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예니카리나는 자신이 백성들에 게 가장 사랑받는 공주라는 것에 엄청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말이 하나라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니 이렇게 화가 날 수 없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천더기 황녀에게!’
“할아버지! 예니카 너무 속상 해요! 천사는 예니카란 말이에요!”
예니카리나가 울상을 지으며 스키엘라 공작에게 매달렸다.
“당연히 우리 공주님이야말로 천사시지요.”
“그런데 이 반편이보고 희망의 천사라고 하잖아요!”
“그딴 모자란 황녀보다 우리 공주님이야말로 이 나라, 아니, 이 세계의 희망이시니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스키엘라 공작이 예니카리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건 예니카도 알아요. 하지 만 이런 기사가 나니까……. 사람들이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계속되는 예니카리나의 투정에 스키엘라 공작이 너털웃음을 터 트렸다.
“걱정 마세요,공주 전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둣이 예니 카리나의 눈이 기대감을 품고 반짝였다.
과연 자신의 조부는 기대에 걸 맞은 답을 내놓았다.
“이 할아비가 곧 이 일간지 사장을 만나 볼 테니.”
“정말이어요?”
예니카리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스키엘라 공작을 향해 팔을 벌렸다.
“너무 좋아요,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최고예요!”
스키엘라 공작은 성인이 되었는데도 아직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귀여운 손녀딸의 모습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왕후가 미간 을 살짝 찌푸리며 스키엘라 공작을 불렀다.
“아버지.”
“걱정 마십시오,왕후 폐하. 이 아비가 어떤 사람입니까.”
스키엘라 공작이 예니카리나를 토닥이며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주시하고 계실 거라는 건 잘 압니다. 사장에게 그 천출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책잡히는 일을 만드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덜미가 잡히면 운신의 폭이 좁아지니까.
“하지만 우리 예니카리나 공주님께서 얼마나 착하고 사랑스러운지,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말 할 수는 있지요.”
스키엘라 공작이 예니카리나를 왕후에게 보여 주듯이 자랑스레 내밀었다.
“그 정도는 폐하께서도 신경 쓰실 일이 아니지요. 자기 딸을 자랑해 주는 건데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그 말에 왕후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긴,우리 예니카에 대한 국왕 폐하의 사랑은 남다르시니까요.”
예니카리나는 헤헤 웃으며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후의 말대로 부왕의 사랑은 당연히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
그 모지리를 대하던 부왕의 태도가 떠올라 가슴속에서 불이 확 일었다.
‘아니야,아니야. 예니카는 특별해.’
아이루고 왕의 병증을 알면서도 그걸 이용하지 않고,비밀을 지키며 감싸 주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
그런 이상 부왕의 총애는 영원히 자신의 것이었다.
‘그래,환영 연회 때에도 부왕 께선 예니카의 편을 들어 주셨잖아.’
그 못된 황녀가 감히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자 부왕께서 나서 주셨다.
가장 사랑하는 딸이 그런 모진 핍박을 받는 걸 눈앞에서 보고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그 후 부왕이 황녀에게 예니카리나보다 한 단 더 높은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은 애써 무시했다.
그건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앉으라고 한 것뿐이니까.
그때 부왕께서도 그러시지 않았던가.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예니카리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모습을 본 스키엘라 공작이 예니카리나의 어깨를 다독였다.
새 신부로서 화려하게 치장한 황녀가 신문에 실린 것이 아직도 신경 쓰이나 싶었다.
“우리 공주님 새 드레스를 사 드릴까요? 아름다운 공주님께 어울리는 옷을 잔뜩 사 드리죠. 거기에 어울리는 모자와 장갑도.”
“치,할아버지도 참.”
예니카리나가 입을 귀엽게 비죽이더니 스키엘라 공작을 입지 않게 흘겨보았다.
“목걸이랑 귀걸이도요.”
작게 덧붙이는 손녀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 스키엘라 공 작의 입이 귀에 걸렸다.
“팔찌와 브로치,새 구두도 선물하지요.”
“역시 우리 할아버지예요!”
예니카리나가 공작의 목을 와 락 끌어안았다.
스키엘라 공작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런 예니카리나의 등을 토닥였다.
예니카리나에게서 우울한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아름답게 치장한 후,최고의 사진을 찍어 그것을 신문사에 돌리는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면 신문사는 그 사진을 받아 예니카리나 공주님이 단연 최고이시라는 찬사를 기사로 써 냈다.
왕국의 보석,왕국의 꽃,왕국 의 가장 빛나는 별,왕국의 종달 새 등등.
온갖 좋은 건 다 붙여 기사가 나왔다.
뿐만 아니라 피크닉에서 꽃향기를 맡는다거나,지나가다가 불 쌍한 거지 소녀에게 금품을 내 주었다는 소소한 일 역시 무조 건 사진을 찍어 기사로 내보냈다.
이건 여론 조작 같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 피크닉을 가 꽃향기를 맡았고,거지 소녀에게 금붙이 하나를 주었으니까.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런 거였 지만,어쨌든 결과는 같은 것 아닌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자신은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였으니 그걸 백성들에게 알리는 건 당연했다.
사랑스러운 자신 덕분에 왕가의 인기도 더 높아지고,백성들 역시 모시는 왕가에 대한 자긍심과 경애심이 더 커질 것이다.
‘정말,이렇게 예니카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잖아?’
예니카리나는 자신의 대단함에 탄복했다.
‘예니카야말로 평화의 천사야!’
“어서 쇼핑해요. 사진사도 부르고! 안 그래도 이번에 예니카 궁에 사진 찍기 딱 좋게 인테리어를 바꾼 방이 있어요!”
예니카리나가 신나서 조잘거렸다.
“우리 공주님은 이딴 황녀보다 훨씬 더 예쁘게 신문에 날 것입 니다.”
스키엘라 공작이 껄껄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탁탁 두드렸다.
“호호,맞아요. 우리 예니카는 내 딸이지만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니까요. 유폐당해 제대로 황족 취급도 못 받던 황녀보다 야……”
웃으며 신문으로 시선을 준 왕 후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아니라고 깔보려 해도,사진 속의 아리스티네는 정말 아름다웠다.
신문에는 오늘 결혼식 사진이 여러 장 실려 있었다.
본식의 사진부터 시작해 웨딩 퍼레이드까지.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아리스티네와 타르칸,마주 선 두 사람,맹세의 키스.
황금 마차에 오를 때의 에스코트,마차 위의 두 사람.
거기에 아리스티네를 구하는 모습과 안은 채 말을 타는 모습까지.
이게 신문인지 사진첩인지 모 를 정도로 다양한 사진들로 한 가득했다.
아무래도 기자가 사진을 고르다가 포기해 버리고 예쁜 건 많을수록 좋다는 심정을 다 실은 것 같았다.
“...........”
왕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신문사에 뛰어 들어가서 이딴 기사를 내면 어떻게 하냐고 먹살을 잡고 싶었다.
이 신문을 보고 백성들은 물론이고,귀족들까지 무슨 생각을 할지 뻔했다.
저번 환영 연회 때 귀족들은 꽤 동요했지만,오늘처럼 대놓고 타르칸과 아리스티네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진 않았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라고 당황한 탓도 있으나 태도를 변화 할 가시적인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결혼식은 아주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그 이유는 하나다.
‘그럴싸해 보였으니까!’
정말 별것 아닌 이유지만,오히려 그렇기에 굉장히 힘이 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때론 이성 과 논리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거나,왠지 아닐 것 같다거나 하는 굉장히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이유 때문에.
‘그럴싸하다’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이유지만,일단 그런 마음이 들게 되면 그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오늘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의 결혼식은 왕후가 보기에도 그럴 싸했다.
정말 평화를 위한 신성한 결혼식 같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사진들 속 부부의 모습도 하나같이,
그럴싸해 보였다.
* * *
“황,아니,비전하께서는 어쩜 이렇게 피부가 부드럽고 매끄러우세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피부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아요.”
궁인들이 아리스티네의 몸에 향유를 섞은 뽀얀 목욕물을 끼얹으며 감탄했다.
아리스티네는 노곤노곤하게 풀린 채 그들의 말을 대강 듣고 있었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냥 결혼식만 했어도 지쳤을텐데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체력이 바닥날 수밖에 없었다.
“실바누스인은 피부가 하얀 편이죠? 이런 것도 다 실바누스인 특징인가요?”
“얘도,참. 그럴 리 없잖아.”
픽 웃으며 그렇게 말한 궁인이 힐끗 바깥을 눈짓했다.
문이 닫혀 보이지 않지만 바깥 에는 실바누스에서 온 아리스티네의 시녀들이 있었다.
“쟤들도 피부가 희긴 하지만, 이렇게 투명하니 빛이 나는 둣한 느낌은 전혀 아니지.”
“맞아. 만져 보진 않았지만 이렇게 매끄러워 보이지도 않아.”
“하긴.”
실바누스인은 다 이러냐고 물어봤던 궁인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비전하가 최고세 요.”
“모시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이런 신부를 맞이하게 되어 타르칸 전하께서도 좋아하실 테지요.”
“으아,정말 두근거 려요.”
“걱정 마세요, 비전하. 저희가 완전 싹 다 준비해 놨거든요! 완벽하게!”
“정말 누가 봐도 로맨틱할 수 밖에 없게 꾸며 놨어요.”
“거기에 비전하께서 딱 누우시면! 모든 게 끝난 거나 마찬가지죠”
궁인들이 응흥흥흥 웃었다.
솟은 광대와 반달 모양으로 흰 눈매가 엉큼했다.
“후후후,침의도 엄청나게 고심 해서 골랐으니까 기대하세요.”
어머! 그건 비전하가 아니라 타르칸 전하께서 기대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꺄르록 까르르륵,궁인들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아주 음란꾸러기들이었다.
정작 아리스티네는 눈을 감은 채 멀어지는 정신을 애써 붙들고 있었다.
깜빡하면 잠들 것 같았다.
욕조 속에 푹 퍼져 있는 새 신부는 듣지도 않건만 저희끼리 신난 궁인들이 깍깍 서로를 찰 싹 때리며 난리를 쳤다.
그들은 이렇게 아름답고 현명한 왕자비 전하가 생겨 진심으 로 기뻤다.
칭송받는 왕자를 성심껏 모시는 궁인들은 모두 어서 그에 맞는 왕자비 전하가 오시길 바라는 법이다.
궁에 안주인이 있고 없고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솔직히 디오나 고 계집이 왕자비 전하가 되는 건 아닐까 불안했으니까.’
디오나를 좋아하는 궁인들도 꽤 많았지만,적어도 이들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녀들 역시 디오나를 좋아했다.
‘디오나의 본색을 보기 전까진, 말이지.’
우연찮게 알게 된 이후로 평소 디오나가 하는 짓을 보니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디오나는 순직한 유공 대장군의 여동생이자 백작 영애였고,자신들은 일개 궁인들이었다.
싫은 티를 낼 수 있을 리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디오나를 따르는 궁인들 말고 자신들이 아리스티네의 시중을 도맡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 실바누스에서 온 시녀들도 믿을 수 없으니까.’
본래 첫날밤을 위한 준비를 돕 는 것은 친정 시녀가 할 일이었다.
신부가 긴장을 풀고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시중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치 빠른 궁인들은 그 들이 아리스티네를 성심껏 모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작에 눈치 챘다.
아리스티네 역시 그들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도.
그래서 아이루고의 문물에 더 익숙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신들이 자진해서 첫날밤을 위한 시중을 맡았다.
“비전하,일어나세요.”
“이제 마사지를 받으셔야죠.”
반쯤 정신이 가물가물한 채 욕조에 기대있던 아리스티네가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궁인들은 왠지 뿌듯 했다.
첫날밤이라 정말 떨리실 텐데 자신들의 숙련된 시중으로 이렇게까지 긴장을 풀다니!
아리스티네가 자신들을 편히 생각하는 것 같아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그래요,비전하. 계속 그렇게 긴장을 푸세요.”
“몸을 이완시켜야 더 좋은 밤 이 될 테니까요.”
“아, 물론 숙면을 위해서요.”
“호호호호홋!”
음란꾸러기들이 또 꺄르르록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장미와 라일락,일랑일랑과 피오니,삼목과 머스크 그리고 엠버를 배합해 만든 향유를 아리스티네의 몸에 가득 부 었다.
이것도 평범한 향유를 우리 비전하 몸에 바를 순 없다고 직접 연구해 만든 것이었다.
첫날밤을 향한 궁인들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들은 아리스티네의 몸을 부 드립게 마사지하며 피로와 긴장을 풀어 주었다.
기분 좋은 손길에 아리스티네 는 만족스러운 신음을 홀렸다.
마차에서 떨어질 뻔한 것도 모 자라 말에서까지 떨어질 뻔했던 지라 근육이 많이 놀랐나 보다.
굳은 근육을 푸는 손길이 굉장히 시원했다.
‘왕자비는 이런 삶을 살 수 있 는 건가.’
첫날밤부터 너무너무 좋았다.
‘아,그럼 나도 이제 이 궁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거지?’
문득 든 생각에 아리스티네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원하는 때 티타임을 가져도 되는 걸까?’
두근두근,설렘에 심장이 떨려 왔다.
‘딸기 케이크…… 먹어 보고 싶은데,만들어 달라고 해도 되겠지?’
분명 될 것이다.
아리스티네는 이제 명실공히 타르칸의 아내니까.
갑자기 빠르게 뛰는 아리스티네의 심장에 궁인들은 “어머” 하 며 손길을 늦췄다.
혹시 불편하신가 싶어 비전하 의 안색을 살피니 기쁨과 설렘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확인한 궁인들에게도 기쁨과 설렘이 가득 퍼져 나갔다.
‘그래,그래. 좋으실 때지.’
‘얼마나 설레시겠어. 타르칸 전 하께서는 딱 봐도 몸이……’
‘후후후,우리 비전하 아주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을 보내시겠 네.’
정성 들여 신방을 준비한 보람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복해하는 동안 아리스티네 역시 행복했다.
‘마카롱이랑 자허토르테도 먹어 봐야지!’
자허토르테는 어렸을 때 여동 생이 먹는 것을 보고 항상 궁금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마카롱은 오라버니가 몰래 준 게 있었는데 맛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굉장히 맛있었다는 기억만 있을 뿐.
‘먹어 보면 기억나겠지?’
이제는 기억력이 좋으니 다시 는 잊지 않을 거다.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첫날밤 을 위한 준비가 전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자,비전하 팔을 들어 주세요.”
첫날밤을 위한 침의를 든 궁인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친절하 고 상냥한 미소였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그녀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우뚝 굳은 채 궁인의 손에 들린 망사 조각을 보았다.
항상 마이페이스인 그녀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옷이 아니었다.
구멍이 승승 뚫린 천 쪼가리였다.
‘저거…… 입을 수나 있는 건가?’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