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미 결혼까지는 왔다. 그건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면 一.
‘절대,절대로 사랑은 손에 못 넣게 할 거야.’
디오나의 얼굴에 질퍽거리는 그늘이 드리웠다.
그 속에서 격분과 질투에 얼룩 진 안광이 번뜩인다.
‘내가 이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결혼 생활을 만들어 주겠어.’
평생 불행한 삶 속에서 고통에 울부짖는 아리스티네를 상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디오나는 울화를 진정시키며 후,하고 미소 지었다.
‘어차피 타르칸 전하의 관심이 황녀를 향할 리도 없지.’
타르칸은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그 단단하고 견고한 마음에 얼마나 상처받았던가.
아무리 노력해도,아무리 다가가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가시와도 같은 날카로운 벽에 디오나는 몇 번이나 찔리고 베였다.
‘이제 와서 변할 리가.’
디오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아리스티네 역시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득,씻고 난 아리스티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타르칸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식 알현 때 아리스티네를 보 호하며 왕후에게 맞서던 모습 역시.
가슴이 술렁였다.
타르칸이 그런 식으로 정치적 언사를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야,아니야.’
황녀가 씻고 나왔을 땐 자신 역시 놀랐다. 얼마든지 놀랄 수 있다.
왕후에게서 황녀를 보호하던 것도 원래 제 사람은 챙기시던 분이니 그런 것이다.
그렇게 디오나가 애써 스스로 를 다독이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할 말은 그게 끝?”
“네? 네……”
디오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 였다.
설마 이야기가 이렇게 흐를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더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래, 축하해 줘서 고마워.”
인사한 아리스티네가 이제 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디오나는 버티듯 두 다리에 힘 을 꾹 주었다.
여기서 이렇게 허망하게 물러 설 순 없었다.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낀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에게 감히 집적 대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타르칸에게 따져 물으며 화를 내면 더더욱 좋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이 나가고 난 뒤,물건을 던지고 깨트리며 패악을 부리길 바랐다.
‘이 결혼식이 망해야 하니까!’
정략혼이 깨지지 않더라도 이 결혼식 자체가 사람들에게 좋지않은 이미지로 남았으면 했다.
아리스티네의 결혼 생활은 상 처로 시작되어야 했다.
‘타르칸 전하께서 신방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게.’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디오나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때였다.
* * *
“듀란테,뭘 그렇게 보고 있어?”
무칼리의 물음에 듀란테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황녀의 시녀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
“그야 당연히 황녀의 옆에 있겠지.”
듀란테는 말없이 무칼리를 슥 보고선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궁금해진 건 무칼리였다.
딱히 황녀의 이야기여서 궁금해진 건 아니었다.
아니,황녀의 이야기여서 궁금해진 건 맞지만,그건 어디까지나 그녀를 감시해야 하기 때문 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듀란 테에게 물었다.
“크홈,그건 왜?”
“아니,내 생각에는一.”
‘황녀의 옆에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듀란테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의 시선이 신부 대기실을 향 했다.
영애들과 이야기 나누던 디오나가 대기실에 들어간 지 꽤 지났다.
‘디오나가 다른 사람이 있는데 황녀를 보러 갔을 리가 없지.’
듀란테는 잠시 툭, 툭 느릿하게 검집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환영 연회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황녀의 모습을 기억했다.
타르칸의 궁까지 찾아와 황녀 를 구경하고 비웃었던 왕족들마저 그랬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황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흙먼지와 땀이 엉켰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별처럼 빛나던 두 눈동자.
〈앞으로는 날 속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평원에서 부는 바람처럼 귓가에 감기는 목소리였다.
툭,검집을 두드리던 손길이 멎었다.
황녀가 뭐라 하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주군이었다.
그땐 황녀를 속이려는 의도가 없었지만,필요할 시 몇번이든 속일수 있다.
그게 주군을 위한 길이라면.
“어? 어디 가냐? 듀란테.”
무칼리가 걸음을 옮기는 듀란테를 보고 물었다.
“잠시 자리 비운다.”
“뭐? 야!”
무칼리가 불렀지만 듀란테의 등은 한 번의 멈칫거림도 없이 점점 멀어질 뿐이다.
무칼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거,진짜 성질머리 하고는.”
쫓아갔다간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기만 할 것이다.
‘차라리 말로 하는 게 낫지.’
다들 저보고 성질 좀 죽이라고 말하지만,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성질이 더러운 사람은 듀란테였다.
‘그래서 대체 황녀 이야긴 왜 꺼낸 건데!’
대답해 주지도 않고.
듀란테의 널찍한 등을 노려보던 무칼리는 깜짝 놀랐다.
‘……신부 대기실?’
듀란테가 노크하는 곳은 신부 대기실이었다.
‘저 녀석이 황녀께 대체 무슨 볼일이지?’
* *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디오나는 반쯤 열리던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누구지? 설마 시녀들이 벌써 돌아온 건가?’
아니,시간이 꽤 지났으니 돌 아올 때도 되었다.
사실 황녀를 모시는 시녀면서 결혼식 날 이렇게 오래 홀로 내 버려 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그것도 친정 시녀 아니던가.
‘아직 황녀를 제대로 우롱하지도 못했는데!’
디오나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하지만 곧 진정했다.
‘실바누스 시녀들은 황녀를 싫어했지. 그 점을 잘 이용하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
자신의 본심을 들키지 않게 하 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된다.
실바누스에서 온 시녀들은 황 녀를 헐뜯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었으니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몇 마디 할 필요 없이 떡밥만 던져 주면 되니까.
“들어와.”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녀들이 아니었다.
‘듀,듀란테 오라버니?!’
예상치 못한 인물에 디오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비전하.”
듀란테가 아리스티네에게 예를 갖췄다.
약식 예가 아니라 정식 예였다. 전사가 왕족에게 차리는 예.
디오나의 표정이 확 굳었다.
“벌써 그렇게 불리니 이상하네.”
아리스티네가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일어나도록.”
느긋한 허락이 떨어지자 듀란테가 고개를 숙인 후 몸을 일으켰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디오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잘근 깨물었다.
어색하다고 말하면서도 아리스티네는 지극히 여유로웠다.
과연 태생부터 고귀하니 이런 대접이 아주 자연스럽다는 게 느껴졌다.
디오나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듀란테 오라버니께서는 왜 이곳에……’
불안함이 명치까지 차올랐다.
지난번,무칼리를 충동질하고 난 직후 듀란테와 마주쳤던 게 떠올랐다.
‘설마 그것 때문에?’
그때 제가 무칼리에게 했던 말을 다 들은 것인가.
디오나는 후들거리는 몸을 애써 바로 세웠다.
항상 이미지를 관리해 왔던 디오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듀란테 오라버니잖아.’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이렇게 나설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설마 듀란테가 신부 대기실에 그녀가 있는 줄 알고 들어왔겠는가.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듀란테는 이렇게 저와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용건이 있는 거겠지.’
그래,괜찮아.
디오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는 동안 아리스티네와 듀 란테의 대화는 매끄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야,듀란테 경.”
“예,가끔 얼굴은 뵈었지만 따 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환영 연회에서도 봤고 궁에서도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묵례만 했다.
“그래서,여기는 무슨 일로 왔 지?”
“곧 식이 시작될 텐데 준비는 차질 없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별다른 문제는 없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디오나는 왜……”
듀란테의 시선이 디오나를 향 했다.
디오나는 바짝 굳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듀란테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지 확실하지 않으니 뭐라고 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아,내 결혼을 축하해 주러 왔대.”
침묵하는 디오나 대신 아리스티네가 대답했다.
“축하,말씀입니까?”
“ 응”
고개를 끄덕인 아리스티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축하한다는 것치곤 다른 이야기가 더 많긴 했네.”
정말 지루하디지루한 애인 자랑이 주였다.
“그거 저도 궁금하군요.”
듀란테가 드물게 웃으며 말했다. 웃는 눈매인데도 꽤 서늘한 인상이었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기울였다. 지루할텐데?
무슨 이야기였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용감한 질문이었다.
아리스티네는 디오나를 바라봤다.
자리까지 깔아 줬으니 그렇게나 좋아하는 자랑을 해 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디오나는 그 시선에 흠칫 몸을 굳혔다.
입술이 딱 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눈매를 가느다랗게 휘며 웃음을 지었다.
“황녀님도 참……. 제가 다른 말을 그렇게 많이 했나요? 두 분 전하의 결혼이 성공적이길 바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혼자서 자랑하다 민망하니까 뒤에 덧붙인 거 아니었어?”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뜸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찾아와 애인 자랑하고 나니 멋 쩍어서 그런 줄 알았다.
디오나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디오나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 생긴 줄 몰랐는데요.”
“황녀님께서 오해하셨나 봐요. 딱히 아무 일도 없었어요.”
듀란테의 말에 디오나가 서둘러 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스티네가 열게 한숨을 쉬었다.
듀란테는 궁금해하고,디오나는 막상 자리를 깔아 주니 부끄러운지 자랑을 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말해 주는 수밖에.
“별거 아니야. 그냥 타르칸이랑 자기랑 어렸을 때부터 아주 특별한 사이였다는 자랑이었어.”
툭 내뱉는 말에 디오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서둘러 듀란테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아리스티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했지?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아, 타르칸의 모비께서 자길 많이 아껴 줬다는 말도 했다.”
아리스티네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디오나는 복장이 더 터졌다.
‘왜 저렇게 기억 못 해?’
일부러 화날 말만 골라서 했는 데 정작 기억에도 희미하다니.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치를 떨어야 할 일 아니야?’
“으음,또 뭐가 있더라……. 아무튼 구구절절하게 말했지만 결론은 타르칸과 자신이 엄청나게 찐한 사이라는 거였어.”
아리스티네는 대강 그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사실 그녀는 디오나가 했던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왕안으로 본 것을 곱씹느라 워낙 기억력 훈련이 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피하잖아.’
디오나의 말을 그대로 제 입으로 읊자니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강 얼버무렸다.
‘그렇게 남부끄러운 말을 길게 하다니 디오나도 참 대단한 사람이야.’
아리스티네는 탄복했다.
‘어쩜 그렇게 수치를 모를 수가 있지!’
생각하고 나니 조금 욕 같았지만 순수한 감탄이었다.
“흐음,진한 사이라.”
듀란테가 가볍게 팔짱을 끼며 디오나를 봤다.
흠칫한 디오나가 그에게 뭐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듀란테는 그 전에 시선을 다시 돌려 아리스티네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타르칸 전하 와 비전하의 결혼을 축하했다고요?”
“응, 우리 결혼은 다른 것도 아니고 평화를 위한거니까 성공해야 한다고.”
“과연. 그랬군요.”
듀란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심한 시선이 디오나를 훌는다.
그러니까 황녀의 말은 딱 하나를 가리켰다.
디오나가 결혼하는 신부한테 굳이 찾아와,
‘네 남편은 내 연인이고,비록 너랑 결혼하지만 우리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이 사랑은 영원할 거다.’
一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
‘거기다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까지.’
아주 화룡점정이었다.
듀란테가 피식 웃었다.
“오,오라버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린 디오나가 호소하는 눈을 한 채 듀란테를 불렀다.
아리스티네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럴 거면 왜 와서 자랑했대.’
하도 당당해서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일반적으로 결혼식 날 와서 신랑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뺨 맞기 딱 좋은 짓이다.
‘이 경우는 다르지만 말이야.’
어차피 타르칸과 자신은 정략혼이라는 사업의 파트너일 뿐이다.
아예 그 사실을 혼전에 서로 못 박기까지 했다.
디오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다.
타르칸이 그녀를 특별히 여긴다고 그렇게나 자랑했으니 당연히 알려 줬겠지.
‘그래서 그냥 생각 없이 자랑한 줄 알았는데 저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네.’
아리스티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디오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여기선 디오나의 편을 들어 줘서 타르칸에게 생색을 내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괜찮아,듀란테.”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그래서,듀란테의 눈동 자에 서늘한 한기가 맺혔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