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첫 출근부터 바로 일 이야기로 들어가는 사원의 모습에 아리스티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도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아이루고 사람들과 체형이 확연 하게 다르시니 그에 맞춰서 비 전하만을 위한 새로운 장신구를.....
리트렌은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의 머릿속에 아리스티네가 장신구를 착용한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무척 아름다웠다. 아니,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제법 까다로운 공정이 들어가야 하겠지만,리트렌은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건.’
가슴속에서 알지 못할 술렁임이 피어올랐다.
왜 아리스티네를 보고 있으면 검이 떠오르는 걸까.
아이루고 대장장이라면 모두 검을 선망하고 열망했지만 리트렌은 달랐다.
그는 딱히 검에 집착하지 않고,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차근 차근 풀어 나갔다.
그런데 유일하게,그의 내부가 아니라 아리스티네라는 외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아리스티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번뜩이는 천재성을 지닌 그의 대장장이 혼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검을 만들라고.
은빛 머리카락이 검의 빛깔과도 같다고 생각해서일까?
‘하지만 날붙이는 비전하께 어울리지 않아.’
평화의 상징,오랜 전쟁의 종결을 가져온 수호의 여신,희망의 천사.
모두 아리스티네에게 붙은 수식어였다.
그리고 리트렌은 그 말에 가슴 깊이 동의했다.
그건 타르칸과 아리스티네의 정략혼 때문이 아니었다.
아리스티네가 그를 구한 순간.
절망에 빨려 들어가던 그를 건져 올렸던 순간,리트렌은 깨달았다.
이분이야말로,그를 구원할 사람이라고.
‘그런 분을 보고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날붙이를 떠올리다니.’
말이 되질 않는다.
물론 전사의 나라인 아이루고에서 검은 신성시되었다.
하지만 결국 검의 본질은 생명을 가르고 취하는 것이다.
“……래서,이런 식은 어떨까 합니다.”
복잡한 속과 다르게 리트렌은 차분히 아리스티네를 위한 장신구에 관해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리스티네와 눈이 마주치면 여전히 검이 떠올랐다.
그 어떤 검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날.
아리스티네가 칭찬했던 그 자그마한 단도처럼.
“와,굉장히 고심했구나. 아름다운 데다가 편해 보여. 역시 대 단해.”
도면을 들여다보며 아리스티네가 감탄했다.
리트렌은 멋쩍게 뒤통수를 쓸 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 가 떠올랐다.
“하지만,아니.”
아리스티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리트렌의 얼굴이 한순간에 시 무룩해졌다.
혹시,아리스티네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들이댄 것 일까?
길게 설명한 게 죄송했다.
“내가 착용할 걸 만들라고 널 섭외한 게 아니야. 그럴 거였으면 카탈라만에서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의뢰만 넣으면 되니까.
“저,그럼……”
“검을 두고 말이 많지. 사람을 지키는 데 쓰이는 물건이다,혹은 사람을 죽이는 흉악한 물건이다.”
리트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루고는 주로 전자에 초점 을 맞췄다.
“하지만 지키는 검이라고 해도 결국 살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 임은 부정할 수 없어.”
그렇기에 아이루고는 야만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아이루고 하면 떠오르는 게 검과 그 검을 들고 싸우는 전사들이었으니까.
리트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걸 알기에 아리스티네를 보 고 감히 검을 떠올리는 게 죄스러웠다.
“리트렌.”
차분한 음성이 그를 불렀다.
리트렌은 고개를 들어 아리스티네를 마주 보았다.
“나와 사람을 살리는 검을 만 들지 않을래?”
그리고 돈방석에 앉는 거야.
아리스티네는 찬란하게 미소지었다.
* * *
타르칸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회랑을 걸었다.
〈그럼 우리는 사업 이야기를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리스티네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더 있고 싶었으나 그럴 명분이 없었다.
타르칸은 그렇게 대장간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리트렌……. 분명 환영 연회 때의 그놈이야.’
〈저기,타르칸. 저 남자 누구야?〉
환영 연회에서 아리스티네가 한 남자를 보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봤던 게 떠올랐다.
리트렌에 대한 보고를 따로 받았지만 딱히 특별한 구석이 있는 놈은 아니었다.
아니,오히려 왜 아리스티네의 눈에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무능했다.
어렸을 땐 재능을 인정받아 카탈라만의 도장인 볼라튼의 눈에 들었지만,그게 끝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 재능을 잃어 이제는 카탈라만의 수치라고 불리는 자였다.
타르칸은 전사이기에 재능 있는 어린아이들이 커 가며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많이 봐 왔다-
재능은 허무하게 사그라지기도 하고, 빠르게 한계가 오기도 하고,꽃피우기도 힘들다.
리트렌도 그중 한 경우일 터.
‘그렇게 눈독 들일 놈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아리스티네가 처음 리트렌에게 관심 가졌던 건 대장간이 아니라 환영 연회에서 였다.
당연하지만 그때 리트렌은 대장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설마 실력이 아니라 생긴 게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타르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금갈색 고수머리와 유순해 보이는 살짝 처진 눈. 올리브색 눈동자.
순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대장장이답게 체격이 좋았다. 발달한 근육과 돋은 힘줄.
‘그런 외모가 취향인가?’
떠오른 생각에 타르칸은 코웃음 쳤다.
헛생각이다.
아리스티네는 똑똑한 여자였다.
그렇게나 사업을 생각하는데 설마 그런 것으로 사람을 뽑을까.
아니,아리스티네의 취향이 그렇든 말든 그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타르칸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날이 반쯤 뽑혀 나오며 낮게 울었다.
타르칸은 유리처럼 깨끗한 검 날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단 한 번도 외모에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거울을 볼 때조차 자신이 어떤 식으로 생겼나,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평생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전혀 다른데.’
리트렌과 타르칸은 생긴 궤가 달랐다.
타르칸은 벼린 검처럼 범접하지 못할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반면 리트렌은 부드럽고 서글 서글하니 인상이 좋았다.
거기에 반전으로 옷감 너머로 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한 가슴.
검집에 다시 검날이 들어갔다.
타르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까보다 움직임이 훨 씬 더 거칠었다.
타르칸의 손이 은근슬쩍 가슴 위에 자리 잡았다.
뜨겁고 단단 하고 탄력있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발달한 대흉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리트렌도 만만치 않았 었다.
전사들이 훈련은 잘하고 있는 지 살피러-혼내러-가야겠다.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타르칸 전하.”
또각,소리와 함께 아이루고에서 보기 힘든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흔들렸다.
타르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리스티네의 시녀들이 었다.
“어딜 그렇게 가시나요?”
“볕이 좋은데 차 한잔하시는 건 어떠세요?”
“저희가 곁에서 차 시중을 들겠사와요.”
콧소리를 내며 다가온 시녀들이 아양을 떨었다.
“.............”
타르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들을 내려다봤다.
시선을 받은 브로디가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타르칸에게 더 바싹 다가갔다.
조금 무서웠지만 그렇기에 더 매력적이었다.
타르칸의 시선만 으로도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전하.”
브로디가 타르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감촉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직여 근육을 살짝 더듬었다.
“하아,전하. 이리 오시어요. 이 브로디가 전하께 차를 대접 해 드리고 싶어요.”
타르칸의 금안이 브로디의 얼굴에 박혔다.
* * *
“……사람을 살리는 검이요?”
리트렌이 되물었다.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대체 그런 검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왜,있잖아.”
아리스티네가 어깨를 으쑥이며 그를 쳐다봤다. 정말 모르냐는 듯이.
그 말에 다시 생각해 보던 리 트텐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의료용 메스를 말씀하시는 건 가요?”
“정답.”
아리스티네가 씨익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료용 메스는 왜……”
아리스티네가 딱히 관심 가질 만한 분야가 아니었다.
기실,의료용 메스는 그다지 각광받는 상품이 아니다.
그야 외과적 수술을 할 때 쓰이니 수요는 늘 꾸준히 있다.
하지만 아이루고에서는 제대로 된 검이 아니라며 대장장이들이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낮잡아 보진 않았지만,외과적 수술이 실패했을 때 의사 중에서 메스 탓을 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괜한 비난을 받고 책임을 지는 경우까지 생기니 업계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아시겠지만 그쪽 분야에는 문제가 많아요. 다들 기피하는 데……”
“응,그래서야.”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오션.’
딱 뛰어들기 좋은 상태의 시장이다.
기존 메스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은 딱히 적극적으로 판매할 생각이 없다.
다른 물품이 별로 팔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메스라도 만들어 벌어먹고 사는 경우가 태반이다.
여기에 할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 뛰어들면 경쟁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세상일은 할 마음만 가지고 잘 풀리지 않는다.
‘나한테는 제왕안으로 확인한 전생이 있으니까.’
아리스티네는 홋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트렌이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라고 ? 아!’
깨달음이 그의 머릿속에 스쳤다.
“그렇군요,역시 비전하세요!”
“응,그래. 너도 이 가능성을 알아봤구나!”
떼돈 벌 가능성을!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리트렌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메스의 질이 더 좋아지면 분명 의료 사고도 덜 일어날 거고, 수술 실패도 줄어들 거고. 그러면! 사람들이 다시 건강해질 테지요!”
과연 평화의 수호 여신,희망의 천사!
리트렌의 눈이 감격으로 반짝 반짝 빛났다.
“병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비 전하의 마음……!”
아리스티네는 얼떨떨한 눈으로 리트렌을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그냥 돈을 벌고 싶을 뿐인데?’
왜 이야기가 이리로 튄단 말인가.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문제가 많다느니,다들 기피한다느니 그런 말이나 하고.”
“저어,리트렌……”
“비전하께서는 오히려 그렇기 에!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그 힘든 분야에 뛰어들겠다는 말씀인데.”
“어,음……”
아니야, 그거 아니야.
문제 많고 다들 기피해서 뛰어 들겠다는 건 맞는데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건 절대 아니야.
아리스티네는 그 말을 하지 못해 입술만 달싹였다.
무언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
‘그야 사람들의 병이 더 잘 치료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 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소였다.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이 될 황금이었다.
“저를 이렇게 또 일깨워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어,으응……”
이제 와서 다 오해라고 하기에 는 너무 늦었다.
“사람들을 굽어살피는 비전하 의 마음에 탄복했습니다. 이 리트렌은 언제나 비전하와 함께할 것입니다.”
“으응,그래……”
아리스티네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뒷걸음치다가 충성도만 높인 것 같은데.
의욕을 갖게 된 건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민망하지……’
“그럼 시범 삼아 메스를 한번 만들어 보도록 할까요?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대강 어떻게 생겼는지 압니다.”
리트렌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타르칸의 궁에 있는 대장간은 과연 설비가 좋았다.
카탈라만처럼 대규모 공방은 아니었지만,리트렌이 쓰기에는 충분했다.
제작보다는 주로 전사들의 검을 수리하는 용도로만 대장간을 사용한다고 해서 크게 기대 안 했는데,마력 풀무도 최신품이었다.
이 정도면 시제품을 만드는 데엔 딱히 추가 인력이 필요 없을 터다.
리트렌이 선철을 집는데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메스는 조금 달라.
“다르다고요?”
“응,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메스를 만들 거야.”
리트렌의 시선이 아리스티네를 향했다.
아리스티네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해.”
“이건......”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본 리트렌의 눈이 놀라옴으로 커다랗게 벌어졌다.
제왕안.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지고의 눈.
그러나 아리스티네의 제왕안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유년 시절,황제는 아리스티네가 제왕안을 발현하도록 지속적으로 학대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때 아리스티네는 이미 제왕안을 개안했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도움이 된 일이 있었다.
아리스티네가 황궁의 심처에 버려지다시피 홀로 유폐당한 것은 고작 여섯 살.
아무도 없이 혼자 살아남을 순 없는 나이였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