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리스티네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슬쩍 내려 말을 만졌다.
짧고 매끄러운 털의 감촉과 그 너머의 피부가 느껴졌다. 따끈따끈하고 단단했다.
‘말은 이런 촉감이구나.’
또 하나 직접 알게 된 게 생겼다.
“나 말 타는 거 처음이야.”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하나 더.
“이 녀석도 나 외의 다른 사람을 태우는 건 처음일걸.”
그렇게 말한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허리가 너무 가늘어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떨어지면 안 되니까.
“꽉 잡아. 위험하니까.”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이곤 타르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품 안의 몸이 홈칫 굳어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좀 떨어져.”
“꽉 잡으라며?”
“....살짝 잡아.”
타르칸은 최대한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지금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모습이 보일지 예상 가능했기때문이다.
아리스티네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청초한 디자인이었지만,그래도 가슴 부분이 꽤 파여 있었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촉감으로 여실히 느껴졌다.
아리스티네는 말 위에 옆으로 앉은 채 타르칸을 꽉 끌어안고 있어 필연적으로 몸이 닿을 수 밖에 없었다.
작고 가늘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뭉클한 감촉에 타르칸은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아리스티네는 의아했다.
말을 처음 타다 보니 무언가 실수했을 수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허리를 세우며 몸을 이동시키는데 一.
‘아……!’
안장 위에서 아리스티네의 몸이 휘청 미끄러졌다.
타르칸은 깜짝 놀라 재빨리 그 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품었다.
아리스티네는 반사적으로 그에 게 딱 달라붙었다.
타르칸은 아리스티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여자였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높이를 가늠한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에게 물었다.
“떨어지면 아프겠지?”
“그렇겠지.”
아픈 건 익숙하지만,그래도 싫었다.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돼?”
타르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서,아리스티네는 조금 시무룩한 기분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타르칸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그녀를 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리스티네가 그의 품에 폭 안 길 정도로.
아리스티네는 빙그레 웃곤 그 의 품에 몸을 기댔다.
떨어지지 않도록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다그닥,다그닥.
거대한 흑마가 무거우면서도 경쾌한 발굽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웨딩 퍼레이드 길을 행진했다.
* * *
사람들은 꿈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을 바라봤다.
그들은 타르칸이 망토를 휘날리며 군마에 오를 때부터 입을 떡 벌린 채 감상 중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공주님과 그녀를 구하는 흑기사가 이럴까?
유치하고 민망한 생각이라고 느끼면서도,사람들은 어쩐지 베 갯맡에 동화책을 끼워 두고 잠 들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들은 사랑의 시련을 이겨 낸 두 연인을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
웨딩 퍼레이드 길이 쭉 이어지며 사정을 모른 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아리스티네와 타르 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가웃 했다.
왜 마차가 아니라 군마에 탄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알 수 없지만.
“잘 어울려……”
시각적인 효과는 대단했다.
모두가 염원했던 평화의 시작 에 걸맞은 특별한 웨딩 퍼레이드였다.
아이루고의 군신이자 수호자의 품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황녀.
심지어 거대한 군마의 위라 마차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잘 보였다.
“요정이 우리나라에 왔어……”
“평화의 요정인가 봐.”
“자그마해,소중해,최고야.”
두 사람의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어 더 흡족했다.
정략혼이라는 게 어떤 건지 다 알지만,그래도 왕가를 모시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사랑이 가득 한 결혼이길 바라는 법이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그리고 호외를 통해 퍼진 결혼식 해프닝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 들끓게 했다.
“식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시더니 웃으면서 손을 흔드셨대. 이 사 진 좀 봐.”
“실바누스의 황녀라서 거만하게 콧대 세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으시고……”
위압적인 타르칸과 달리 친근한 모습에 사람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오히려 균형이 맞는다.
“이게 내가 아까 말한 그 장면 이야. 마차가 기울고 말이 난리를 치는데 우리 전하께서 황녀님 구하신 거. 벌써 호외로 나왔네.”
“아,사진으로 보니까 너무 좋다.. ”
“이 위험천만한 순간에 몸을 던져 황녀님을 구하시다니……”
“하아,불꽃같은 사랑이야.”
아리스티네를 안은 채 검을 빼 든 타르칸의 사진을 보던 소녀가 두 뺨을 감싸며 몽롱한 표정 을 지었다.
“황녀님께서 다치실 뻔한 게 마음 쓰이셨나 봐. 품에서 내려 놓질 않으시네.”
“말에 오를 때도 보통은 먼저 황녀님을 태우고 난 뒤에 탈 텐데 함께 타고.”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사진만 보면 너무 멋지긴 한데.”
“타르칸 전하니까 가능하신 거지. 두 분의 체격 차가 꽤 나기도 하고.”
수다를 멸던 사람들이 다시금 기사로 시선을 던졌다.
펄럭이는 망토 너머로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끌어안은 채 말 위에 올라타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런 사진을 순간 포착한 기자에겐 상을 줘야 해.”
“올해의 기자상감이야.”
호외가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가 단순히 국혼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다들 가슴속에 사진 하나씩은 품고 집에 돌아갈 것만 같은 예감.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물었다.
“……이거 내 남친은 불가능하겠지?”
“응.”
단호한 대답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숙연해졌다.
Chapter 10. 손만 잡고 잘게. 누나 믿지?
“뭐라!”
궁인의 보고를 받은 왕후는 테이블을 광,내리쳤다.
“타르칸 그것이 무사히 웨딩 퍼레이드를 마쳤다니!”
부러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시간을 질질 끌어 마차를 보내지 않았건만.
완전히 헛수고였다.
오히려 왕의 눈총만 사게 됐다.
“하여간 워낙에 천박한 잡초이다 보니 생명력이 질겨 쉽게 죽지 않는군요.”
왕후의 아비,스키엘라 공작이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하! 말을 탔다니! 웨딩 퍼레이드에 살육할 때나 쓰는 군마를 타는 자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것도 평화를 위한 결혼인데 군마는 어울리지 않죠.”
“그래, 공작의 말대로입니다. 백성들의 반응도 좋을 리 없죠. 그렇게나 평화를 원했는데. 그렇지 않으냐?”
왕후가 보고하던 궁인에게 물 었다.
말이 물음이지,사실상 그렇다고 답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면 고하는 대로 역정을 낼 것이다.
숨을 삼킨 궁인이 납작 엎드렸다.
“황송합니다,왕후 폐하.”
그 대답에 왕후의 눈매가 올라갔다.
“그게…… 반응은 마차를 탔을 때보다 더 좋습니다. 그냥 나란히 마차에 앉아 있는 것보다 함 께 말 위에……”
챙그랑一!
왕후가 던진 찻잔이 자수정을 사선으로 박아 넣어 장식한 기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왕후 폐하!”
“폐하,심기를 가라앉히소서.”
궁인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백성들은 원래 무지한 법 아닙니까.”
“폐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면 바로 중심을 잡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론을 조작하라는 것이었다.
군중 속에서 말은 쉽게 퍼져나간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어떤 쪽으 로 퍼트릴지 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왕후 는 진정하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여론이라....’
잠시 생각하던 스키엘라 공작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타르칸의 군마는 꽤 상징적인 말입니다. 일반적인 군마와 똑같이 엮으면 외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스키엘라 공작의 말대로였다.
타르칸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만큼,언제나 그와 함께 싸우는 말 역시도 전설적인 존재로 취급받았다.
그런 존재에게 살육이니,평화를 깨트리니,하는 꼬리표를 붙인다고 해서 사람들이 호응할까?
백성은 무지하다고 했지만,그렇다고 그들이 바보인 건 아니었다.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생기면 의심할 것이다.
“……그렇겠죠.”
왕후도 동의하는 바였다.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괜히 꼬투리 잡아 타르칸을 힐난했지만,군마를 탄 게 욕먹을 일이 될 순 없었다.
전사의 나라인 아이루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사의 검.
그다음으로 귀히 여기는 것은 단연 전사의 군마다.
“애초에 군마를 보고 살육이니, 뭐니 하며 나쁘게 말할 순 없으니까요.”
“예, 심지어 타르칸 그 천것은 말을 타고 마수를 토벌했으 니……”
타르칸과 함께 마수를 토벌한 군마.
‘오히려 아이루고에 평화를 가져온 수호의 존재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을 터.’
왕후가 분통을 터트렸다.
“천하에 다시없을 기회라고 생각했거늘!”
더 수를 쓸 방법이 없다.
오늘 결혼식은 안 그래도 백성 들 사이에 인기가 드높던 타르 칸의 위치를 한층 더 격상시켰다.
“백성들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귀족들도 꽤 솔깃한 모양입니다.”
“실바누스 황녀와의 정략혼이 결정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흔들리는 자들은 거의 없었는데”
“그런다고 타르칸의 피가 고결 해지겠냐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죠.”
아부기가 섞인 말이긴 했으나, 실제로 그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타르칸이 왕에게 예쁨 받고 국민적인 인기를 끌어도, 귀족들은 그래 봤자라고 코웃음을 쳤다.
결국 왕위에 오를 사람은 하미르일 거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평민 어미를 둔 타르칸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지 않아 했고,무엇보다一.
‘타르칸 본인이 정치를 너무 못했기 때문이지.’
백성의 인기를 등에 업고 하미르를 압박하거나,왕의 총애를 미끼로 제 입지를 다졌어야 한다.
하지만 타르칸은 그러지 않았다.
연회에서 다른 왕족이 화려한 언변으로 그를 조롱할 때도 위압감만 내뿜으며 상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정치•사교적인 기량을 발휘해 상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다들 타르칸은 정치를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못 박았다.
‘그랬는데,변했어.’
정치에는 한없이 무능하다고 깔봤던 타르칸이 황녀가 말석에 앉게 될 위기에 처하자 앞으로 나서 그녀를 비호했다.
왕후와 귀족들의 예상과 달리, 타르칸의 언변은 유창하고 거침없었다.
정치적인 언사로 왕후를 압박 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타르칸이 그간 정치를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거기에 황녀까지.’
타르칸의 비가 될 황녀는 혈통 뿐만 아니라 정치력 또한 남달랐다.
그야말로 범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격이다.
그날,귀족들은 타르칸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후 오늘,완벽하다는 말조 차 부족한 결혼식을 치렀으니—.
신랑 신부가 식장 밖으로 나가고,홀 안에 있던 사람들은 삼삼 오오 모여 결혼식이 어땠는지 활기차게 떠들었다.
왕위 다툼에 낄 수도 없는 하 급 귀족들은 그렇다치고,꽤 세 가 있는 귀족들까지도!
“귀족 놈들,전엔 그랬으면서 오늘 결혼식에선 싹 태도를 바꿔선……”
황홀한 둣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을 바라보던 귀족들의 모습이 떠올라 분통이 터졌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떻게 그 천출의 결혼식을 두고 그리 감격할 수 있는지!”
“이 결혼식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모르는 자들도 아니고! 훼방을 놓긴커녕 칭찬을 하다니....”
“아무리 우리 파벌에 속해 있지 않은 자들이라고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인원이 많을수록 공적을 나눠 먹어야 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왕후파는 한정적인 구성 원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파벌 쪽에서 손바 닥을 비비며 자신들은 하미르를 지지하니 잘 좀 봐 달라고 말해 왔으니까.
“설마 이 결혼식으로 타르칸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감히 하미르 전하와 그 천출을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전엔 우리 뒤꽁무니나 쫓아 다니던 것들이 주제도 모르 고……”
“고작 그딴 가문에서 우리와 타르칸을 놓고 저울질을 하다 니!”
왕후와 공작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씨근덕거렸다.
사실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왕후 폐하,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스키엘라 공작이 무거운 표정 으로 물었다.
“섣부르게 움직일 순 없어요. 마차를 새로 보내려는 것을 막은 것 때문에 아무래도 폐하께 서……”
“말씀은 안 하시지만 주시하고 계시겠죠.”
왕후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타르칸의 위기라고 생각했건만 저쪽은 이득을 보고 이쪽은 마이너스가 됐다.
완벽한 패배였다.
“어마마마!”
그때,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예니카리나였다.
“이 신문 보셨어요?”
하얗게 질린 예니카리나가 들고 온 것은 석간신문이었다.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의 키스 장면이 실려 있었다.
“여기 이 기사 좀 읽어 보세 요! 세상에,그 반편이 황녀가 아이루고의 희망이라니! 평화를 가져온 천사라니!”
흥분한 예니카리나가 길길이 날뛰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쓸 수 있죠? 예니카야말로 이 나라의 기쁨이자 희망이자 행복인데!”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