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45화 (45/183)

45화

궁인들과 고용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아리스티네는 건너편에서 다가 오는 상대를 보고 싱긋 웃었다.

“무칼리 경!”

반가운 미소였다.

아리스티네의 앞에 선 무칼리 는 괜히 크홈,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가 마주 인사하기도 전에 아리스티네가 먼저 활기차게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서 실바누스 기사들의 달걀을 깼다며!”

“달……!”

무칼리는 거침없는 아리스티네의 언사에 기함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지만 몹시 기쁘다는 둣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응? 왜?”

“……됐소.”

무칼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 몸을 돌렸다.

아리스티네와 무칼리는 나란히 궁륭 밑을 걸었다.

저도 모르게 숨까지 죽여가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용인들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와……. 정말 말도 하시고 숨 도 쉬시는구나.’

‘도련님과 무슨 말을 주고받으셨던 걸까?’

‘분명 반가운 마음을 햇빛의 아름다움에 빗대 우아하게 말씀 하셨겠지.’

‘아아,비전하의 시……. 나도 듣고 싶다.’

‘분명 비전하 본인만큼이나 영롱하고 아름다운 시겠지……’

아리스티네는 무칼리를 반가워 하고 있었고,달걀도 빗댄 표현이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롱하고 아름답진 않았지만.

무칼리는 아리스티네를 다실로 안내하면서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그걸 깬 건 내가 아니오.”

자신은 그렇게 무자비하고 잔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 주고 싶었다.

무칼리는 인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야?”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대놓고 실망으로 물들었다.

“나는 무칼리 경이 한 줄 알았 는데……”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에 무칼리는 당황했다.

“하,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그놈들의 이빨을 뽑았소!”

무자비하거나 잔혹하지 않고, 인의를 아는 무칼리가 외쳤다.

“그래?”

아리스티네가 반색하며 무칼리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날 위해 그렇게 해 주다니 역시 무칼리 경은 의리가 있어.”

‘.....응?’

무칼리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딱히 아리스티네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실바누스 황녀와의 의리를 위해서 그랬을 리가 없잖아!’

“고마워.”

하지만 밝게 웃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니,부정하기 위해 열렸던 입이 다물렸다.

‘그건 사실이 아니지만. 절대 아니지만!’

딱히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내 어마무시한 계략을 위해서는 환심을 사야 하니까! 그래서 부정하지 않는 것일 뿐!’

무칼리는 심기를 다졌다.

모든 것은 주군을 위해서다.

새 신부가 불륜을 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그러는 사이 다실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드시지요,비전하.”

정중한 무칼리의 안내에 아리스티네가 그를 바라봤다.

“왜 그래?”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무칼리가 아리스티네의 의자를 빼 주며 물었다.

아리스티네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평소대로 해.”

“이제 우리 비전하 아니십니 까.”

무칼리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간 그는 일부러 아리스티네에게 알맞은 존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아리스티네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따악히,우리 비전하로 인정해서 존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환심을 사야 하니까.’

아리스티네가 왕자비가 된 후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 거니 무칼리는 당연히 그녀에게 더 정중한 경어를 쓸 생각이었다.

달걀의 위엄이 너무 강해 순간 습관이 나와 버렸지만.

“이상해. 다른 사람 같아.”

“저는 원래 이렇습니다.”

그 말에 아리스티네가 흐응, 하고 비음을 홀렸다.

“무칼리 장군께서는 원래 그런 분이셨군요. 제가 미처 몰라봤습니다.”

아리스티네의 말에 무칼리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스티네는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결국 무칼리가 졌다.

“하여간,경어를 써도 불만인 사람은 처음 봤소.”

아리스티네가 히히 웃었다.

투덜투덜하는 무칼리의 얼굴에도 어느새 자그마한 웃음이 걸 려 있었다.

이윽고 하녀들이 다과를 내왔다.

‘스트로베리 크림 티!’

약속대로 무칼리는 아리스티네 에게 스트로베리 크림 티를 대접했다.

무뚝뚝하게 굴지만,무칼리는 굉장히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때 그 지나가며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아리스티네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이렇게 차를 내주고 있다.

집사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수증기를 타고 상큼달콤한 향이 물씬 피어오르며,루비같이 투명한 찻물이 잔에 고였다.

아리스티네는 설탕을 듬뿍 넣은 후 재빨리 한 모금 마셨다.

‘아,맛있다.’

비강을 타고 강하게 느껴지는 향이 황홀했다.

거기다 아리스티네가 가져온 스콘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파티시에가 평소보다 더 신경 을 써서 만든 스콘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진짜로 이혼할 때 파티시에를 섭외해 가고 싶었다.

무칼리는 행복으로 말랑해진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 역시 허기지는 것 같아 무칼리는 스콘으로 손을 뻗었다.

자그마한 스콘은 무칼리에겐 한 입 거리였다.

“어때, 진짜 맛있지?”

아리스티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과연 그렇게 맛있다고 강조할 만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무칼리의 눈이 접시만큼 커졌다.

하지만 스콘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것은 전사답지 못했다.

“……꽤 괜찮은 것 같소.”

무칼리의 대답에 아리스티네가 미소 지었다.

“여기 잼이랑 클로티드 크림을 같이 발라서 먹어 봐. 우리 파티시에는 잼도 잘 만들어.”

그 말대로였다.

차 한 모금에 스콘 한 조각, 또 차 한 모금에 스콘 한 조각.

그렇게 먹으니 끝도 없이 쑥쑥 들어갔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티타임을 가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나밖에 남지 않은 스콘을 보고 무칼리는 핫,하고 정신을 차렸다.

‘이거 전투 식량으로 괜찮은 건가?’

버터를 듬톡 넣어서 맛은 좋지만 유통 기한이 굉장히 짧을 것 같았다.

주군께서 스콘을 잘 만드는 파티시에를 섭외한 게 새로운 전투 식량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무칼리가 주춤하는 사이 아리스티네 역시 고민에 빠졌다.

딱 한 조각 남았다.

‘먹고 싶어. 먹고 싶지만.!’

원래도 맛있는 스콘이지만 오늘은 파티시에가 혼을 갈아 넣었는지 더 맛있었다.

하지만 무칼리에게 양보하고 싶기도 했다.

무칼리는 타르칸의 명을 받고 자신을 도와주러 온 것이겠지만, 그래도 아리스티네에겐 그의 존재가 기꺼웠다.

잠시 고민하던 아리스티네가 비장하게 무칼리를 바라봤다.

“무칼리 경.”

“왜 그러시오.”

무칼리 역시 비장해졌다.

“이거, 무칼리 경이 먹어.”

덩달아 비장해졌던 무칼리는 허탈함에 실소를 흘렸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부족함 없이 자랐을 황녀가 스콘 하나에 왜 이리 일희일비하 는지 모르겠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고,이 자그마한 엄지 공주가 그렇게나 아끼는 스콘을 뺏어 먹을 생각 은 없었다.

“난 됐으니 비전하께서……”

“아니야. 무칼리 경이 먹어.”

사뭇 단호한 어조였다.

놀라서 바라보니 아리스티네는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깃든 것은 순수한 호의와 친애였다.

잠시 침묵하던 무칼리는 스콘을 덤석 집어 한입에 먹었다.

“……정말 맛있소.”

그 말에 아리스티네의 입꼬리 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눈꼬리가 유순하게 흰다.

만발한 봄꽃이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미소였다.

“그래.”

아리스티네는 짧게 답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누군가에게 양보 를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양보해 줄 사람도,양보할 것 도 가져 보지 못했으니까.

처음으로 해 보니 그건 굉장히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온화하게 풀어진 공기 속에서 아리스티네가 입을 열었다.

“무칼리 경. 저번에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

그 말에 무칼리가 몸을 바로 했다.

“부탁이 있어. 오늘 궁에서 나온 김에 그를 만나고 싶거든.”

‘드디어……!’

무칼리는 심장이 쿵,뛰었다.

아리스티네가 꼬리를 드러냈다. 현장을 덮칠 기회였다.

역시 계속해서 그녀의 환심을 산 효과가 있었다.

그 교활하다는 실바누스인조차 자신의 무시무시한 계략에는 속 수무책으로 걸려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기쁘지 않았다.

거칠게 뛰는 심장은 기대보다 는 불안과 맞닿아 있었고,자꾸만 얼굴이 굳으려 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으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뿐 이다.

마수 사냥에서도 가장 냉정해야 하는 때는 마수의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무칼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이 무칼리가 도와 드려야지.”

어째서인지 목구멍이 꺼끌꺼끌 했다.

Chapter 14. 너,내 동료가 되 어라

봄날은 아직도 한창이건만 목련 꽃잎은 벌써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돋은 파릇 한 신록이 그토록 눈부실 수 없었다.

평화로운 봄날.

그러나 목련 나무 밑에서는 그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잡아!”

“저 자식 못 도망가게 막아!”

우당탕탕!

철제 집기가 무겁게 쏟아지며 거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친 건 사내들의 움직임이었다.

선철을 담금질하며 함께 단련된 몸은 쇳덩이 같았다.

사내들은 모두 한 남자를 잡기 위해 혈안이었다.

남자는 꽤 잘 버텼지만,결국 잡히고 말았다.

“넌 우리 대장간의 수치야!”

“너 때문에 우리 카탈라만 대장간의 명성이 떨어지고 있어!”

“도틀텐 대장간 놈들이 우릴 얼마나 무시하는 줄 알아?!”

“너 같은 모자란 놈이 있는 대 장간이니 개나 소나 다 들어가겠다고!”

잡는 데 꽤 힘이 들어갔던 만 큼,사내들은 더욱 홍분해서 거칠게 남자의 몸을 잡아 눌렀다.

남자는 격렬하게 반항했으나 그를 옭아매는 손아귀를 완전히 떨칠 순 없었다.

“너 같은 놈이 왜 우리 대장간 에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어.”

“사부님도 마음씨가 너무 좋으시다니까.”

사부님.

그 말에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위대한 카탈라만의 명성에 폐 가 되면 알아서 나갈 줄도 알아 야지.”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으로 인해 아이루고 제일 의 대장간이라는 카탈라만 대장 간의 명성이 나날이 추락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가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나갈 용기 가 없다면 우리가 도와줄게.”

그렇게 말하며 사내 중 한 명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칼날.

남자는 한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봤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그가 제 손으로 직접 만든 단도인데.

사내들은 온몸으로 남자의 몸 을 누르며 그의 손을 바닥에 고정시 켰다.

이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지는 극명했다.

남자의 올리브빛 눈동자가 흑 부풀었다가 거칠게 흔들렸다.

남자는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으흐흡! 으으읍!”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며 막힌 입으로 소리를 질렀지만,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되돌아오는 것은 자신을 짓누 르는 사내들의 욕설뿐.

여러 개의 손으로 고정된 오른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은빛 칼날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심연 같은 절망이 깃들기 시작 했다.

외침에 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제 끝이다.

그 순간,

“지금 뭐 하는 거야?”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이런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칼날보다도 더 예리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초연하게 서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어째서인지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 온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위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사내들이 굳어 있는 사이,아리스티네는 그들 사이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비전하!”

뒤에 서 있던 무칼리가 깜짝 놀라 외쳤다.

‘비전하?’

사내들이 당황해서는 아리스티네를 살폈다.

과연,신문과 광장에서 봤던 그 왕자비 전하가 맞으셨다.

아리스티네는 제압당한 남자를 보호하듯 그의 앞에 버티고 섰다.

남자는 멍하니 아리스티네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그런데.

햇빛을 머리에 이고 있는 뒷모 습이 눈부셨다.

감히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다.

“이리 줘.”

아리스티네가 단도를 들고 있는 사내에게 손을 뻗었다.

사내는 홀린 듯이 그녀에게 단도를 내주었다.

무칼리는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검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저 조그만 생명체가 저러다 스스로의 손을 베기라도 할까 걱정이었다.

다행히 아리스티네는 단도를 안전하게 접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남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괜찮아?”

사르록,그녀의 긴 은발이 허공에서 미끄러졌다.

아리스티네가 친히 몸을 굽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리트렌.”

남자는,리트렌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은(銀)의 여신을 올려다봤다. 구원자.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