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Chapter 16. 침대를 부숴서
“뭐예요,로잘린 영애.”
브로디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황녀님한테 꼬리를 살랑거릴 땐 언제고.”
“우리같이 주인도 제대로 못 모시는 시녀들과는 말도 섞지 않으려고 했던 거 아닌가요?”
다른 시녀들 역시 팔짱을 끼며 턱 끝을 치켜들었다.
로잘린은 그걸 바라보다가 자기 몫의 커피를 시녀들이 앉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시녀들은 흠칫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존심 상해서 이대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한 판 싸울 생각인가 보다.
하지만 로잘린의 행동은 그녀들의 예상과 달랐다.
“영애들. 그걸 믿어요?”
로잘린이 픽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 내가,이 로잘린 프리스텐이 황녀답지도 않은 미친 여자의 개가 될 것 같았어요?”
그녀의 얼굴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쳐졌다.
브로디를 포함한 다른 시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알던 로잘린이었다.
하지만 믿을 순 없었다.
황녀의 앞에 무릎 꿇고 멍멍거렸던 것도 기함할 일이지만,그간 자신들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던가.
로잘린은 그들의 의심 어린 눈길에도 초조해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내가 황녀에게 했던 짓을 잊었나요?”
그걸 어떻게 잊겠는가.
시녀들 중 가장 아리스티네를 못 살게 군 게 바로 로잘린이었다.
다른 시녀가 일을 쳐도 그 뒤에는 로잘린의 입김이 있었다.
황명도 있었고,앞장서는 주도자도 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지루하고 힘든 마차 여행에서 황녀를 괴롭히는 것은 일종의 게임같았다.
브로디의 눈에 경계심이 짙어졌다.
가장 먼저,가장 주도적으로 아리스티네를 괴롭혔으면서 저 혼자 쏙 빠져나가 황녀의 편에 찰싹 붙은 게 탐탁지 않았다.
특히,지금 시녀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만큼 로잘린이 자신들을 미끼로 저 혼자 살 길을 도모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그게 ‘살 길’이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그랬으면서 뻔뻔하게 황녀의 앞잡이가 되었던 것도요.”
“나라고 그 못난이가 좋아서 그랬겠어요? 다 황녀의 약점을 잡아내려고 입 안의 혀처럼 굴었던 거지.”
약점?
시녀들의 눈이 흔들렸다.
영악하고 약삭빠른 로잘린이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었다.
구석에 몰린 시녀들로서는 그렇게 믿고 싶기도 했다.
로잘린이 아리스티네의 약점을 잡았다고.
“브로디 영애의 얼굴이 이렇게 상했는데.”
로잘린이 손을 뻗어 브로디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홈칫,브로디가 몸을 움츠렸다.
많이 아물긴 했지만,브로디의 얼굴에는 아직도 화상 자국이 남아있었다.
화장으로 가려 잘 보이진 않아도,만지면 피부가 우툴두툴했다.
아이루고에 도착하면 말끔히 치료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치료약은 효과가 좋았지만 흉을 완벽하게 지우진 못했다.
마법사나 신관을 불러달라고 했지만,그럴 돈이 있냐고 되물어 왔다.
모욕적 이었다.
금전 문제를 질문당하다니.
〈나는 아이루고의 왕자비 전하되실 아리스티네 황녀 전하의 시녀예요! 아이루고 측에서 응당 나를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어 야지요.〉
〈글쎄요. 당신은 황녀님 본인이 아니지 않나요?〉
〈정 원하시면 황녀님께 부탁을 드려보세요. 그분의 명이라면 우리도 따르죠.〉
아리스티네에게 부탁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런 얼굴로 살 순 없었다.
하지만.
〈어머,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아리스티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브로디를 바라봤다.
〈차를 다 우리고 찻잔에 따르기까지 했는데 끓는 물을 가득 들고오다니.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어.〉
그 말에 브로디가 움찔했다.
아리스티네는 뜨거운 물이 필요없는 상황에서 왜 들고 왔던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가슴이 덜컥거렸다.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손바닥에 뺨을 얹은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외로 기울이며 말했다.
나른한 어조였다.
〈난 네가 나한테 끼얹으러 오는 줄 알았다니까?〉
브로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서,설마요!” 하고 외친 후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오는 수밖엔.
그 후로 아리스티네에게 화상 에 대한 말을 다시 꺼내지도 못했다.
꺼내는 순간 끓는 물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
“갚아 줘야죠.”
로잘린이 속삭였다.
부드럽고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악마의 유혹처럼.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솔깃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건방진 황녀에게 똑똑히 돌려주고 싶다.
잘난 얼굴에 징그러운 화상 자국이 생기면 지금처럼 자신만만 하게 굴 수 있을까?
“아이루고에 와서 조금 황녀 취급 받는다고 바로 기고만장해진 것 좀 봐요.”
로잘린이 신랄한 어조로 말하며 아리스티네의 방쪽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실바누스에서는 황녀는커녕 길거리 거지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받았는데.”
다른 시녀들은 말없이 로잘린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제도 모르고,자기가 2황녀 전하라도 된 줄 착각하나 봐요.”
계속 말하다 보니 흥분한 로잘린이 광,테이블을 내리쳤다.
커피 잔이 소서와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감히 뭐? 사냥개? 참 나!”
로잘린이 콧방귀를 뀌며 방문을 노려보았다.
씨근덕대는 숨에 분기가 가득 했다.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 녀들이 눈짓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응,진심인 것 같죠?’
‘이렇게까지 진심일 리도 힘들죠’
이건 연기가 아니다. 연기일 수가 없었다.
“정말,그간 로잘린 영애가 얼마나 미웠는지 아세요?”
“맞아요. 우리 정말 상처받았다고요.”
시녀들이 눈을 흘기며 불만을 토로했다.
“미안해요. 저 짜증 나는 황녀의 약점을 잡으려면 그게 최선 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 지.”
“속이려면 아군까지 확실히 속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시녀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간 로잘린과 머리채까지 붙들고 싸우기도 했던지라 보통이라면 쉽게 용서하기 힘들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기사들도 떠나고 아리스티네의 입지는 나날이 더 넓어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로잘린같이 전투력 높고 독한 사람이 ‘알고 보니 같은 편이었습니다’라고 하니 오죽 반갑겠는가.
또,황녀에게 붙지않은 게 결국 잘한 선택이었다는 확인도 받은 것같았다.
시녀들은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로잘린에게 물었다.
“그럼 약점을 알아낸 건가요?”
“그간 우리에게 사실을 숨기다가 말한 걸 보면 알아낸 것 같은데.”
“어서 말해 줘요.”
로잘린은 일부러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뜸을 들였다.
시녀들이 충분히 안달 났을 무렵,그녀가 입을 열었다.
“곁에서 지켜본바,황녀 자체는 별거 없어요.”
“그 말은……?”
“이 궁의 중심이 되는 궁인들이 싸고돌고,전사들이 왕자비 대접을 좀 해 줘서 겨우 기를 펼 수 있다는 뜻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도 아이루고 궁인들의 서슬에 기를 못 펴고 살고있던 차다.
아리스티네 혼자였다면 자신들에게 어림도 없었을 터.
그 증거로 여행길 내내 구박받지 않았나.
“궁인들이나 전사들이 왜 황녀를 보호해 주겠어요?”
로잘린의 녹안이 번뜩였다.
“타르칸 전하 때문이죠.”
시녀들이 탄성을 홀렸다.
그들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만약 타르칸의 옆에 있는 사람이 황녀가 아니라 자신이라면.
아리스티네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결혼 축하선물,아름다운 비단 드레스,넘쳐나는 보석.
언제나 최선을 다해 모시는 궁인들,제 앞에 무릎 꿇는 흉포한 야만인들,평화를 몰고 온 결혼이라 환호하는 군중들.
그 모든 것이 제 차지가 될 것인데.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만 보였다.
“결혼 한번 잘해서 인생 핀 거 잖아요.”
“천덕꾸러기에서 순식간에 온 나라의 존경을 받는 왕자비라니.”
“참 팔자도 좋다니까요.”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들은 아리스티네가 야만인과 혼인한다며 깔보고 조롱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다 잊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로잘린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여기서 타르칸 전하의 마음이 다른 여자의 것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붉은 입술 끝이 선명하게 치솟았다.
“지금은 그저 마음에 둔 여자도 따로 없고,평화를 위한 정략혼이니 황녀에게 잘해 주고 있는 것뿐이죠.”
“황녀는 숙일 줄도 모르고 빳빳한데다 기가 세잖아요.”
“맞아요. 저번에 아이루고 왕을 공식 알현할 때 고개 빳빳이 든 거 봤나요?”
“자기 자리 차지하겠다고 왕자와 공주들한테 가서 버티고 서 있던 건 어떻고요.”
이들에게는 그 속에서 오갔던 정치적 알력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그 정도의 눈이 있었다면 애초 에 실바누스 사교계에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나긋하니 부드러운 맛이 있어야죠. 윗사람에게도 그렇고 배우자에게도 그렇고.”
“황녀는 타르칸 전하께 차 한 번 대접한 적이 없잖아요.”
“품위없이 디저트 같은 것도 다 먹고. 좀 남기거나 사양해야 하지않나요?”
시녀들은 그렇게 얘기하며 스스로를 뽐내는 공작새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아하게 손을 움직였다.
“솔직히 어느 모로 보나 우리가 나아요.”
“훨씬 낫죠.”
시녀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 황녀에게 제 주제를 파악 하게 해 주어야겠네요.”
“하지만 아이루고에서는 개인 침실이 따로 없고 부부가 항상 같은 침실을 쓰니……
“타르칸 전하께서 혼자 있는 시간도 거의 없고요.”
시녀들은 모시라는 황녀는 안모시고 하도 타르칸 주위만 맴돌아서 이제 그의 행동반경까지 잘 알았다.
“그걸 위해 우리가 계획을 짜야죠.”
로잘린의 말에 시녀들이 되물 었다.
“계획이요?”
“혹시 따로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신가요?”
홋,로잘린이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아,가까이 와 보세요. 타르칸 전하가 우리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테니까.”
그들에게 타르칸이 남의 남편이라는 자각 따윈 없었다.
* * *
“어서 오세요,황녀.”
왕후의 환영에 아리스티네는 미소를 지었다.
타르칸과 결혼했는데도 ‘황녀’라니.
“왕후 폐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아이루고 왕후는 아리스티네에게 새 가족이 되었으니 함께 오순도순 티타임이라도 가지지 않겠냐고 전갈을 보내 왔다.
‘오순오순이라면서.’
아리스티네의 눈동자가 방 안을 훑었다.
파엘라미엔과 스탈리나 그리고 예니카리나가 왕후의 곁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오순도순할 것 같지 않은 인원이었다.
‘아주 작정했구나.’
사절단도 돌아갔고,타르칸의 궁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자잘한 마찰이 국제 문제로 번질 시기가 지났으니 날을 잡은 것이다.
“황녀님.”
파엘라미엔과 스탈리나가 고개 를 살짝 숙였다.
“리네 언니.”
예니카리나 역시 생글생글 웃 으며 알은체를 해 왔다.
“또 뵈어서 기쁘네요,공주님들 ”
아리스티네는 조용히 빈 의자에 앉았다.
유치하게 이제 자리를 없애는 짓은 하지 않는가 보다.
“왕궁이 불편하진 않을지 걱정이 많습니다,황녀. 편히 잘 지내고 있나요?”
자신은 아리스티네를 이 왕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지가 선명히 읽혔다.
아리스티네는 그 뜻을 알아듣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 집이 되었는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폐하. 걱정 마세요.”
우리 집.
그 말에 왕후의 눈가가 잘게 경련했다.
하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미소지으며 심기를 감췄다.
“아직 적응하지 못했을까 걱정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무척 안심이 되는군요. 그럼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편히 하대해도 괜찮겠지?”
당장 노선을 바꿔 바로 하대하 며 아래로 보는 게 과연 왕후다웠다.
시모가 며느리에게 하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아리스티네는 여전히 실바누스의 황녀였다.
서로 공대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편히 말씀하세요,폐하.”
아리스티네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하자 도리어 왕후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리네 언니,결혼 축하해요. 식장에서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인사드리지도 못했네요. 서운했어요?”
“아니,괜찮아. 나도 정신없었으니까.”
“그래요. 정신없으셨을 만하죠. 그날 봐서 아시겠지만,우리 아이루고의 국민성은 굉장히 활달하고 활기차서 별거 아닌 자그마한 일에도 쉽게 기뻐하고 환호해요. 참 긍정적인 사람들이지요?”
예니카리나가 호호,웃었다.
그러니까 ‘별거 아닌 자그마한 일인’ 아리스티네의 결혼에 백성들이 환호한 건 그저 국민성 때문이라는 뜻이다.
딱히 그 결혼이 특별해서 그런것도,사람들이 아리스티네를 좋아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소리.
속이 빤히 보이는 시비에 아리스티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응,그래. 네 사진 신문에 난 거 잘 봤어.”
그 말에 생글거리던 예니카리나의 얼굴이 확 굳었다.
사람들이 호응해 준 ‘별거 아닌 자그마한 거’.
그게 예니카리나의 사진이라는 거였다.
순식간에 자기가 했던 말로 역공을 당했다.
“사람들이 기뻐하고 환호하더라.”
네 말대로.
아리스티네가 부들거리는 예니카리나의 얼굴을 보며 피식,웃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