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지,지금 무슨 짓을……!”
창백하게 질린 브로디가 항변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사들의 달걀이 우지끈 깨진 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어쩜 이렇게 사람이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브로디는 질색한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아리스티네는 브로디를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달걀 먹는 건데?”
달걀 먹는 사람 처음 보냐는 어투였다.
“그,그 달걀이……”
“달걀이?”
“그게, 깨진……”
“그럼 달걀을 깨트려 먹지 너는 껍질째 먹어?”
다른 누구도 아닌,정신이 이상하다며 무시하던 황녀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니 억울했다.
수치심에 브로디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뭐라 할 수 없었다.
‘설마…… 진짜 어제 일어난 일을 모르고 그런 건가?’
당연히 기사들의 소식을 듣고 일부러 모욕감을 주기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됐잖아?’
브로디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한낮이 될 때까지 게으름 피우느라 자신의 기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시나 보군요.”
브로디가 뭐라고 하든 아리스티네는 홀려들으며 달걀을 탁탁 두들겼다.
껍질의 금이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
파삭,파사사삭.
그걸 바라보는 브로디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황녀님!”
은제 스푼이 부드러운 달걀을 갈랐다.
한 입 떠서 남,하고 맛있게 먹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브로디는 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지금 기사님들의 상황을 알고서 그러는 겁니까?! 그게 입에 넘어가요?”
그 말에 아리스티네는 꿀끽, 하고 입 안에 든 달걀을 넘겼다.
신선한 달걀은 고소하고 부드러워 굉장히 맛있었다.
간도 알맞게 배어 있는 데다가 노른자는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만 익어 퍽픽하지도 않았다.
“잘 넘어가는데? 이거 맛있어.”
여상한 대답에 브로디의 입술 이 푸들푸들 떨렸다.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데 대 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스푼을 핑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러는데.”
브로디는 차마 거기에다 대고 기사들의 달걀이 깨져 버렸다고 말할 순 없었다.
어떤 식으로 포장해도 고귀한 레이디인 자신의 입에서 나오기엔 상스러운 언사였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아이루고의 전사들이 일을 쳤어요. 우리 기사님들이 크게 다쳤다고......”
“아,겨우 그거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거야?”
“겨우 그거 때문이라뇨?! 기사님들은 황녀님을 성심성의껏 모시는 자들이니,당연히 황녀님이 챙기셔야죠.”
한 번만 더 성심성의껏 모셨다가는 성범죄자가 될 판이었다.
아리스티네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검지와 엄지로 스푼을 돌렸다.
스푼의 배에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가 사라지길 반복 한다.
“보모가 되어 달라는 말은 저 번에 거절했던 거 같은데.”
“뭐라고요?”
“그러니까,지금 나한테 기사들이 맞았으니까 가서 상대방 좀 혼내 달라고 하는 거잖아.”
브로디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니 자신이 굉장히 유치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그거야 기사님들은 황녀님을 모시는 자들이니까 당연히 황녀님께 우선……”
“그래,걔들이 날 모시는 거야. 내가 걔들을 모시는 게 아니라.”
무심한 눈으로 스푼이 돌아가 는 것만 바라보고 있던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들어 브로디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브로디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서인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 브로디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식당 안에 있는 궁인들이 모두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리스티네의 이야기에 꺄르록 웃음을 터트리던 음란꾸러기들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얼굴이었다.
“누가 감히 비전하께서 식사하시는데 노크도 없이 함부로 문을 여는가,싶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아이루고의 궁인들이 너도나도 입을 열었다.
“가장 주인을 생각해야 할 친정 시녀라는 자가 가장 주인을 공경할 줄 모르는군요.”
“기본적인 예법도 모를 정도니 공경하는 법도 모를 수밖에요.”
“지,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예요?!”
브로디가 얼굴을 붉히며 궁인들에게 따졌다.
“여기 영애 말고 누가 있지요?”
“예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할 정도의 지능이니 판단도 느리신가 보네요.”
아이루고의 화법은 실바누스의 화법보다 훨씬 직설적이었다.
궁인들이 브로디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어제까지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아내가 아니었다.
곧 결혼할 사이라고는 해도 진짜로 결혼식을 치르진 않았으니까.
따라서 궁인들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티네를 가까운 귀빈을 대하듯 대했다.
당연히 아리스티네의 시녀들에게도 뭐라 할 수 없었다.
그건 곧 아리스티네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리스티네는 이 나라의 왕자비 전하였고,이 궁의 안주인이며,그들의 주인이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시녀를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훌쩍 큰 아이루고의 궁인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깔아 보자 브로디는 저절로 위축 되었다.
설마 아까부터 이렇게 자신을 노려봤던 것일까?
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건지 브로디는 알 수 없었다.
들어올 때부터 흥분해서 아리스티네에게 화낼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내가 왜 이딴 야만인들 따위에게……!’
이대로 야만인 때문에 물러서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브로디는 주먹을 꽉 쥐며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갔다.
“나,나는 황녀님의 친정 시, 시녀예요. 감히 황녀님과 가,가장 가까운 나를 이렇게 모욕하는 건 고,곧 황녀님을……”
비록 자존심을 세운다는 것치 고는 보기 불쌍할 정도로 덜덜 떨었지만.
“음,엄밀히 말해서 진짜 친정 시녀는 아니지.”
아리스티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실바누스에 있을 때 날 보필한 적은 없잖아?”
“그건……”
“그래도 날 모시겠다고 이 먼 곳까지 따라왔으니 나도 그에 맞는 예우를 해 주어야겠지. 네게도,기사들에게도.”
그렇게 중얼거린 아리스티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로디는 몸을 잔뜩 긴장시킨 채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분명 그 말은 자신에게 좋은 방향인데,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리스티네가 궁인들에게 명했다.
“기사들에게 줄 달걀 좀 챙겨 줘.”
그 말에 궁인들은 고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반면 브로디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자,잠깐만요!”
브로디가 아리스티네의 팔을 꽉 붙잡았다.
“지금 설마 기사님들께 달걀을 주겠다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야?”
아리스티네가 의아한 눈으로 브로디를 바라봤다.
“네가 기사들이 다쳤는데 나한테 달걀이 입에 넘어가냐고 물었잖아.”
그 말에 브로디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네 소원대로 맛있는 걸 다친 기사들에게 내리며 위로해 주겠다는 건데 뭐가 불만이야?”
“그,아니,기사님들은……”
차마 고자가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말 없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잡힌 손목에 힐끗 시선을주었다.
흠칫한 브로디가 재빨리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즉시,그런 자신의 행동에 내심 놀랐다.
‘이 내가 이딴,이딴……! 황녀 에게 기가 죽다니 !’
그것도 황녀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났다.
브로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맛있으니까 주면 분명히 좋아 할 거야. 네 말대로 나를 성심껏 모시는 충성스러운 기사들인데 당연히 내가 챙겨야지.”
생긋 웃은 아리스티네가 식당을 나섰다.
뒤에는 삶은 달걀을 잔뜩 가지고 온 궁인들을 대동한 채.
* * *
으,크으
병동 안에는 신음 소리가 가득 했다.
기사들 상태는 아리스티네의 생각보다 심각했다.
코는 삐뜰어졌고 온 얼굴이 퉁퉁 부은 데다가 피부는 보랏빛 이었다.
그 모습에서 본래의 얼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사들이 아리스티네가 온 것을 알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프다는 핑계로 누워서 나를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화, 황녀님……”
혀까지 부었는지 발음이 애매 했다.
아리스티네는 기사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눈을 뜨고 있었던 거였구나.’
너무 부어서 감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음?’
잠시 그들을 살펴보던 아리스티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상처가 방금 막 난 것처럼 보이는 게 있는데……’
분명 어젯밤에 다쳤다고 들었다.
하지만 상처에 난 피딱지는 오래된 것과 방금 막 생긴 것들이 섞여 있었다.
의문을 뒤로 감춘 채,아리스티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런.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이렇게 다치다니.”
안타까운 표정이 아리스티네의 섬세한 얼굴에 드리웠다.
그녀는 상급 기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황녀님……”
“크윽,그 야만인 놈들이……”
놀려 주려는 거였는데 왜인지 기사들은 아리스티네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아파서 마음이 약해졌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리스티네는 기사의 말을 받아 주는 척 물었다.
“야만인 놈들?”
“예,그 무식하고 미개한 전 ....”
“아,설마.”
아리스티네가 기사의 말을 툭 끊었다.
“위대한 대 실바누스 제국의 고결한 기사들이 아이루고 전사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억울함을 털어놓을 준비 만만이었던 기사들은 멍하니 아리스티네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그러진 않았을 거야.”
아리스티네가 빙긋 웃었다. 단호한 웃음이었다.
“만약 본인들이 전쟁에 나갔다면 아이루고를 다 박살내서 실바누스가 승리했을 거라고 매일 매일 말했는데.”
기사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멍 때문에 티는 잘 안 났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일방적으로 구타당했다…… 라는 건 말도 안 되잖아. 훌륭한 기사님들인데. 그치?”
이미 육체적으로 너덜너덜해진 기사들이 불쌍하지도 않은지,아리스티네는 신나게 그들의 정신을 두들겨 됐다.
“거기다 아이루고 전사들이 내 기사들을 공격할 이유는 없잖아?”
아리스티네가 순진한 척 동그 랗게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감히 실바누스의 황녀이자,아이루고의 왕자비인 나를 두고 천박한 소리를 지껄인 게 아니라면 말이야.”
기사들도,따라왔던 브로디도 다들 놀란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순진한 척했던 모습은 다 어디간 건지,아리스티네는 눈을 내리깐 채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제왕과도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상급 기사가 움찔,몸을 굳혔다.
갑작스럽게 근육이 긴장하자 다친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그 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일만 아니면 아이루고 전사가 내 기사들을 공격할 이유 따원 없잖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부정하는 순간,아리스티네를 대상으로 천박한 소리를 지껄인 게 되니까.
“예,화, 황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 전사들이 우리를 공격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요. 하하!”
기사들은 서둘러 아리스티네의 말에 동의하며 어색한 웃음을 홀렸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궁인들은 탄복한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역시 우리 비전하……!’
‘이걸로 실바누스에서 아이루고에 항의할 일을 원천 차단하셨어!’
평화를 위한 결혼식을 막 치른 밤, 아이루고 전사들이 실바누스 의 기사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는 게 알려지면 어떻겠는가.
거기에 실바누스에서 이 일을 공식적으로 항의한다면?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그건 아리스티네의 명예를 위해 알리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방금 기사들이 아이루고 전사들이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했다.
모두 아리스티네의 유도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레 찔렸던만큼 괜히 변명을 만들어냈다.
“그,사실 저희가 황녀님의 결혼식을 기념해 어,마수들을 좀 토벌하려고 했는데...”
“예,맞습니다. 그러다 수백 마 리의 마수에 둘러싸이는 바람에.”
“물론 마수들은 다 처리했습니다.”
“그랬다니……”
아리스티네가 가슴 앞에 두 손 을 꼬옥 모으며 감탄했다.
“그대들의 충정에 탄복했어.”
사실은 이 순간에도 허풍을 잃지 않는 기사들의 모습에 감탄한 것이었다.
그 말에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부 좀 해 줬다고 그냥 지나갈 생각을 하다니,역시 황녀는 멍청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아리스티네의 유도에 걸린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제 몸을 희생해서 내 위상을 높였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아리스티네의 눈짓에 궁인들이 앞으로 나왔다.
“내 친히 하사품을 내리겠다.”
궁인들이 바구니 속에서 무언 가를 하나씩 꺼내서 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물품을 확인한 기사들이 눈을 흡떴다.
“이,이건……!”
달걀이었다.
“달걀은 완전식품이라고 불릴 정도로 몸에 좋으니 다친 몸을 보신하기 좋을 거야.”
아리스티네가 노래하듯 설명했 지만,그 말은 그들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들의 귀에는,눈에는 아무것 도 들리지도,보이지도 않았다.
모든 감각이 간밤에 있었던 비극을 되새기고 있었기에.
전사들에게 신나게 얻어터진 후 이송됐을 때,기사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비록 가혹한 폭력 앞에서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으나,목숨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꺼질 리는 없다 믿었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곧바로 의사가 들어왔고,신속한 응급 처치에 그들의 희망은 더더욱 부풀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의사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왜 사과를 하시오,의사 양반…….〉
〈서,설마 아니겠지……?〉
〈이렇게 허망하게 갈 놈들이 아니오!〉
〈평생을 나와 함께해 온 녀석들인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기사들의 아우성에 의사의 얼굴은 더 침통해졌다.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기사들은 애통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는 의사의 모습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를 저었다.
이건 꿈이다.
꿈일 것이다.
꿈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운명한 ‘그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네가, 네가 날 두고 가다니……!〉
〈우린 영원히 함께가 아니었나〉
〈한날한시에 같이 태어나 죽음 역시 함께할 것이라 믿었거늘!〉
기사들이 각자 자신의 다리 사이를 부여잡고 비통하게 오열했다.
운명한 것은 동료 기사도,데리고 다니던 종자도 아니었다.
바로 2세를 위한 유전자가 보관되어 있는一.
남자의 달걀 두 개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