무칼리는 참지 못하고 벌컥 물었다.

“그야……”

아리스티네가 눈을 굴렸다. 최소한의 정보만 주고 싶은데.

“꼬시려고?”

“꼬시……”

무칼리는 뒷목을 잡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얼굴이 시뻘게진 그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 주군을 놔두고 어떻 게……!”

“아니,타르칸과는 다른 능력이 있으니까……”

“뭐요?! 지금 그깟 놈이 우리 주군보다 능력 있다는 거요!”

“더 낫다는 게 아니라 다른 능력이라고,다른 능력. 나도 타르칸이 훌륭한 파트너라고 생각 해.”

“파트……! 설마!”

하나 남은 무칼리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런……!”

그렇게 두 사람의 진도가 빨랐단 말인가!

‘며칠 있으면 부부가 될 사이니 흠이 될 건 없지만,그렇지만!’

무칼리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기 시작했다.

‘주군께서도 어떻게 엄지 공주랑!’

이렇게 작고 하찮은 엄지 공주에겐 그냥 일곱 끼니 꼬박꼬박 밥이나 먹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으응?’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모르지만 무칼리가 너무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주군이 세계 최고여야 하는 부류의 사람인가 보다.

아리스티네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걔는 대장장이잖아. 타르칸처럼 전사가 아니라. 타르칸보다 능력이 낫다는 게 아니야.”

“……대장장이?”

“그래,아이루고에는 뛰어난 대장장이가 많아. 나에겐 그런 대장장이가 필요하고.”

아리스티네는 미간을 문질렀다.

‘대장장이가 필요하단 말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러나 이미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다.

아리스티네는 한숨과 함께 이어 말했다.

“아이루고는 항상 마수를 상대해 왔기에 철강 산업이 발달했지.”

끊임없이 진화하는 마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뛰어난 검을 만들어야 했다.

“아이루고의 제련술, 야금술을 따라올 수 있는 나라는 없어.”

흥분해서 날뛰던 무칼리는 다소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리스티네의 말을 들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왜 나 오는 거지?’

“그 위대한 기술은 아이루고가 대평원의 마수와 싸워온 역사 이자증거지.”

“……실바누스의 황녀라 그런 건 모를 줄 알았더니. 알긴 아시는군.”

별로 황녀에게 동의하고 싶진 않았지만,그냥 무시하기엔 너무나 맞는 말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차이가 이렇게 큰데.”

“옳소. 눈이 발에 달렸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검들이오.”

“마수의 껍질을 단번에 벨 수 있다고 들었어.”

“하! 껍질뿐이겠소? 오러를 실으면 뼈도 벨 수 있소! 그걸 견딜 수 있는 건 우리 아이루고의 검 뿐이지.”

“역시 대단한걸.”

“그렇소! 그런데 실바누스 놈들은 허구한 날 우리 검이 야만스럽다며 앵앵거린다오. 지넨 장 난감 같은 장식용 검을 들고 다니는 주제에.”

“실바누스 사람들도 아이루고 산 명검이 좋다는 건 알아. 인정하기 싫어할 뿐이지. 쓸데없이 자존심만 고고하신 분들이라.”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허이구 참,한 번만 더 자존심 세우면一.”

一까지 말하던 무칼리는 입을 헙 다물었다.

‘지금 내가 뭘 하고있는 거지?!’

주군을 두고 다른 남자를 꼬신다는 황녀랑 신나서 검 이야기 를 하다니!

‘아니지,아니야.’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음험하기 짝이 없는 실바누스 인과 이야기하는데 즐거울 리가 있는가.

‘그야,황녀는 실바누스인답지 않게 말이 통하…… 긴 무슨! 전 혀 안 통해!’

무칼리는 ‘으음!’ 하고 자신의 정신에 기합을 넣었다.

‘그래,황녀를 속이고 밀회 현장을 잡아내야 하니 친하게 지내는 척하는 것뿐이지.’

다 작전이고 전략이다.

‘후,정말 나도 참 무서운 사람이군.’

무칼리는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다들 저보고 단순하고 생각이 짧다하지만 오늘로 그 말이 다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계략을 펼치다니.’

이 엄청난 술책에는 음흉한 실 바누스인도 당해 낼 수 없는지, 황녀는 완전히 깜빡 속아 넘어간 눈치다.

그녀는 빛나는 눈으로 무칼리가 허리에 찬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바누스와 달리 아이루고는 전사라면 특별한 허락없이 어디서든 검을 패용할 수 있었다.

‘그래,보는 눈이 있군! 내 검이 대단하긴 하지!’

무칼리는 괜히 황녀 쪽으로 허리를 내밀었다.

절대 신난 것은 아니었다.

“무칼리 경의 검도 그런 명검이겠지?”

절대 신나지 않은 무칼리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획 검을 뽑았다.

스르릉,매끄러운 검 울음과 함께 빛나는 은빛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스티네의 키만 한 태도였다.

아이루고인 중에서도 거대한 무칼리에게 잘 어울리는 검이었다.

“어떻소,끝내주지 않소?”

그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물었다.

부우우옹,검을 휘두르는 것 같지 않은 바람 소리가 났다.

풍압에 아리스티네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무칼리는 아차,했다.

‘이런 건 아무리 황녀라고 해도……’

실바누스에서 레이디에게 칼날 을 보이는 건 야만적이고 무례한 짓이라고 들었다.

하물며 거긴 특별히 허락받은 기사만이 황궁에서 검을 패용할 수 있는 나라 아닌가.

애인 같은 검을 무서워하다니, 평소라면 겁쟁이들이라고 껄껄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황녀가 겁에 질려 떨더라도 비웃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황녀의 환심을 사서 속여야 하니까.

무칼리는 허둥지둥 검을 등 뒤로 숨겼다.

“이건,나는……”

입을 열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무칼리는 말을 흐 렸다.

겁주거나 협박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분명 그녀를 혼내 주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그래도 진짜로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멋진 애검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제 황녀와 함께 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도 끝이겠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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