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해.’
현재 백성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지만,그건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이야기다.
귀족들과 왕족들은 다를 것이다.
‘특히,타르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왕후 일파는.’
일단 엄청나게 비웃을 것이다.
비웃는 것 자체는 크게 상관없었다.
‘문제는 이 결혼을 실질적으로 공격할 빌미를 준다는 거지.’
안 그래도 공격하고 싶어서 날을 갈고 있던 치들이었다.
하나 차마 평화를 위한 결혼에 안 좋은 말을 얹을 순 없어서 끓는 속으로 축하할 수밖에 없었을 터.
‘지금쯤 소식을 듣고 축배를 들고 있겠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당장 백성들의 반응이 괜찮다고 해서 끝까지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지금도……’
아리스티네는 힐끗 좌중을 둘 러보았다.
타르칸의 퍼포먼스에 감격해서 인지 박수를 치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주변을 둘러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후속 대응이 없고 아리스티네 와 타르칸이 멈춰 서 있으니 그럴 만했다.
“그런데 마차가 부서졌으니 어쩌지? 아직 갈 길이 한참인데……. 이제 겨우 초입을 지났
아이루고의 왕도는 넓다. 이 먼 길을 걸어갈 순 없다.
한나절도 더 걸릴텐데 길에서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지칠 것이다.
“웨딩 퍼레이드가 중단되는 거 야?”
“설마! 웨딩 퍼레이드 중간에 마차가 뒤집혀서 중단되다니,그건..... ”
웨딩 퍼레이드의 일주는 곧 부부의 일생.
즉,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일주를 마치지 못했으니 이 결혼은 깨질 거라는 예고나 다름없다.
‘그리고 두 분의 결혼은一.’
평화.
그 자체를 뜻했다.
여기서 웨딩 퍼레이드가 중단 되는 것은 곧 평화가 깨질 것이라는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은 차마 불길한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대는 사람들을 본 아리스티네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왕후 쪽에서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정치는 여론전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불안함을 이용해 이 미신이 아예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양 말을 퍼트릴 거다.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이 타르칸 과 아리스티네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없는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
한숨이 폭 나왔다.
타르칸은 그런 아리스티네를 내려다보다가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하마터면 결혼 첫날부터 이 여자가 죽을 뻔했다.
무게도 안 느껴질 정도로 자그 마한 여자니 경미한 부상으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리스티네 를 보호하듯 자신의 품에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불안함에 조금씩 물들어 가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멈칫 했다.
그저 숨 한 번 깊게 내쉬고 시선을 내리깐 것만으로도 아리스티네는 세상에 다시없을 정도로 처연하고 애틋해 보였다.
몸집이 큰 아이루고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보호 본능을 자극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자신들의 영웅인 타르칸이 안타까워하며 새 신부를 꽉 끌어안으니.
이것 역시 아까 떠올렸던 연극의 일부가 되어 사람들의 머릿 속에 지나갔다.
그래,원래 사랑에는 시련이 있는 법이다.
아름다운 두 연인은 어떻게든 시련을 극복해 내는 법!
“전하, 힘내세요!”
“괜찮아요! 저희랑 같이 행진 해요!”
“저희는 두 분을 응원해요!”
“지지 마세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두 연인을 응원했다.
이 역사적인 사랑의 순간(?)에 자신들 역시 산 증인이 되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찼다.
주변을 정리하던 근위병들과 진행관리인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즈언하,저희만 믿으십시오!”
“저희가 두 분 전하께서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도록 길을 열겠습니다!”
말만 들으면 웨딩 퍼레이드가 아니라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자신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나가라는 것 같았다.
‘……뭐지?’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상황이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홀러가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안감이 증식되어 상황이 악화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직접 겪어 보기 전엔 모르나 봐.’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고 있었던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뭉클 해졌다.
“모두들 정말 고마워.”
아리스티네의 인사에 퍼레이드 길은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꺄아아아아!”
“행복하세요!”
“저희가 도울게요!”
사람들이 감격한 얼굴로 손을 마구마구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가슴속에서 기묘한 바람이 차올랐다.
“타르칸,나 퍼레이드 꼭 완주 하고 싶어.”
그 전까지는 정치적으로 불리 해지니 방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리스티네 개인으로서는 웨딩 퍼레이드가 중단되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기대를 모두 충족 시킬 순 없을지라도,실망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관리인이 부르러 간 새 마차가 빨리 오진 않겠지?”
왕후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 마차는 이 결혼식에 너무 처진다,저 마차가 더 낫겠다, 같은 일이 생기면 안 되니 마차 를 점검하거라,좀 더 번쩍번쩍 하게 닦아라,말을 장식해야겠으 니 한번 보자꾸나,이 장식은 별로다,다시 다 다른 것으로 바꿔 라.
그런 식으로 괜히 시간만 버릴 것이다.
평화를 가져온 결혼인데 소홀할 수 없지一라는 이유로.
그렇게 온 마차는 황금 마차에 비해 훨씬 볼품없을 것이다. 당연히 비교가 되겠지.
불길한 사고에 이어 마차까지 더 안 좋은 것으로 바꿔 탔으니 입방아를 찧어 대는 귀족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웨딩 퍼레이드를 중단하는 것보다는 기다리고 싶어.”
이 사람들이 이렇게 응원하는 데,포기하지 않는데 자신이 먼 저 두 손을 들고 싶지 않았다.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어 타 르칸을 올려다봤다.
곧바로 빛나는 금안과 눈이 마 주친다.
“그래도 돼?”
“아니.”
단호한 부정에 아리스티네의 눈빛이 흔들렸다.
타르칸은 그걸 반쯤 유쾌하게 바라봤다.
항상 아리스티네가 그를 당황 시켰던 것과 달리,이제 그가 그녀를 당황시킬 차례였다.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안은 팔을 한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 * *
“디오나 님,그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이요?”
디오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타르칸 전하와 황녀의 웨딩 퍼레이드요! 마차가 뒤집혀서 중단될 위기래요!”
“어머나,저런……”
디오나는 살짝 놀란 얼굴로 입 가를 손으로 가렸다.
“두 분 전하께서 다치시진 않았대요? 혹시라도 구경하던 사람들은……”
“천만다행히 아무도 다치진 않았대요.”
“그래요? 그것 참一.”
‘아쉽네.’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디오나는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네요.”
부상자가 없다는 말은 진즉에 들었지만,혼란 속에서는 정보가 부정확할 수도 있는 법이다.
디오나는 아리스티네가 커다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예쁜 얼굴이 바닥에 갈리면 더 예뻐질 텐데.’
안타까웠다.
‘하다못해 구경꾼이라도 다쳤으면…….”
평화를 위한 결혼인데 피를 보다니.
흉하고 불길하다고 아리스티네를 압박할 수 있었을 거다.
이 결혼이 특별한 만큼 더 역 풍을 맞았을 텐데,아까웠다.
“듣자 하니 타르칸 전하께서 상황을 잘 수습하셨대요. 역시 타르칸 전하셔요.”
“역시 전하께선 대단하세요.”
디오나는 속마음은 하나도 내 비치지 않은 채,영애를 따라 웃었다.
시간이 지나도 누가 다쳤다는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는 걸 보 니 정말 사실인 듯했다.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걸로 이 결혼식은 망했어.’
웨딩 퍼레이드를 완주하는 것 은 일생을 부부가 함께한다는 의미.
이게 깨졌으니 파급력이 클 것이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저는 조금 잘됐다고 생각해요.”
영애가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물론 디오나는 영애가 이런 말을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전혀 모르는 척,이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됐다고요?”
“아, 저,오해하시진 마시고요. 사람이 다치진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누가 다쳤다면 당연히 안 그러죠.”
황급히 손을 내저은 영애가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냥 이걸로 황녀의 결혼식이 망한 거잖아요. 황녀가 일부러 신부 대기실에 디오나 님을 불러내서 약 올렸던 것을 생각하면……”
영애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결혼식이 망한 건 자업자득이죠”
“영애……”
“디오나 님은 황녀가 외로워서 그러는 거라고 하셨지만, 정말 그렇겠어요? 뻔하죠
영애는 입을 삐죽거렸다.
사실 결혼식 때 입장하는 황녀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제정신이 들었다.
저런 천사같은 얼굴로 뒤로 그렇게 더러운 수작을 부렸구나 싶어서 너무 괘씸했다.
그녀 자신이 한순간 홀렸기에 더더욱 밉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사람들이 완벽한 결혼식이라며 감동까지 하니…….
‘다들 저 못된 황녀에게 속고 있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자신이 이럴진대 똑같이 하객 석에 앉아 있는 디오나는 오죽 할까.
‘타르칸 전하의 연인은 디오나 님인데……’
미소 지은 채 박수를 치고 있는 디오나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시렸다.
‘저렇게 착한 분이니 황녀가 조롱한 것도 모르고 오히려 감싸 주지.’
그런 생각에 더더욱 디오나를 응원해 주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아무도 몰라도 하늘은 안다고,그 황녀에게 천벌이 내린 것이다.
“아무튼 새 마차로 갈아탈 생각이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게 잘 되겠어요?”
영애가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안 될 이유가 있나요? 황금 마차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지만, 다른 의전용 마차가 많을 텐데요. 그 마차도 모두 멋진 마차고요.”
디오나는 악의라곤 하나도 없 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그야 마차는 충분하죠.”
“하지만 왕후께서 가만히 계시겠난 말이에요.”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폐하 께서 나서시면 겨우 보내 주시겠죠”
영애가 피식 웃었다.
“그때가 되면 구경꾼들도 시들 시들해지지 않겠어요? 거기다 퍼레이드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있는 신랑 신부라니.”
이 결혼을 축하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식기 충분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갈지도 모르 겠어요. 그건 그거대로 고소하네요.”
영애가 깔깔깔 웃었다.
디오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 며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말리진 않았다.
다만 걱정스레 입가를 가릴 뿐.
영애의 말대로 생각만 해도 고소했다. 직접 보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어디 망신 한번 제대로 당해 봐.’
가린 손 아래로 비틀린 미소가 비죽 솟았다.
* * *
삐이 이익!
휘파람이라기엔 날카로운 소리였다.
높게 울리는 소리에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휘파람?’
꼭 무언가를 부르는 듯한 소리였다.
‘아, 설마.’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땅이 울렸다.
조금 더 지나자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그 후에야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마수?’
아리스티네는 흠칫 놀라 타르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태연한 타르칸과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수의 정체는 흑마였다.
몸체가 워낙 큰 데다가 착용하고 있는 마갑 탓에 멀리서 보면 마수처럼 보였다.
‘실바누스의 마갑하고는 완전히 달라서 몰랐어……’
실바누스는 몸체 전반을 감싸는 은빛 마갑을 사용했다.
아이루고는 그와 달리 마수의 가죽과 금속을 이용해 급소 부위를 중점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원에서의 기동성을 더 우선시한 것 같았다.
미간의 화려한 방어구와 머리 양옆에 매단 양각(羊角)같이 생긴 거대한 뿔 때문에,말이라기 보단 우아하고 위험한 고등 마수처럼 보였다.
그것도 멀리 있음에도 그 위풍 당당한 풍채가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군마이니 아리스티네의 착각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리가 내 키만 할 것 같은 데.’
실바누스의 말과는 전혀 다른 품종인 듯했다.
“네 말이야?”
“그래.”
말을 바라보는 타르칸의 눈에 는 자긍심과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생각을 바로 깨달았다.
확실히,이런 식으로 왕후의 방해 없이 말을 부를 수 있다면 말을 타고 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 말 탈 줄 모르는데.”
타르칸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것도 모르나싶었지만 아리스티네가 유폐당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황녀임에도 그 당연한 교육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알아.”
그가 그녀의 옆에 있으니.
타르칸은 한쪽 팔로 아리스티네를 꽉 끌어안은 채 남은 손으로 말에 올라탔다.
그가 몸의 탄력을 이용해 훌쩍 도약하자 한쪽 어깨에만 고정된 망토가 무겁게 나부꼈다.
주인의 거친 탑승에 놀랐을 텐데도 군마는 얌전히 서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말 위에 옆으로 앉아 신기한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엄청 높아!’
마차를 탔을 때보다 시야가 너 높았다.
그러나 떨어질까 봐 무섭진 않았다. 뒤에서 타르칸이 꽉 안아 주고 있으니까.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