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내가 고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 양반!〉
아아, 달걀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달걀은 갔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달걀이여!
이제는 터져 버린,이제는 깨져 버린 달걀이여!
인생의 동반자를 잃은 남자들 의 소름 끼치는 곡소리가 병동을 울렸다.
심지어 이들은 모두 미혼이었다.
기사들은 두 손으로 달걀을 움켜쥔 채 허망하게 가 버린 자신의 달걀을 추모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황녀님이 하사한 달걀을 소중히 움켜 쥔 채,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왜 그래? 안 먹어?”
아리스티네는 달걀을 소중히 보듬고 있는 상급 기사를 보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식당에서부터 가져온 은제 스푼이 들려 있었다.
부드러운 손목 스냅과 함께,
톡!
달걀이 깨졌다.
상급 기사의 동공이 크게 벌어 졌다.
“안 돼애애애애!”
처절한 절규가 병실 안을 울렸다.
아리스티네는 신경 쓰지 않고 다른 기사들의 달걀도 톡톡톡 깨 주었다.
“맛있게 먹어.”
“아아아아아!”
“내,내 달걀이……!”
“시,싫어!”
기사들은 마치 자신의 달걀이 깨진 것처럼 울부짖었다.
아직 고자가 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재차 트라우마를 자극당해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뭐,이렇게까지……’
아리스티네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남을 괴롭힐 때는 그렇게 모질면서 자기 일에는 참 나약한 사람들이었다.
‘어차피 결혼은 그른 것 같은데 고자가 된 게 무슨 상관이람.’
전 세계 여성들을,아니,인류를 위해 이런 놈들은 결혼 안하는 게 맞았다.
한참을 절규하던 기사들이 휙 고개를 들었다.
눈이 돌아간 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기사들이 아리스티네를 향해 벌떡 일어났다. 온몸에 피멍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움직 임이 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황 녀!”
기사들이 아리스티네에게 소리 질렀다.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지금 우리가 고…… 가 됐다고 모욕하는 겁니까!”
“이런 수치를 주고서도 당신이 무사할……!”
一까지 말하던 기사가 우뚝 움 직임을 멈췄다.
“……하시겠죠, 예. 무사하실 겁니다. 아무 문제 없이 무탈하시겠죠!”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기사의 모습에 아리스티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모, 모욕한 게 아니셨죠. 하하. 저희에게 맛있는 달걀을 하사하셨는데 저희가 그것도 먹지 않고”
“너무 감격해서 벌떡 일어난 것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고요”
“으음! 맛있어! 역시 황녀님께서 주신 달걀이라 그런지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보라색 찐빵같은 얼굴로 기사들이 최대한 호의적인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며 아리스티네의 비위를 맞췄다.
‘갑자기 왜 이렇게 비굴해졌지?’
아리스티네의 눈초리가 예리해 졌다.
어찐지 기사들의 시선이 자신을 미묘하게 비껴가 있는 것 같았다.
뭐가 있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궁인들만 있을 뿐이었다.
궁인들의 모습에서도 특별한구석은 찾을 수 없었다.
‘진짜 뭐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보라 찐빵들이 달걀을 먹으며 헤헤헤 미소 지었다.
미관상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 * *
‘다행히 눈치채지 않은 것 같군.’
타르칸은 기둥 뒤에 반쯤 몸을 숨긴 채 아리스티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기사들이 벌벌 떨며 바보처럼 웃었다.
아리스티네에게 굽실대며 손을 비비는 꼴을 보니 저러다간 발이라도 할을 것 같았다.
‘모자란 놈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겸손해지는 법이다.
특히 저런 놈들은 더 그랬다.
두 시간 전,사람을 잘 부풀어 오른 따끈따끈한 빵 취급한 아리스티네와 한바탕 한 후.
타르칸은 식사를 거르고 회의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바로 무칼리와 자칼렌 그리고 듀란테가 실바누스의 기사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소식이었다.
〈죄송합니다.〉
타르칸은 변명 없이 고개 숙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실바누스의 기사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도 없었다.
물론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긴 하겠지만,그는 그간 정치 문제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타르칸부터가 이미 기사 하나를 밟아 지하 감옥에 집어넣은 적이 있지 않은가.
오히려 조금 시원한 면도 있었다.
그딴 놈들이 자신의 신부 곁에 있다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으니까.
〈왜 그랬지?〉
〈실바누스 기사들이 비전하를 대상으로 부적절한 발언을 했습니다.〉
듀란테의 대답에 타르칸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의외였다.
다혈질인 무칼리가 사고 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두뇌파인 자칼렌은 평소에는 중심을 잘 잡지만,무칼리와 엮이면 같이 사고를 치는 쪽이었다.
‘그러니 보통 말리는 역할은 듀란테 인데.’
그 듀란테까지 합세해서 실바누스 기사들을 구타했다니.
기본적으로 듀란테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다.
시야도 넓고 판단도 빠르지만 그 어느 것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듀란테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주군인 타르칸이었다.
그런 그가 아리스티네와 관련된 일에 관여한 게 의아했다.
심지어 그 결과가 타르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킬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타르칸의 의문에 듀란테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 비전하를 신경 쓰시니까.’
듀란테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말해 봐야 타르칸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듀란테가 옳다고 판단한 거면 그런 거겠죠.〉
〈그놈들이 무조건 잘못한 것입니다.〉
전사들이 듀란테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역성을 들어 주었다.
무칼리의 콧잔등이 썰룩였다.
〈그런데 무칼리가 비전하를 위해 나선 건 의외인데요. 너,황녀를 마음에 안 들어 하지 않았나?〉
〈다,당연한 소리를! 실바누스 의 황녀인데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무칼리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그런데 왜 그랬어?〉
〈그건…….〉
무칼리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손이 먼저 나갔다.
그 더럽고 추잡한 말이 아리스티네를 향한 것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에는 이미 그 낯짝만 번드르르한 실바누스 기사 놈이 바닥을 구른 후였다.
자신이 내지른 주먹 때문에.
〈그건 황녀라서가 아니라,그냥 그놈들 말이 너무 추잡해서 그랬던거다!〉
무칼리는 정답을 찾은 기분으로 외쳤다.
전사에게 긍지가 있듯,기사에 게는 기사도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실바누스 기사들은 기사도를 어디에 내팽개친 건지, 시정잡배들보다도 더 천박한 말을 해 댔다.
〈대체 어땠길래?〉
전사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타르칸이 조용히 물었다.
〈그게…….)
차마 주군의 앞에서 입에 담기도 더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주군의 질문도 무시할 수 없었던지라 무칼리는 머뭇머 뭇 제가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콰지직!
타르칸이 앉아 있던 의자 팔걸 이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다.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팔걸이 가 아니라 금을 비롯한 금속으 로 만든 팔걸이였다.
그런데 그게 지점토라도 된 것 처럼 악력대로 쑥 들어갔다.
〈그래,그랬다고.〉
그 목소리는 지옥에서 긁어 오른 것처럼 섬뜩했다.
절로 몸이 경직됐다.
전사들은 숨을 죽인 채 감히 타르칸을 마주 보지 못했다.
쨍하게 공기를 울리는 살기에 하마터면 오러를 끌어 올릴 뻔 했다.
마수들의 피로 물든 살육의 현 장에서 타르칸과 함께했던 순간에도 받지 못했던 느낌이다.
정원에서 지저귀던 새소리는 이미 몇었다.
〈내 신부님께.〉
공간을 살라 버릴 것처럼 광포 하게 휘몰아치던 살기가 순식간 에 타르칸의 안으로 빨려 들어 가둣 사라졌다.
전사들은 그제야 호흡을 내쉴 수 있었다.
찰나였지만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새소리는 아직도 들려오지 않았다.
〈놈들은?〉
타르칸이 물었다.
그 흉포한 살기가 모두 거짓이 었던 것처럼 평소와 같은 태도 였다.
주변의 흐름은 역시 평온했다. 하지만 전사들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병동에 있습니다.〉
타르칸의 궁에는 병동이 별도로 크게 있었다.
따르는 전사들이 많아서 필요에 의해 만든 곳이었다.
〈상태는?〉
〈두 달은 누워 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뜸 들이는 듀란테의 대답에 타르칸이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 말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타르칸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금안에 설핏 만족스러운 기색이 배어 나왔다.
만약 아리스티네가 지금 그의 모습을 봤다면 분명 슬쩍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고자가 된 것에서 기쁨을 느끼다니…… 역시 변태’라고 하며.
타르칸은 회의실을 나와 실바누스 기사들이 누워 있는 병동으로 갔다.
‘고자가 된 걸로는 부족하지.’
그게 그의 생각이었다.
타르칸은 기사들을 손수 한명,한 명 성형시켜 주었다.
그러고 난 뒤,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아리스티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막 식당에 도착할 무렵,아리스티네가 식당 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인지 타르칸은 기둥 뒤 에 숨었다.
그리고 조용히 아리스티네의 뒤를 밟았다.
왜 그러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타르칸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뒤를 밟은 적이 없다. 오직 마수의 뒤만 밟아 보았다.
다만 소식을 들은 여자가 상처 받았을 게 신경 쓰였다.
자신의 신부는 무척 특이한 여 자였지만,그래도 그런 말이 상처가 안 되었을 리는 없다.
‘……역시 성형만으로는 부족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리스티네를 지켜보는데.
설마,방금 고자가 된 놈들 앞에서 시원스레 달걀을 깨트릴 줄은 몰랐다.
그 잔혹한 처사에 타르칸의 곁에 있던 무칼리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렸다.
알(?)이 있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흠칫할 법한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는 항상 예상과는 달랐다. 그리고 그건 꽤 유쾌한 일이었다.
* * *
기사들은 울면서 달걀을 먹었다.
무섭다.
설마 저 괴물이 아직까지도 병 동 주변에 있을 줄은 몰랐다.
괴물이라는 말도 타르칸에게는 부족했다. 지옥도 그보단 온화할 것이다.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야.”
아리스티네는 기사들의 태세 전환에 대한 의문에 대강 마침표를 찍었다.
고자가 된 일로 정신이 불안정해져서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타르칸이었다.
그 역시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전사들이 기사를 공격한 건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으니 당연히 신경 쓰이겠지.’
아리스티네는 타르칸과 눈을 맞추며 열심히 눈짓했다.
‘그 문제는 내가 다 해결했어! 걱정 안 해도 돼! 외교 문제없어! 나 유능하지?’
타르칸은 움찔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리스티네가 엄청나게 초롱초롱한 눈빛으 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침없던 그의 발걸음이 잠시 주춤한다.
아이루고의 남성 의복은 기본적으로 가슴을 드러내는 디자인 이라,그 역시 지금 맨가슴을 내 보이고 있었다.
스윽,타르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
아리스티네는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어째서인지 타르칸이 더 움찔거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돌렸다.
뺨이 살짝 붉었다.
“기사들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했어. 가서 설명해 줄게.”
아리스티네는 타르칸의 손을 잡고 끌었다.
타르칸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전사들은 눈을 홉떴고,궁인들은 흐뭇해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봄꽃이 가득 핀 정원을 가로질렀다.
아리스티네의 치맛단이 봄바람 에 살랑이며 연둣빛 풀 위를 부 드립게 쓸었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다정 하게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어쩜............’
갑자기 평범한 정원이 신들의 정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리스티네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군청빛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싱그러운 봄의 정원에서도 요염한 빛을 내뿜는 여자가 서 있었다.
“디오나.”
아리스티네의 부름에 디오나가 붉은 입술로 미소 지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