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침............”
파엘라미엔의 입술이 조개처럼 닫혔다.
“.............”
“.............”
“.............”
다실에 완벽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까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리스티네와 타르칸이 신혼 첫날밤에 침대를 부수다 못해 박살냈다는 것은 이 자리의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스탈리나가 힐끔힐끔 아리스티네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숨기지 못 한 호기심이 엿보였다.
“크홈!”
“홈홈.”
공주들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얼굴이 살짝 붉었다.
이들 모두 다 미혼이었고,호기심이 많을 나이였다.
“……그렇군.”
왕후는 그냥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유부녀이기에 궁합의 중요성을 정말 잘 알았다.
첫날밤에 침대를 부술 정도면 절대 척을 질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밤이 되면…….
“크홈! 으흠!”
왕후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제 여름이 오려는지 방 안이 조금 더웠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어색하고 민망한 침묵이 한참 흐르는 동안 정작 폭탄을 던진 장본인인 아리스티네는 앞서 제조한 밀크티를 맛있게 마시고 있었다.
파엘라미엔이 침묵을 뚫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그러니까,역시 하미르 오 라버니는 대단하세요. 마력석 광산을 맡다니,부왕 폐하께서 가장 신임하는 자식이란 뜻이겠죠”
마치 아리스티네의 말을 못 들었다는 둣 아까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다.
“그, 그러니까요. 우리 하미르 오라버니가 뛰어나다는 것을 부왕께서도 잘 아시는 거죠.”
“그래,우리 하미르는 예전부터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니까.”
예니카리나와 왕후가 파엘라미 엔의 말을 받았다.
마치 방금 침대 어쩌고 했던 일은 없었던 일인 양 치부하는 모습이었다.
“누구와 달리 고귀한 피를 이어받아서 더 그렇지요.”
스탈리나가 타르칸을 깎아내리는 말을 보태자 예니카리나는 진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천한 피를 타고난 사람은 도저히 맡을 수 없는 일이니 까.”
“애초에 천출이 남 위에 군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고.”
예니카리나와 스탈리나가 키득 키득하며 아리스티네를 쳐다봤다.
자,어때?
이번에야말로 모멸감에 말도 못 한 채 부들부들 떨겠지?
아니면 못 참고 꽥꽥 소리를 지르려나?
그러나.
“풋……!”
아리스티네가 웃음을 터트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도 않고 아하하,은방울이 딸랑인 것처럼 청량한 웃음소리를 흩뿌렸다.
예니카리나와 스탈리나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리스티네의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겨우겨우 웃음을 멈춘 아리스티네가 빤히 자신들을 쳐다보는순간,흑 치고 들어오는 깨달음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 자리에서 아리스티네보다 더 고귀한 피를 지닌 사람은 없다.
천 년을 넘게 군림해 온 실바누스 황가.
몸에 붉은 피 대신 황금이 흐른다는 귀하디귀한 가문.
아리스티네는 그 적통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평원의 지배자인 아이루고의 왕족이기까지 했다.
가장 귀한 두 가문 모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 세상에 아리스티네가 유일했다.
그걸 깨달은 예니카리나와 스탈리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야말로 태양 앞에서 촛불이 밝다 자랑한 격이었다.
달칵一.
아리스티네가 소서에 찻잔을 올려 두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밀크티를 음미하는 그녀의 모 습은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다.
그럴수록 예니카리나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아리스티네는 누가 내 앞에서 혈통 이야기를 꺼냈냐는 말조차 할 필요 없었다.
그저 웃음 한 번으로 모두를 입 다물게 했다.
‘내가 왜……’
예니카리나가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황녀 취급도 못 받던,버림받아 유폐당한 황녀라고 부러 더 비웃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아리스티네는 예니카리나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재미난 이야기였어요. 그 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기네요.”
아리스티네가 테이블에 몸을 살짝 기대며 말했다.
“혹시 지금 천한 피니,천출이니 운운한 게 제 남편 이야기인가요?”
대놓고 물어보는 말에 사람들 이 헉,숨을 삼켰다.
부끄러워서라도 아닌 척,모르는 척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아리스티네에게서는 부끄러움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 었다.
여기서 맞다고 해야 하는지, 부정해야 하는지 공주들은 감을 못 잡았다.
대놓고 이름을 거론하며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은 품위에 어긋난 짓이었다.
“그래.”
그들이 망설이는 사이 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아니라고 말해 줄 줄 알 았니?”
왕후가 아리스티네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 질문을 던져서 타르칸의 욕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으려 하는 아리스티네의 수작이 빤히 보였다.
부정했던 일에 대해 더 입을 얹기는 힘드니까.
‘시도는 좋았지만 내게는 안 통해.’
왕후가 우아하면서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틀린 이야긴 아니지 않니? 타르칸이 봉작도 못 받은 어미에게서 난 자식이라는 건 사실이니까.”
“흐음.”
아리스티네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후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태 도였다.
“그것참 이상하네요.”
톡톡,아리스티네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이루고 왕가는 마수 평원의 지배자로 오랜 시간 그 맹위를 떨쳐왔죠. 저는 이로써 왕가의 고귀한 혈통은 증명되었다고 보는데요.”
왕후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실바누스 황가의 고귀함을 부정하는 바는 아니지만,그렇다고 아이루고 왕가의 순혈을 무시할 순 없는 법이야.”
“무시는 제가 아니라 왕후 폐 하께서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요?”
“뭐라?”
왕후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리스티네는 생긋 웃음을 지 어 보이며 나른하게 물었다.
“타르칸은 국왕 폐하의 친자식이 아닌가요?”
허를 찌르는 아리스티네의 말에 왕후가 멈칫했다.
아리스티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밀어붙일 때 확실히 밀어붙여야 한다.
“천한 피,천출. 이 모든 게 제 남편을 지칭하는 거라고 하셨지요.”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 람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 보았다.
“여러분들은 지금 부왕 폐하의 직계가 천한 피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건가요?”
“.............”
공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이 언급된 이상 왕후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리스티네는 그들을 더 압박 하지 않고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물론 저는 아니라고 믿어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하물며 이들은 숨어 사는 생쥐가 아니라 이 왕궁의 터줏대감 들이었다.
역시 파엘라미엔과 예니카리나,그리고 왕후는 섣불리 말을 얹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신중해진 것이다.
‘하지만 스탈리나는 어떨까?’
“다,당연히 아니지요! 황녀님께서도 참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 감히 부왕 폐하의 혈통을 천하다 하겠어요.”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에 아리스티네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아니라면 앞으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 니다. 저는 괜찮지만一.”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칼날 처럼 날카로운 빛을 품고 주변 을 둘러보았다.
“남들이 오해할까 저어되니까요.”
굳어 있는 왕후와 공주들을 확인한 아리스티네가 사르르 웃었다.
봄날 햇볕처럼 무해한 미소였다.
“네프테르 폐하의 친자가 천하다는 뜻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그런 말을 할 필요 없겠죠?”
그 말은 즉,다시 한번 타르칸의 혈통을 천하다며 걸고넘어지면 네프테르의 직계가 천하다는 뜻으로 간주하겠다는 소리였다.
왕후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가 바르르 떨렸다.
‘멍청한 스탈리나!’
노기 가득한 시선이 스탈리나 를 향했다.
아리스티네가 이 일을 네프테르에게 가져갈 리가 없다.
당황이 가시자 바로 깨달았다.
아까는 순간적으로 나온 왕의 혈통 이야기에 놀라 미처 생각 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뒤에서 타르칸의 혈통을 놓고 뭐라 하는 것을 네프 테르가 모를까?
당연히 알고 있다. 그게 그의 오랜 고민거리일 정도로.
하지만 대놓고 앞에서 뭐라 한 게 아닌 이상 그냥 내버려 두었다.
총애하는 아들보다 왕에게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권을 주장하는 여러 단체를 규합하는 것이다.
아리스티네가 왕후와 공주들이 타르칸을 무시했다고 일러 봤자, 왕에게 정치적 감각이 없다는 냉정한 평가를 듣게 될 뿐.
‘그런데 어리석은 스탈리나가 망쳤어!’
천출 소리를 하면 네프테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더 이상 대놓고 말하기 힘들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아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또,뭐!’
왕후는 체면도 잊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타르칸의 모비께서는 정식으로 봉작을 받은 후궁이십니다. 왕후께서 직접 내리시고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왕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잊겠는가.
네프테르가 그 천하디천한 평민이 임신했으니 봉작을 내리라 고 했던 순간을.
그 전까지는 평민 따위를 후궁으로 들이고 봉작을 내리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코웃음 쳤다.
하지만 그 천것이 황손을 품었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천것의 아들은 장성해 감히 제 아들의 자리를 위협 하는 존재가 되었다.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리스티네의 저 여유로운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하지만 왕후는 애써 웃음을 덧그렸다.
“그래,그랬지. 하지만 타르칸을 임신했을 당시에는 봉작을 받지 못했어.”
눈치를 보던 파엘라미엔이 얼른 왕후의 말을 거들었다.
“타르칸이 세상에 나온 이후에야 후궁이 되셨으니,그 전에 태어난 타르칸이 봉작도 받지 못 한 모친을 두었다해도 틀린 말은 아니죠.”
아리스티네는 눈살을 찌푸리며 파엘라미엔을 바라봤다.
‘너 그거 진심이니? 난 네가 좀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런 시선을 받은 파엘라미엔의 얼굴이 살짝 홧홧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지금 아리스티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왕후의 심기였다.
“그래,파엘라 공주의 말이 옳아. 그러니 타르칸의 모친에 관 련해서는一.”
“왜 그렇게 타르칸을 못 깎아 내려서 안달이에요?”
아리스티네가 왕후의 말을 툭, 끊었다.
아리스티네가 일부러 의도해서 왕후의 속을 긁으려고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너무너무 억울했다. 타르칸이 이렇게까지 미움받는다는 게.
이미 타르칸의 모친은 사망한 지 오래다.
그는 이런 곳에서 홀로 버텨냈던 걸까.
“아무리 후계 자리를 놓고 대립해도 그렇지. 이런 자리에서까지 뒷말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어요?”
귀족들을 선동하거나 보는 눈이 있을 때 그러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저를 창피 주는 거? 난 그런 거에 하나도 상처받지 않아요. 나한텐 아무 느낌도 없어서 간지럽게도 안 느껴져.”
이 사람들은 유폐당했다는 게 그냥 궁에 강제로 칩거당한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타르칸은 이 나라를 구한 영응이에요. 마수에게서도,실바누스에게서도 지켜 냈죠.”
이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왕후는 타르칸을 더더욱 증오하게 되었지만.
“저는 제 남편이 자랑스럽고, 제 남편과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진짜였다.
모두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그녀를 희생양이라 불렀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정말로, 희생양이 되어서,타르칸과 만나 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타르칸은 자존심이 세고,때론 유치하게 말싸움하고, 손이 많이 가고,수줍음이 좀 많고,약간 변…… 아,이건 아니고.”
아리스티네가 아차,하고 입을 다물었다.
파엘라미엔의 동공이 흔들렸다.
유치하게 말싸움하고 손이 많이 가고 수줍음이 많다니.
지금 아리스티네가 말하는 사람이 제 이복동생 타르칸이 맞나?
그녀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황당한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자존심 빼고는 타르칸과 정반대되는 말만 하고 있지 않는가.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타르칸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왕후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그래서,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지?”
진짜 묻는다기보다는 한 마디 만 더 하면 당장 너를 찢어 죽이겠다는 어투였다.
파엘라미엔이 급히 아리스티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은 적군이라는 것도 잊었다.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음,얘기 가 잠시 샜지만……” 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타국인,아니,적대국 사람이었던 저도 타르칸의 용맹함에 감탄하고 있는데一.”
파엘라미엔과 스탈리나가 겁먹은 얼굴로 왕후를 바라봤다.
아리스티네만이 평온하게 입술 을 움직였다.
“아이루고를 위해 피를 홀린 사람을 아이루고의 지도자가 무시해도 되나요?”
“뭐…… 라고.”
왕후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끓어오르는 겁화와 같았다.
“타르칸 역시 항렬상 왕후 폐하의 아들이죠.”
그러나 아리스티네는 멈추지 않았다.
“모후께서는 좀 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툭,
어디선가 이성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왕후의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까드득一.
의자에 거칠게 긁힌 대리석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왕후의 손이 획 위로 치켜 올라갔다.
반지를 한가득 낀 손이 벼락처럼 아리스티네에게 내리꽂히려는 순간,
“모후 폐하,지금 제 아내에게 손을 올리신 겁니까.”
맹수의 울음같이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