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분위기가 나쁘지 않자 영애들은 더 신나서 재잘거렸다.
“정말 두 분께서 같이 계시는 모습을 보면 너무 멋있어서.....”
“타르칸 전하께서도 오직 디오나 님만 곁에 두시잖아요? 전하의 차 시중을 들어 봤으면 하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전하께서도 역시 디오나 님에게 마음이 있으신 것 같은 데……”
디오나는 철없는 영애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내버려 둔 채 충분히 즐겼다.
영애들의 말이 슬슬 바닥날 때가 되어서야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를 좋게 생각해 주는 영애들의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결혼식 날에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아……,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요. 영애들이 호의로 한 말이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아요. 하지만,이 결혼은 폐하께서 결정하신 거니까요.”
타르칸이 아닌,왕이 결정한 혼사.
디오나가 강조하고 싶었던 건 그거였다.
“아,그렇죠. 폐하께서 정한 일에 말을 얹을 순 없죠.”
“그래서 타르칸 전하께서도……”
디오나를 바라보는 영애들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왕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갈라진 비운의 연인.
귀족 사회에서 정략혼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디오나라면 충분히 타르칸과 결혼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영애들이 디오나의 손을 꼬옥 쥐었다.
“디오나 님,저희는 디오나 님을 응원해요.”
“힘내세요.”
디오나는 느닷없이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영애들을 바라봤다.
“후후, 고마워요. 갑자기 응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뭔지는 잘 몰라도 응원해 주는 게 좋다는 듯한 어조였다.
설마 타르칸과 자신의 사이를 말한다고는 생각도 못 하는 모습.
그 반응에 영애들이 더 안타까 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속도 없으시지…….’
‘이렇게 욕심이 없으셔서……’
이 모습을 보니 괜히 황녀가 미워졌다.
디오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눠서 즐거웠어요,영애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나는 이만 황녀님께 가 봐야겠어요.”
“황녀님께요?”
영애들이 놀라 물었다.
대체 연적에게 왜 간단 말인가.
그것도 결혼식 날, 상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황녀님께서 낯선 아이루고 땅에 오셔서 결혼하시니 얼마나 마음이 외롭고 불안하시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왜 디오나 님이……”
“또래 여성 중에 면식이 있는 사람이 저뿐이니까요. 공주님들이 챙기실 거 같지도 않고……”
디오나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먼 곳을 쳐다보았다.
아련해 보 이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황녀님께서도 제가 좀 더 편하시겠지요. 궁에 오신 첫날에도 만났으니까.”
그 아련함을 감추듯 디오나가 미소 지었다.
영애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말은 설마 황녀가 먼저 디오나를 불렀다는 뜻인가?
디오나가 확실하게 말한 건 아니지만,표정도 표정이고 충분히 그렇게 들렸다.
‘일부러 디오나 님을 부른 거 아니야?’
‘타르칸 전하와 디오나 님의 관계를 알아서……’
황녀가 일부러 타르칸을 뺏은 것도 아니고,정략혼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 너무 나쁘게 생각은 안 하려고 했다.
타르칸의 결혼식에 있는 디오 나의 모습에 속이 상해서 투덜거려도 황녀 자체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영애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실바누스의 다른 황족들은 오지도 않았는데. 가족 한 명 없이 치르는 결혼이잖아요.”
디오나가 안쓰럽다는 듯 중얼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황녀를 생각 해 주는 디오나의 말을 들으니 영애들은 가슴이 아팠다.
더더욱 황녀가 미워졌다.
‘황족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니. 친정에서도 대접 못 받았다는 소리인데.’
‘그런 상대에게 우리 디오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영애들의 생각이 빤히 얼굴에 비쳐 디오나는 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신분이 낮은 영애들은 수가 많은만큼 소문을 퍼뜨릴 때 이용하기 좋다.
디오나는 벽에 걸린 시계와 신부 대기실을 힐끔 바라봤다.
‘슬슬 가 볼까.’
지금 신부 대기실에는 황녀 혼자뿐이다.
아까부터 혼자가 될 기회가 있을까 싶어 지켜보고 있었기에 알았다.
치장을 돕던 궁인들은 원래 업 무로 돌아갔고,시녀들이 잠시 곁을 지켰지만 어째서인지 네 명 다 우르르 몰려나왔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던 것을 보 아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바로 들어가는 건 혼자가 되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비칠까,시간을 좀 보낸 거였다.
‘이제 충분하지.’
“그럼 정말로 가 볼게요. 다음에 만나요,영애들.”
* * *
아리스티네는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녀들이 벌써 돌아왔나?’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시녀들이 씩씩대며 나가길래 한동안 안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대기실에 들어온 건 아리스티네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넌……”
그녀였다.
수면 거울 속에서 타르칸과 함께 있던 여자.
타르칸이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속삭였던 여자.
“황녀님을 뵙습니다.”
우아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디오나가 아리스티네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지었다.
“디오나라고 합니다. 이전에 잠시 스치듯 뵈었던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지 요?”
“기억하고 있어. 그때 내게 차 를 따라 주었지.”
“황녀님께서 저를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디오나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안 그러면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들킬 것 같아서였다.
제 생각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황녀는 훨씬 더 아름다웠다.
오늘 그녀를 처음 본 남자들은 사랑에 빠질 것이고,그와 동시에 좌절할 것이다.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아리스티네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니까.
‘....타르칸 전하의 아내.’
디오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영애가 내겐 무슨 일이지?”
아리스티네의 말에 디오나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야,당연히 두 분 전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디오나의 바닷 빛 눈동자에는 살짝 물기가 맺혔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더군요.”
희미한 미소는 어둠 속에 놓인 촛불처럼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냥 축하하는 게 아니었다.
엄청 질척질척하고 지저분한 삼각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웃음이었다.
제 남자의 아내에게 둘이 행복 하라고 하며 아련히 물러서는, 비운의 여주인공 같은 미소.
‘네 남편과 나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게 있어. 네가 모르는, 아주 깊은 이야기가.’
딱 그런 느낌이 났다.
하지만 말로는 그냥 축하한다,잘 어울린다고하니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이보다 새 신부를 더 찝찜하고 꺼림칙하게 만드는 미소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고마워.”
아리스티네는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상 시선은 디오나를 향하고 있으나 집중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뭐지?’
디오나는 완전히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움찔했다.
저번 환영 연회 때를 생각하면 황녀는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내 말의 속뜻을 알아챘 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 반응도 없을 수 있지?’
이래선 안 된다.
디오나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 황녀에게 자신이 타르칸에 게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알려 주어야 했다.
“타르칸 전하와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것이나 다름 없죠.”
디오나의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의 모비께서 제 어머니와 절친하셨거든요. 제 오라버니와 타르칸 전하 역시 마찬가지였고.”
디오나는 그때를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며 애릇한 표정을 했다.
“모비께서 저를 참 예뻐해 주셨는데……”
나를 며느리로 점찍어 놓고 예뻐하셨어.
딱 그런 뉘앙스였다.
“그렇다 보니 전하께서도 옛날부터 저를 많이 챙겨주시고 아껴주셨지요.”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사이였어.
양가의 사이도 좋아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
‘맞아. 그랬었어.’
디오나는 자신의 말과 생각에 심취했다.
타르칸에게 자신은 각별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신부 대기실에 당당히 앉아 있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이 그렇게나 거슬릴 수가 없었다.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였어야 하는데……!’
하지만 디오나는 능숙하게 감 정을 감추며 살갑게 아리스티네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 타르칸 전하께서는 냉혹한 성격 탓에 주변에 여인을 두지 않으시잖아요.”
그러면서 “황녀 전하께서도 겪어 보셨겠지만요” 하고 덧붙였다.
냉혹한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냉대했을 게 틀림없다는 말이었다.
“저야 워낙 옛날부터 봐 와서 상황이 다르지만一.”
그렇게 말한 디오나가 아리스티네의 눈치를 살폈다.
아리스티네는 별 반응이 없었다.
원래도 디오나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지금은 아예 완전히 흥미를 잃은 얼굴이었다.
년 네 남편에게 냉대받겠지만, 난 네 남편에게 특별해. 난 잘 챙겨 주더라.
그런 말을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하는데도.
이상하게 안달 나는 건 디오나였다.
그녀는 아리스티네에게 더 가 까이 다가가며 계속 입을 놀렸다.
“타르칸 전하와 황녀 전하께서 혼인하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선을 더 넘는다.
그러고선 발을 빼듯 손사래를 치며 덧붙인다.
“아,다른 뜻은 없어요. 그저 아이루고와 실바누스는 오랜 적대 관계였으니 이렇게 혼사가 진행될 줄 몰랐거든요.”
디오나는 이제 아리스티네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아리스티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본 채 한 글자, 한 글자 힘 주어 말했다.
“평화를 위해서 두 분의 혼사는 꼭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야지요.”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그렇지 않겠어요?” 하고 묻는다.
타르칸의 단 하나의 사랑은 나지만,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너랑 결혼하는 거야.
그렇지? 너도 어서 그렇다고 대답해. 딱 그런 소리였다.
지금까지는 별 반응 없던 황녀도 지금은 참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멀껑히,아무 문제 없 이 결혼하게 할 수 없어.’
다가올 황녀의 히스테리를 상상하며 디오나의 눈이 희열로 물들었다.
‘자, 어서 화를 내며 소리치고 울부짖어 봐.’
디오나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 하고 있을 때,
‘오…….’
아리스티네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진짜 재미없는데……?’
솔직히 남의 남자 친구 자랑을 듣는 것만큼 관심 없고 재미없는 건 없다.
제왕안으로도 가끔 애인 자랑을 볼 때가 있었는데,정말 따분 했다.
차라리 둘이 죽네,마네하면서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으면 신기하기라도 했는데.
‘애인 자랑은 항상 언제나 ...........’
약속된 승리의 지루함이었다. 감동도 없고,재미도 없고,의미도 없고.
‘디오나는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러지.’
여기 누구 두 사람만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 물어본 사람?
안 물어봤고,안 궁금하다.
‘솔직히 언제까지 말하나 싶어서 아무 대답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지치지도 않고 주절거렸다.
‘애인 자랑은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싶어 한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아리스티네는 디오나는 물론, 디오나와 타르칸의 관계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디오나가 앞에서 무슨 말을 하든,무슨 뉘앙스를 풍기든 심력을 소모해 하나하나 속 뜻을 읽고 신경 쓸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런 건 정치 사교나 사업할 때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리스티네에게 디오나는 단 하나의 의미만 있었다.
정말 타르칸의 연인이라서 자신이 그와 협상할 때 교섭 카드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을 제외하면 관심 밖이었다.
뭘 말하든 그 속뜻까지 생각할 가치는 없다.
디오나는 설마 아리스티네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판단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그녀는 아리스티네의 반응을 갈구하듯 애타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화를 내!’
그 시선을 받은 아리스티네는 어쩔 수 없이 이 재미없는 이야기에 동조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열렬하게 반응을 요구하는 눈빛이라 무시하기 좀 그랬다.
‘어쨌거나 내 사업 파트너의 애인인지 특별한 존재인지 하여 간 그런 거니까,잘 대해 주는 편이 좋겠지?’
사회생활은 참 힘든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리스티네는 디오나에게 미소를 되돌려 줬다.
“고마워,네 말대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할게.”
예상과 전혀 다른 말에 디오나의 입매가 설핏 굳었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네,그러니까 본디 결혼은 사 랑하는 남녀 간의 결합이지만, 이번 결혼은 다른 것도 아니고 ‘평화’를 위한 거니까,꼭 성공해야죠.”
“응,나도 타르칸과 나의 결혼이 단순한 남녀 간의 결합이 아니라,세계의 평화라는 대승적인 차원의 결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아리스티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없는 애인 자랑보 다는 이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으면 했다.
‘하.............!’
디오나는 말끔한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턱 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뭐야,그럼 지금 이 결혼은 일반 남녀의 결혼 따위와는 다른 고차원적인 결합이라는 거야?’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겨울 바다처럼 무겁게 얼어붙었다.
‘차원이 다른 결혼이니까 방해 하지 말라는 거?’
이보다 더 디오나를 미치게 만 드는 말은 없었다.
설령 황녀와 타르칸의 결혼이 없던 일이 되더라도, 디오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타르칸이 자신과 결혼해 봤자 이런 특별한 의미는 갖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일반적인 왕족의 결혼이 되겠지.
이 결혼이 이렇게나 특별한 것은,이렇게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오로지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의 결합이기 때문이었다.
몇백 년간의 적대를 끊어 내는 결혼,그리고 사랑.
이보다 더 가슴 떨리는 말이 어디 있을까?
그 주인공은 타르칸과 자신이어야 했다.
아리스티네가 아니라!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