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잠시 뒤돌아보라는 궁인의 말 에 따라 아리스티네가 몸을 돌렸던 것이다.
그 움직임에 따라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사르륵 허공을 유영 했다.
원래도 찬란하게 빛나던 은발 이었지만,꽃 기름을 먹인 빗으로 정성을 들여 손질하니 이제는 아예 다이아몬드를 곱게 갈아 흩뿌린 것 같았다.
라일락 꽃물이 든 것 같은 오 묘한 머리카락 색이 한층 더 돋보였다.
아래는 길게 늘어트리고 윗부분은 여러 갈래로 땋아 장식해 작약과 장미,리시안셔스를 메인으로 만든 화관을 썼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화관이었으나,아리스티네의 머리 위에 올라가니 전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신부를 빛내 주는 역할로 제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꽃조차 부끄러워 고개 숙이는 미모가 무엇인지 여실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깊고 투명했고,산호색 입술은 폭신하고 매끄러워 보였다.
작고 오뚝한 코와 생기 넘치는 뺨. 티 없이 맑은,은은히 빛나는 피부.
완벽한 비율로 뻗은 팔다리를 따라 비단이 매끄럽게 홀러내렸다.
그 위로 착용한 장신구는 빛을 그러모은 듯했고,늘어트린 백금 체인이 아리스티네의 움직임에 따라 각도를 바꾸며 빛났다.
그야말로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요정이나 여 신,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
야만인의 복장을 한 새 신부라며 실컷 비웃어 줄 생각이 만만했던 시녀들은 기함했다.
눈이 찢어질 듯 커진 채 흔들렸다. 충격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리스티네가 궁인의 말에 따 라 다시 반 바퀴 돌고 나서야,그들은 멈췄던 숨을 흑 내쉬었다.
“크흠,뭐 우리 대 실바누스 제국의 위명에 먹칠하지 않을 정도네요.”
“딱 그 정도랄까.”
“겨우 부끄러운 모습을 면했네요.”
시녀들은 별것 아니라는 듯 콧 대를 세웠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자신이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마저 완전히 잊은 상태였다.
괜히 부채를 팔랑팔랑 부치며 딴청을 피웠다.
궁인들이 마지막으로 옷자락을 정리하는 동안,시녀들은 부채 사이로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옷은 날개라잖아? 그래서 그래.’
‘저 보석 좀 봐…. 크고 선명한 데다가 저렇게 반짝이다니. 저게 다 얼마야?’
‘체인에 걸린 보석 하나만 있어도 괜찮은 드레스 한 벌은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로에게 속닥거리는 시녀들의 눈빛에는 질시와 부러움이 가득 했다.
황녀는 자신보다 허름하고 수수한 존재여야 했다.
그녀에게 갈 것은 전부 다 자신에게 와야 했다. 황궁에서 그 랬던 것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은 채 사교계를 휩쓰는 자신의 모습.
타르칸의 늠름한 팔이 자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다.
그 광경이 시녀들의 머릿속에서 꿈결처럼 그려졌다.
‘저거 다 타르칸 전하가 돈을 댄 거지?’
‘역시 타르칸 전하는...’
제 주인의 남편을 떠올리는 시녀들의 얼굴이 탐욕스레 꿈틀거렸다.
실바누스의 기준에서 타르칸은 전혀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레이디를 정중히 대할 줄도 모르는 것을 넘어,감히 레이디의 침실에 무도하게 침입하지 않았던가.
참 문제가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매력적이었다.
그 앞에 서면 실바누스 남자들은 남자가 아닌 애송이로 보였다.
꿰뚫는 것처럼 강렬한 눈빛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도드라진 턱 선. 거기다 탄탄하게 꽉 조여진 몸까지.
그것만 해도 넘치도록 탐나는 남자였다.
그런데 능력과 신분,재력이 세 박자마저 완벽하게 갖췄다.
아리스티네가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을 보니 시녀들은 더 안달이 났다.
‘흥,저 천더기 황녀한테는 아까운 남자인데.’
‘못 배운 정신 이상자보다는 내가 낫지.’
‘나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고 귀족적인 여자가 옆에서 잡아 드려야 하는데.’
시녀들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그런 그녀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타르칸 전하께서도 황녀님을 보고 깜짝 놀라실 거예요.”
“후후,어서 빨리 황녀님을 보 여 드리고 싶네요. 반응이 궁금해요.”
“타르칸 전하께서도 오늘 더더욱 멋지시겠죠?”
“하아,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결혼식이 될 거예요. 두 분의 미모가 워낙 출중하시니.”
궁인들의 재잘거림에 아리스티네는 어깨를 으쑥했다.
‘그런 것보다는 몇백 년간의 적대를 끊어낸 정략혼이라는 것이 더 역사적 아닐까.’
어쨌거나 장인 정신을 발휘하느라 땀까지 흘린 궁인들이 스 스로가 낸 결과에 만족한다니 다행이었다.
‘역시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스카우트하고 싶은데.’
어서 돈을 많이많이 벌어 열정 가득한 사원을 뽑고 싶다.
“아,그리고 푹신푹신한 것으로 준비했어요.”
“정말 푹신푹신해요. 어떤 충격도 버텨 낼 수 있어요.”
“거기에 조금 좁아요.”
궁인들이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뭐가 그리 좋은지 응흥흥,콧 소리를 내며 웃는다. 눈빛이 이상야릇했다.
“그래, 잘했어.”
어쨌거나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신경 써 준 것이라 아리스티네는 칭찬했다.
한 번 한 말을 잊지 않고 기억 하다니 역시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스카우트 의지가 계속해서 상승했다.
“그럼 이제 가실까요,황녀님.”
궁인들이 활기차게 문을 열었다.
마차를 타고 식장으로 갈 때였다.
* * *
“대체 왜 이렇게 오래……”
장시간 동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실바누스 기사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불만을 쏟아 내려 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아리스티네를 보는 순간 말이 쑥 들어갔다.
그들은 짜증 부리던 것도 잊은 채 입을 헤벌렸다.
얼떨떨한 표정도 잠시,곧 그들은 품평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리스티네를 위에서부터 아래 로 찬찬히 훌어봤다.
확실히,겉모습만큼은 누구와 비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야만인에게 주긴 너무 아까운데.’
‘역시 나같이 고귀한 기사님이 예뻐해 주어야 하건만.’
아리스티네가 걸음을 옮기는 것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그들의 눈이 욕망과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여행 중에도 그녀를 놓고 지저분한 농담을 했던 사람들이다.
아리스티네가 마차에 오를 때,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상급 기사가 일부러 손을 내밀었다.
긴 여행 동안 아리스티네를 수행하면서 그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정중한 기사였던 양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는 씻지 않은 황녀를 건들기 싫었을 뿐,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아리스티네는 내밀어진 손을 본 척도 안 하고 혼자 마차에 올랐다.
아니,오르려 했다.
상급 기사가 그녀의 손을 낚아 채지만 않았으면.
“..............”
아리스티네의 손을 꽉 잡은 기사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뭐 하는 거지?”
“황녀 전하를 에스코트하는 것 뿐입니다. 자아,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아리스티네의 보들보들한 손을 기분 나쁘게 만지작거렸다.
아리스티네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만 들어 기사를 응시했다.
“감히 황족의 몸을 허락 없이 건들다니.”
나직한 말과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린 위엄에 기사는 흠칫했다.
황녀가 이런 식으로 황족의 권위를 내세우는 건 처음이었다.
기사는 당황해 어떻게 반응해 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무릎 꿇고 내 자비를 구걸하지 않고 뭐 하는 거지?”
차분한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어,기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뗐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을 깨 닫고 수치심을 느꼈다.
우습게 보던 황녀의 말에 이렇게 반응하다니.
“하하,황녀님도 참. 자신의 처지를 잘 아시는 분이 왜 갑자기 그러십니까.”
기사는 일부러 더 과장되게 비웃으며 아리스티네를 깔아 봤다.
“황족도 황족 나름인 법인데.”
아리스티네를 위아래로 훌어보는 눈에는 경애는커녕 멸시가 가득했다.
“황녀님은 본인이 2황녀 전하라도 되신 줄 아나 봅니다?”
기사는 보란 둣이 아리스티네 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자신 이 건드려서 문제 될 게 뭐가 있냐는 둣.
“아이루고에서 좀 대접받고 왕자랑 결혼하니 자기 자신이 누군지 잊은 건지,참……”
그가 피식 입매를 뒤틀었다.
“그래 봤자 야만인이 아닙니까.”
기사가 엄지로 아리스티네의 어깨선을 문질렀다.
놀랍도록 매 끄러운 피부였다.
“그렇게 미개한 자들이니 황녀님을 떠받들어 주는 거지요.”
자존심이 상해 분노만 가득하던 그의 눈에 난잡한 감정이 차 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이 쭉 뻗은 가녀린 목선과 도드라진 쇄골을 천천히 훌는다.
아리스티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넌 아랫사람 사랑이 정말 대 단한가 봐.”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에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녀의 정신이 이상한 건 알 고 있었지만……’
아리스티네가 픽 웃었다.
“같이 지하 감옥에 갇히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냐?”
그 말에 아리스티네를 업신여기던 기사의 표정이 굳었다.
피떡이 된 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부하의 모습이 떠오른다.
타르칸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런 일 따원 없었을 거다!〉
〈예,그 야만인 놈에게 제국 기사의 실력을 보여 줬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비겁하게 내가 없는 틈을 타서 공격하다니...’
부하 기사들과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솔직히 말해서 타르칸과 절대 맞서고 싶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놈은 괴물이야……’
허옇게 질린 기사를 보며 아리스티네가 사근사근 속삭였다.
“개는 콧대가 나갔다던데,나란히 콧대가 나가면 재밌을 거야. 아니면 …… 다른 곳도 꽤 괜찮을 것 같은데.”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정확히는 기사의 고간으로.
“난 이쪽이 더 끌리는데. 너는 어때?”
생긋 웃는 아리스티네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성결해 보였다.
비록 그 얼굴로 하는 말은 너의 소중한 세 번째 다리를 뽀각 조각내 주겠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기사는 저도 모르게 제 다리 사이를 가렸다.
그의 얼굴이 꺼무죽죽하게 죽어 들어갔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자신의 소중한 곳이 아파 왔다.
아리스티네는 볼품없이 몸을 움츠리는 기사를 보고 픽 웃은 후,홀로 마차에 올랐다.
‘하여간 학습 능력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는지.’
아리스티네는 자리에 앉으며 입으로 후,바람을 불었다.
한 명이 그 꼴이 났으면 알아서 자중해야 할 것 아닌가.
‘조만간 기사들도 처리해야겠어.’
그러기 위해선 구실이 필요했다.
‘아,알아서 사고쳐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겁을 주는 바람에 몸을 사리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아니지,아니야.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는 놈들이었으면 방금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오히려 무시하던 부하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더 날뛸 수도 있다.
그래야 짓밟힌 자존심이 펴진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부류니까.
아리스티네는 창밖을 바라봤다.
기사들이 호위하듯 마차 주변을 감싼 채 행진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어렵지 않게 상급 기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연 엄청나게 분개해서 혼자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아까 소중이를 뽀각 한다는 말 에 그렇게 궁상맞게 반응했던 게 퍽 수치스러운 모양이다.
부하 기사들이 안 그런 척 힐끔힐끔 그를 곁눈질하고 있으니 더 그럴 것이다.
‘오,곧 폭발하겠는데.’
어떤 의미로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아리스티네에게는 좋은 징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마차는 식장 앞에 도착했다.
* * *
화려하게 꾸며진 식장 안,디오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로비 구석에 서 있었다.
식장 밖 광장에는 기자를 비롯 해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실내에 있는데도 그 소란과 흥 분이 여실히 전해져 왔다.
다들 왕국의 영웅인 타르칸의 아내가 될 여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원래는 내가 그 기대를 받았어야 하는데……!’
디오나는 유일하게 타르칸과 가까운 여자였다.
타르칸이 곁을 내준,단 하나의 여자.
원래라면 응당 자신이 타르칸의 아내가 될 터였다.
타르칸은 왕이,자신은 왕후가 되어 이 나라에 군림하는 것.
그것 외에 다른 미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바누스의 황녀라니!’
디오나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꽉 틀어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어머나, 디오나 님.”
로비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던 영애들이 디오나를 보고 알은체를 해 왔다.
항상 여유 넘치고 어른스러운 디오나는 뭇 영애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거기다 디오나의 오라버니가 평원 전투에서 자신을 희생해 동료를 살리고 용감하게 전사하지 않았는가.
그 이야기는 음유 시인의 노래 로도 유명할 정도였다.
젊은 전사의 숭고한 희생에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일로 인해 디오나의 가문인 팔라만 백작가의 위세가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애들.”
디오나는 언제 분노했냐는 양 미소로 그녀들을 반겼다.
“오늘도 아름다우셔요. 신부보 다 더 아름다우신 거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요. 아리스티네 전하께서는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랍니다.”
디오나는 느긋하니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아리스티네를 추켜 올렸다.
“황녀님이 아름다우시다는 말을 듣긴 했어요. 알현 때 다들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그래 봤자 실바누스인 이잖아요.”
“너무 조그매서 볼품없는……”
누가 들을세라 영애들이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이런 말씀은 그렇지만,저는 디오나 님 같은 분이 타르칸 전하께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저도요.”
디오나는 아무 말 없이 능염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