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편은됐고, 돈이나벌렵니다-46화 (46/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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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

그 세 글자가 리트렌의 머릿속 에 떠올랐다.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아리스티네의 몸은 윤곽이 희미했다.

봄볕이 마치 날개처럼 그녀의 등에서 뻗어져 나왔다.

벼랑 끝에 매달린 그를 끌어 올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리트렌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닿는 보드람고 따스한 감촉에 흠칫 놀랐다.

딱딱하게 인이 박인 데다가 쇳물까지 든 자신의 손이 감히 닿아도 되는 걸까.

하지만 리트렌이 미처 손을 물리기도 전,아리스티네가 먼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아리스티네의 손길에 끌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연약한 팔이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리가 없는데,저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들어가고

몸이 움직였다.

“여기. 이거 네 거지?”

아리스티네가 접힌 단도를 리트렌에게 내밀었다.

리트렌은 무심결에 그 단도를 받았다.

자신이 만든,자신의 손가락을 자를 뻔한 단도.

“좋은 단도네.”

아리스티네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황금빛 봄볕과 어 우러져 눈이 부신 미소였다.

아주 단순한 모양의 단도였지 만,아이루고인에 비해 훨씬 손 이 작은 아리스티네의 손에도 착 감기는 게 남달랐다.

그리고 제왕안을 통해서 봤던 절삭력.

아리스티네의 눈이 반짝였다.

‘어서 빨리 내 직원이 되어 줘!’

“비전하.”

곁에 다가온 무칼리가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 트의 의미였다.

무칼리의 얼굴이 꽤 굳어 있어 아리스티네는 의아한 얼굴로 그 의 팔에 손을 얹었다.

무칼리의 외눈이 번뜩이며 좌중을 둘러봤다.

갑작스러운 왕자비의 등장에 놀라 눈치만 보고 있던 사내들이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 고 무릎을 꿇었다.

“비전하를 뵙습니다.”

아리스티네는 그들을 내려다보 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카탈라만의 명성에 누가 되는 게 과연 누구인지 스스로 돌아 보길 바라네.”

그 말만 남긴 후,그녀는 미련 없이 뒤돌아 자리를 벗어났다.

덩그러니 남은 사내들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더럽고 비겁한 짓을 하필이면 가장 고귀한 이에게 들켜 버렸다.

‘저 자식 때문에 비전하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아리스티네가 경고한 직후에 또 사고

를 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사내들은 험악한 눈길로 리트렌을 노려봤다.

그러나 리트렌은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올리브빛 눈동자는 오로지 멀어지는 아리스티네의 뒷모습만 좇았다.

무칼리는 아리스티네를 에스코트한 채,흉흉한 기운을 잔뜩 풍기며 쿵쿵 걸었다.

“무칼리 경?”

그런 그의 태도에 아리스티네가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오히려 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길 뿐.

아리스티네는 잠자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다리에 힘을 꾹 주었다.

하지만 무칼리에게는 한없이 가벼워 제대로 버티지도 못한 채 몇 걸음 딸려 갔다.

그래도 그렇게 하니 무칼리 역시 걸음을 멈췄다.

이제 말 좀 하려나 싶었는데, 그는 고집스레 아리스티네를 쳐 다보지 않았다.

“무칼리 경.”

재차 부르자 그제야 무칼리가 아리스티네를 돌아봤다.

획,소 리가 날 만큼 거친 움직임이었다.

“이 조그만 몸으로……!”

무칼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루고 사람들은 모두 아리스티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여자들이 그 정도고 남자들은 더 차이가 났다.

그중에서도 대장장이들은 체격 도 큼직하고 몸도 단단했다.

매일매일 철을 녹일 정도로 뜨 거운 불 앞에서 제련하고,망치 질과 담금질을 하니 그럴 수밖 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우락부락한 사내들 틈에 뛰어들다니!

거기다 상대는 날붙이를 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아리스티네는 바람 한번 불면 흔들리는 갈대처럼 보였다.

무칼리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바르르 떨었다.

아까부터 뭐라 하고 싶은 것을 애써 꾹꾹 늘러 참았다.

남들 앞에서 자신이 아리스티네에게 한 소리하면 그녀의 위신이 상하니까.

하지만 이제 아무도 없으니 참을 필요도 없다.

“다치면 어쩌시려고 그랬소!”

무칼리가 아리스티네의 어깨를 꽉 틀어잡으며 말했다.

두꺼운 손에 잡히는 어깨가 종잇장처럼 얇아 더 화가 나고 짜 증이 났다.

이를 악물면서도 무칼리는 최대한 손에서 힘을 빼기 위해 노 력했다.

그런데 이 대책 없는 왕자비님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쪽하는 것 아닌가.

“척 보면 내가 누군지 뻔히 알 텐데 다칠 일이 뭐가 있다고 그 래.”

그 말대로 인종 자체가 다르니 아리스티네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리스티네의 얼굴은 아직도 신문에 실리고 있었다.

“사람이 꼭지가 돌면 눈에 뵈 는 게 없는 법이오! 그 자식들이 멀쩡해 보였소?”

“뭐,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태평하게 동의하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에 무칼리는 자신의 꼭지가 돌 것 같 았다.

“그래도.”

아리스티네가 툭 내뱉었다.

“무칼리 경이 내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얼굴.

“맞잖아?”

새벽하늘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아무런 의심도 담지 않고 자 신을 빤히 쳐다본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무칼리는 제 손에서 힘이 스르록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건…… 그렇소.”

아리스티네가 ‘그럼 됐지’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무칼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데.

하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기분이 좋다.

무칼리가 갸우뚱갸우뚱하고 있는 사이,아리스티네는 걸음을 옮겼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예고도 없이 방문한 건데 예의를 지켜 야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나길래 다급히 갔던 거였다.

목련 나무를 본 아리스티네는 설마, 하면서 달렸고 그녀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제왕안에서 봤던 것처럼 리트렌이 사내들에게 제압당해 있었다.

은빛 칼날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설마 오늘이었을 줄이야.’

엄청난 타이밍이었다.

과연 직접 개입해서 미래를 바꾸는 게 옳은 일인가,하는 의문은 리트렌의 모습을 실제로 본 순간 사라졌다.

절망에 좀먹히던 리트렌의 얼굴.

손가락이 상하지 않고 온전히 구해졌을 때,그의 얼굴에 서광 처럼 떠오르던 희망.

만약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안 좋은 미래가 닥치더라도,아리스티네는 리트렌을 구한 일을 후 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사이 대장간의 응대용 건물 앞에 도착했다.

무칼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설마,진짜..?’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보다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비전하.”

“비전하를 뵙습니다.”

그녀가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화답하고 있자,어디선가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카탈라만 대장간의 도장인,볼라튼이었다.

그는 왕자비가 대장간을 방문 했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나왔다.

왕족이 카탈라만 대장간에 방문하는 건 꽤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전에 언질도 없이 방문하다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되는 한편,다소 고무되기도 했다.

지금 아이루고에서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일 순위가 바로 아리스티네 왕자비 아니던가.

“카탈라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아리스티네 비전하.”

볼라튼이 아리스티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리 방문하신다는 말씀을 주셨으면 준비를 했을 텐데요.”

언질 없이 찾아온 것을 돌려 지적하는 게 아니라,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어조였다.

하긴,원래 대장간은 손님들에게 항상 열려 있는 곳이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볼라튼이 응접실로 아리스티네 를 안내했다.

아리스티네는 흥미 가득한 시 선으로 실내에 장식된 검과 방 패,그리고 각종 무기들을 바라 봤다.

‘과연 아이루고.’

세공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압도적으로 무기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걸작이 아닌 게 없었다.

무기에 대해 잘 모르는 아리스티네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명품이었다.

‘역시 카탈라만의 명성은 허언이 아니라는 건가.’

불과 철의 나라,아이루고.

그 말에서 알 수 있듯,불과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는 당연히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대장장이는 혈연보다는 도제 관계로 이어지다 보니 귀족처럼 가문을 형성하진 않았다.

대신 대장간이 귀족 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왕실의 로열 워런트를 받은 최고의 대장간들.

그 대장간을 이끄는 도장인들은 명문 귀족가의 가주와 같은 위치에 있다.

카탈라만은 그중에서도 지난 백 년간 일인자의 자리를 지켜 온 대장간이었다.

즉,볼라튼은 이렇게 보여도 명문 세도가의 가주一공작이나 후작과도 같았다.

“......해서,비전하께 어울리는 최고의 물품을 제작할 수 있는 곳은 이곳 카탈라만이 유일하다 자신합니다.”

볼라튼이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접실에 도착해 다과와 함께 몇 마디가 오간 후,그는 카탈라만 대장간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었다.

말이 소개지 결론은 카탈라만 대장간보다 더 실력이 좋은 곳은 없다는 거였다.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단하네요. 저도 실바누스에 있었을 때부터 카탈라만 대장간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실바누스에선 아이루고 양식의 검을 비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비선호라고 했으나 본뜻은 무 시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나 다름없었기에.

“좋은 것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춘 자라면 못 알아볼 리가 없 지요.”

아리스티네는 여유롭게 홀려 넘기며 미소 지었다.

안목을 가진 스스로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카탈라만 모두를 높이는 화법이었다.

‘호오?’

볼라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과연 그날 환영 연회에서 보았던 모습이 우연은 아니라는 거군.’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암, 우리 타르칸 전하께서 반 한 분인데 당연히 능력도 뛰어 나고 현명하시겠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뛰어난 전 사인 타르칸은 당연히 대장장이 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대장장이들은 전사들처럼 타르칸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역시 외척이 없는 타르칸이 왕위 계승 다툼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카탈라만에 오신 것도 그렇고!’

현명하고 안목도 뛰어나신 분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거참, 누가 보면 비전하께 반한 줄 알겠습니다.”

“무칼리 장군님.”

볼라튼이 무칼리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오신 김에 검을 봐 드릴까요? 여전히 잘 쓰고 계신 것 같아 저도 흡족합니다.”

볼라튼이 자랑스럽게 무칼리가 패용한 검을 바라보았다.

저 커 다란 태도는 볼라튼의 작품이었다.

“괜찮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 녀석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있으니까요.”

“하아,모든 분들이 장군님처럼 검을 쓰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볼라튼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그러고 보니 장군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말입니까?”

“저번……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셨다는 말을 듣고.”

볼라튼이 슬쩍 아리스티네의 눈치를 봤다.

아리스티네는 그가 말하는 전투가 실바누스와의 전쟁이라는 걸 알아듣고,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국이 화합했으니 옛일은 화합을 위한 과정일 뿐이지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볼라튼은 아리스티네의 언사에 다시금 감탄했다.

“여하간 그런 영웅담이 저 같은 대장장이에겐 영감을 주는 법 아니겠습니까.”

“영웅담이라니 부끄럽군.”

무칼리가 눈매를 찡그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당당하게 활짝 펴졌다.

아리스티네의 앞에서 이런 칭찬을 받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달걀을 깬 듀란테 놈보다 내가 더 뛰어나다는 걸 알아야지!’

은근슬쩍 그 일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장군님께서 승리한 일화를 바탕으로 장군님만을 위한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그 말에 하나뿐인 무칼리의 눈 이 반짝였다.

최고의 대장장이가 손수 그만 을 위해 만든 선물!

전사로서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볼라튼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자그마한 상자를 들고 왔다.

무칼리의 체격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상자였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더더욱 아리송해졌다.

아리스티네 역시 호기심 가득 한 눈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자 안에 든 내용물을 보는 순간,무칼리의 얼굴이 굳었다.

황금과 말라카이트로 만든 안대가 검은색 벨벳 위에 놓여 있었다.

“장군님,어서 껴 보십시오.”

볼라튼이 기대에 차 말했다.

그의 어조나 표정에서 조롱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무칼리를 위해 선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칼리는 볼라튼이 들 은 게 과연 영웅담인지,아니면 실바누스의 전사들이 자신의 외모를 조롱한 이야기인지 햇갈렸다.

아마 후자이고 그래서 불쌍하게 여겨 이런 안대를 제작한 게 아닐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꽉 잡아채인 것처럼 조여 왔다.

“자,끈이 없는 형태라 이런 식으로 아이홀에 끼워 넣으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끈이 있는 건 멋이 살지 않죠. 장군님의 카리스마를 가리지 않기 위해 고안 했습니다.”

볼라튼이 무칼리의 왼쪽 아이홀에 안대를 끼워 넣었다.

맞춘 것처럼 딱 맞는 사이즈였다.

화려한 말라카이트와 순도높은 금의 조화는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이었다.

볼라튼은 만족해서 고개를 끄 덕이며 아리스티네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비전하. 훨씬 훤 칠해지지 않으셨습니까! 아,물론 원래도 미남이셨지만 말입니다.”

무칼리가 움찔했다.

당장 볼라튼의 멱살을 잡고 그만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꼼꼼히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는 아리스티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안 봐도 뻔했다.

그 징그럽고 흉측한 상처를 이런 멋진 안대로 가렸으니, 훨씬 낫겠지.

그런데.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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