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타르칸은 제 앞에 당당하게 내 밀어진 손을 바라봤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지.’
이제는 황당하다 못해 환장하겠다.
“괜찮아.”
타르칸에게서 반응이 없자 아리스티네가 그를 안심시키듯 눈을 마주쳤다.
“손만 잡고 자는 거야. 다른 덴 절대 안 건드릴게. 누나를 믿어.”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타르칸은 웬 놈팡이한테 유혹 당하는 처자가 된 기분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정반대여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 는가.
수작질(?)하는 아리스티네는 언제나 그렇듯 물망초처럼 청초하고 정결해 보였다.
대체 이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이 여자를 하나하나 다 파헤쳐 보고 싶다.
아리스티네가 여전히 반응 없는 타르칸을 보고 고개를 갸웃 했다.
“누나가 잘할게……?”
슬쩍 눈치를 보면서 확인하듯 말한다.
‘저건 또 무슨 뜻이지.’
대체 뭘 잘하겠다는 건지 모르 겠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끈,편두통이 올라왔다.
골이 울리는 기분에 타르칸은 이마를 짚었다.
대체 이 여자를 어쩌면 좋을까.
타르칸은 깊고 긴 한숨을 내쉬 었다.
수수께끼 같은 여자.
그는 일단 이해할 수 있는 부분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푹신푹신한 침대를 원한다고 말했던 건 푹신푹신한 데에서 자고 싶다는 뜻이었던 거지?”
다른 의미 하나 없이 말 그대 로 자는 것 말이다.
순수한 잠.
“응”
“나는 바닥에서 재우고.”
“응”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별 감정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왜 그러냐는 듯 타르칸을 바라본다.
“하.”
타르칸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대로 확인하니 더 황당했다.
그 누가 타르칸을 차고 딱딱한 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재울 생각을 하겠는가.
아무리 평민 어미를 두었다고 해도 타르칸은 왕의 직계였다.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악의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고귀한 혈통이라 천출인 타르칸을 업신여기느라 그러는 것 같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방어적으로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제 와서 나한테 바닥에서 자라고 하는 건 너 진짜 너무한 거야. 내가 푹신푹신한 거 좋다고 했을 땐 아무 말도 안 했으면서.”
“그렇게 침대가 좋아?”
어이가 없어서 한 물음이었다.
그런데 아리스티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나는 매일 밤 푹신푹신한 데에서 자 보고 싶었거든. 거기서 나오면 꼭 그렇게 할 거라고 다짐했어.”
깨끗이 씻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잘 마른 이불을 덮으며 하루를 마치고 싶었다.
그러면 행복한 마무리가 될 것 같아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든지 마지막 기억은 행복하게 남을 테니까.
“...........”
타르칸은 풀썩 침대 위에 앉았다.
과연 푹신푹신함이 남다른 침대였다.
그 어떤 충격도 그대로 흡수할 것만 같았다.
아리스티네의 말을 들으니 그녀가 유폐당했을 때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됐다.
그래도 보통은 남편을 바닥에서 재우지 않는다고.
그것도 신혼 첫날밤부터……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마치,그가 그녀와 함께 자고 싶다는 것 같지 않은가.
아리스티네가 같이 자는 건 생 각조차 하지 않고,따로 잘 생각 만 하는 게 아쉬운 것처럼.
‘아니야,아니야.’
전혀 아니다.
그저 황당함에 상식을 들먹인 거지 절대 그런 뜻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와의 초야를 어떻게 무사히 넘길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
다시 생각하니 쪽팔렸다.
정작 아리스티네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그 혼자 그녀가 자신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온갖 걱정을 다 한 것 아닌가.
완전히 그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건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여자들이 타르칸과의 잠자리를 원했으니까.
‘이 여자가 몰라서 다행이다.’
타르칸은 알 수 없는 아리스티네의 표정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렇게 창피한데 알았다면…….
타르칸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보통은 신혼 초야에 남편을 바닥에서 재우지 않지. 나 도 알아. 그렇지만 우린 다르잖아?”
아리스티네가 어깨를 으쏙였다.
너랑 나는 사업적 관계일 뿐, 그 외에 다른 건 하나도 없어.
딱 선을 긋는 태도에 타르칸의 입매가 굳었다.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혼인이 완성되는 건 아니야. 그리고 정략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一.”
“아이지. 두 가문의 피를 모두 이어받은.”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타르칸은 눈가를 찌푸렸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이제는 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알고 있다면……
“타르칸, 너 나랑 하고 싶어?”
툭,떨어지는 질문에 타르칸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이,이,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럴 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타르칸의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그럼 됐다는 둣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야.”
사과가 맛있다는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아주 여상한 태도였다.
아리스티네의 보랏빛 눈동자가 타르칸의 금안과 똑바로 마주쳤다.
“나도 너랑 하기 싫어.”
타르칸은 입술을 벌렸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다시 닫힌다.
아리스티네는 아직 이불 위에 남아 있는 장미 꽃잎을 그러모아 흑,바람을 불었다.
팔랑팔랑, 연한 꽃잎이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야 아리스티네도 정략혼에서 아이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그렇지만 이혼할 거니까.’
약속대로 타르칸을 왕으로 만든 후,아리스티네는 자유를 찾 아 이 왕궁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회사를 들어가더라도 퇴사할 거 미리 밝히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경력만 쌓으면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길 생각 만만이어도 면접 볼 땐 평생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하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타르칸이 나쁘지 않은 파트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혼할 생각임을 밝히면 자신의 행동에 제한을 둘지도 모른다.
‘당장은 아니어도 나중에 상황이 변하면 견제할 수 있지.’
아리스티네는 여행을 위한 자금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 생각이었다.
분명 일정 수준 이상으로 사업이 성장하면 견제가 들어올 것이다.
타르칸은 정치 감각이 있는 사 람이었다. 그러니 견제를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아리스티네는 미소 지으며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서로 원하지 않으니까,그럼 딱히 할 이유가 없지.”
맞는 말이다.
그런데 타르칸은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그를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난 별로 하고 싶지 않긴 해도,네가 저어어엉 하고 싶다면一.”
“하기 싫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타르칸이 짓씹듯이 내뱉었다. 아리스티네가 생긋 웃었다.
“그럼 됐네.”
깔끔한 태도였다.
그녀의 말대로라고 생각하면서도 타르칸은 어딘지 찜찜한 기 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로 된 건가? 그걸로?
‘아니,안 될 이유가 뭐지.’
오히려 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처음부터 아리스티네와 잘 생각이 없었으니까.
어쩐지 석연찮아 보이는 타르 칸을 본 아리스티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뭐, 아이가 중요하다고는 하지”
장미 꽃잎을 살살 매만지던 아리스티네는 지나가듯 물었다.
“너에겐 마음에 둔 여자가 따 로 있잖아?”
오늘 낮,신부 대기실에 찾아온 디오나는 대놓고 타르칸과 연인 사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정확하게 확인해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힐끔 타르칸의 안색을 살피자 금안이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졌다.
“……어떻게 알았지?”
과연.
아리스티네는 생긋 웃었다.
“보면 알지.”
타르칸은 그늘 한 점 없이 웃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아리스티네가 자신이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처음부터 이 결혼에 감정 따위 집어넣지 말자고 했으니까.
이걸로 더욱더 확실해진 거다.
‘이렇게……’
타르칸은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았다.
“타르칸,걱정할 필요 없어. 나는 다 이해해.”
아리스티네가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타르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정략혼을 한 거잖아?”
조곤조곤하고 상냥한 어조였다.
“아이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해 도 돼. 네 연인에게 순결을 지켜야지.”
“그녀는 내 연인이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부정하려던 타르칸이 멈칫했다.
갑자기 나타나 한순간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고 사라졌던 아이.
타르칸은 그 아이에게 제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연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왜 부정하고 있지?’
아리스티네에게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면 내버려 두는 편이 서로에게
계속 그를 남의 남자라고 생각 하면 절대 이성으로 보지 않을 테니까.
“네 연인이?”
“내 연인이다.”
타르칸은 딱 잘라 단언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까?
아직 그녀를 찾지도,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는데,감히 연인이라고 말하는 자신이 웃겨서?
“그래,그러니까 연인에게 잘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티네를 보니 더더욱 짜증이 났다.
그런 그의 상태를 모르는지, 아리스티네가 은근슬쩍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있지, 타르칸.”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기 대와 바람을 담고 있었다.
“네가 잘하면 정궁 자리를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수도 있어.”
“뭐?”
“아이루고는 기본적으로 일부 일처제지만,왕은 다르잖아?”
먼 옛날,아이루고는 본디 일부다처제 였다. 마수에 둘러싸인 위험 지역이다 보니 남녀의 성비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세상이 발전하며 마수의 침입을 국경에서 막고 주기적으로 마수를 토벌한 덕에 성비의 균형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현대로 오며 점차 일부 일처제가 자리 잡혔다.
단 하나 예외가 있는데,바로 왕의 혼사였다.
정치적인 정략혼 때문에 왕후 외의 후궁을 그대로 두게 된 것이다.
“나중에 네가 왕위에 오르면 왕후는 당연히 왕자비인 내가 되겠지.”
네가 좋아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타르칸은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스티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딱히 왕후 자리에 욕심은 없으니까 그때 다른 사람한테 양보할 수 있어.”
‘그리고 이혼해서 여기를 나갈 거야.’
아리스티네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뭐,라고……?”
“네 연인이 왕후가 되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러니까,내 말은....”
아리스티네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처음 타르칸과 협상을 할 때처럼,그가 그녀의 제안을 거부할 리 없다는 듯이.
“얼마든지 이에 관해선 추가 협상 가능하단 소리야.”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아리스티네를 보고 타르칸은 가 슴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짜증이 난다.
그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쳐졌다.
“그것참 기대되는군. 그 말 잊지 말도록 해.”
“그럼. 당연하지!”
활짝 웃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니 더 심사가 뒤틀렸다.
타르칸은 이불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침대 위에 남아 있던 장미 꽃잎이 와르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는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침대에 누웠다.
아리스티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그녀의 옆에 누운 것이었지만.
아리스티네가 일으켰던 몸을 다시 누이자,비좁은 침대 탓에 팔이 맞닿았다.
그 보드라우면서 뜨겁고 연한 감촉에 타르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몸이 저절로 벳뻣하게 굳는다.
이건 여자의 옆에 누워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다.
“아,맞다. 근데 우리 남들 눈 에는 초야를 치른 거처럼 보여야 하잖아.”
바로 옆에 누운 아리스티네가 그를 보며 말했다.
따끈한 숨결이 파도처럼 귓가 에 닿았다.
타르칸의 손가락이 움찔,떨렸다.
“피를 내는 게 좋을까?”
“……아이루고에선 신부의 순 결에 대해 집착하지 않아. 또, 처음이라고 무작정 피가 나는 것도 아니고.”
“흐음, 그건 경험?”
“콜록!”
타르칸이 성대한 기침을 터트렸다.
아리스티네는 기겁해서 그를 바라봤다.
그녀 쪽을 보지 않으려던 결심 은 어디로 간 건지,타르칸이 반 쯤 몸을 일으키며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얼굴이 새빨간 데다가 눈가엔 눈물마저 살짝 맺혀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그의 얼굴을 빤 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근데 우리 금슬이 좋아 보여야 하잖아.”
평화를 위한 결혼이니 두 사람 의 사이가 좋을수록 정치력이 생긴다.
왕궁 내에서 아리스티네의 입지도,핏줄을 약점으로 잡힌 타르칸의 입지도 나아지고.
그게 아니었다면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을 바닥에서 재울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거다.
진작 침대를 하나 더 준비하라고 했지.
“혹시 침대 부숴 본 적 있어?”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