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정신과 몸,양쪽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 아리스티네의 잠재력은 한 번 더 진화했다.
그 결과,아리스티네는 전생마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본인이 원하는 순간을 스스로의 의지대로.
‘아마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라서 그런 걸까.’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추측했다.
이런 사례가 없었으니 정확한 이유는 알기 힘들었다.
역사 속에 제왕안의 소유자가 나타난 경우는 몇 안 된다.
그중에서 전생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리스티네가 유일할 터였다.
황제는 아리스티네가 제왕안을 개안하지 못한 것에 분노해 그녀를 유폐했다.
그런데 그가 포기함으로써 제왕안의 능력이 오히려 역대 그 누구보다 강해졌으니 참 아이러니 했다.
‘하나도 고맙지 않지만.’
제왕안을 통해서 ‘보는’ 것이라 그런지,자신의 전생인데도 감정이 생생하진 않았다.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사람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녹화한 뒤,원하는 부분을 재생 해 보는 감각…… 이라고 해야 하나?’
전생의 성격 역시 지금의 자신과 거리가 멀었다.
특히,아픈 부친을 위해 간을 이식해 주기로 한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라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 겠지.’
그래도 타인보다 더 가깝게 느 껴지는 건 전생의 자신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히 전생의 삶을 가장 많이 보며 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거지.’
전생의 부친이 오랜 기간 투병 했기에 의료 기기가 굉장히 친숙했다.
또,전생의 그녀 역시 간이식을 준비하느라 수술 영상을 봤다.
‘덕분에 의료용 메스에 대한 자료는 중분해.’
환생했는데 전생을 기억하는 것뿐이라면 절대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스를 본 기억은 나는데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겠지.’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다르다.
과거,현재,미래와 달리 전생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으니까.
아리스티네는 수술 영상과 병원,드라마,다큐멘터리 등에서 봤던 메스를 수면에 비춰 가며 따라 그렸다.
그 결과 여러 종류의 메스가 꽤 정확하게 표현됐다.
“손잡이가 길고 날이 짧네요?”
그림을 살펴본 리트렌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응,맞아.”
이곳의 메스는 모두 단도와 같은 형태였다.
“왜 이런 형태로……”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서야. 사용할 때 딱히 날이 넓을 필요도 없잖아? 만약 필요하더라도 그 때만 단도를 쓰면 되니까.”
아리스티네가 본 메스 중에 단도처럼 날이 넓은 건 없었지만, 의술에 대해 확실히 아는 건 아니니 덧붙였다.
“정밀도라,과연……”
“조각도도 이런 식으로 만들잖아. 연필처럼 쥐는 게 더 정밀하게 다룰 수 있으니까.”
“역시 비전하께서는 정말 대단하세요.”
리트렌이 감탄했다.
“조각도를 보고서 그 누구도 의료용 메스를 이런 식으로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눈빛이 부담스러워 아리스티네 는 시선을 피했다.
아리스티네가 고안해 낸 게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연필처럼 쥐는 조각도가 이미 있는 판국에 메스 역시 그렇게 만드는 게 뭐 그리 신선하고 새로운 일이겠는가.
‘메스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조금만 생각할 의지가 있었다면 진작 만들었겠지.’
하지만 대게 실력이 부족해 다른 물건은 팔리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메스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그들에게 메스란 팔고 나서도 의료 과실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따라오는 골칫덩어리 였을 터.
당연히 메스를 만들 때 고민할 의욕도,의지도 없었을 거다.
“조각도를 보고 단순하게 생각 한 거잖아. 별거 아니야.”
“아니요.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가 큰 변화를 만들지요.”
리트렌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 했다.
“그렇게 개발된 물건이 세상에 나오면 ‘아,내가 왜 그 단순한 걸 더 먼저 생각하지 못했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죠. 하지 만 사실 그걸 생각해 내는 게 대단한 거죠.”
“으으음, 그건 맞는 말이지 만……”
아리스티네 역시 그런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형태의 메스는 아리스티네 본인이 생각해 낸 게 아니라,전생 지구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거라 칭찬받을수록 민망 했다.
멋쩍어하는 아리스티네를 본 리트렌은 다시금 감탄했다.
‘이렇게 능력이 뛰어나신데 거기에 겸손하시기까지 하다
정말 알면 알수록 대단하신 분이었다.
이런 분의 곁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영광으로만 느껴졌다.
〈나는 너를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로 만들 거야.〉
리트렌의 가슴이 기대로 부풀어 올랐다.
그땐 희망을 갖고 싶었고,아리스티네가 그를 구원해 주었기에 그 말에 압도당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아리스티네에게 감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야금술에 문외한 인 아리스티네가 대륙 최고의 장인인 볼라튼조차 포기한 그를 최고의 장인으로 만들어 준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그게 현실이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확신처럼 강하게.
“하아, 전하. 이리 오시어요. 이 브로디가 전하께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타르칸의 금안이 브로디의 얼굴에 박혔다.
브로디의 뺨이 붉어지고 눈빛은 꿈결처럼 몽롱해졌다.
그녀의 입술에서 뜨거운 숨이 홀러나오는 찰나.
“꺄악!”
쿠당탕一!
거칠게 밀려난 브로디는 타르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귀족 영애로 살아온 그녀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팔,다리,어깨.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꺼먼 멍이 들리라.
“브,브로디 영애!”
다른 시녀들이 놀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피가..!”
공들여 관리해 온 하얀 팔이 바닥에 쓸려 핏방울이 맺혔다.
시녀들이 어쩔 줄 몰라 하고있을 때였다.
저벅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타르칸은 바로 앞에 쓰러져 있 는 브로디를 무심하게 지나쳤다.
“ 전하 ! ”
시녀 한 명이 항변하듯 타르칸 을 불렀다.
황금빛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그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시녀들은 그 시선을 피할 수조차 없었다.
쿵광쿵광 심장이 미친 듯이 뛰 고 등골에 차디찬 서리가 어린 것만 같았다.
타르칸의 눈동자는 그녀들을 바라봤던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스윽 움직였다.
뚜벅,뚜벅.
일정한 소리와 함께 그가 점점 멀어져 갔다.
시녀의 부름에도 걸음을 멈춘 적 없으니 시선이 마주쳤던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팔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시녀들은 말라 버린 입 안을 축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타르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무시.
타르칸은 자신들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시녀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Chapter 18. 은근슬쩍 단추를
“역시 대단해!”
완성된 메스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아리스티네는 감탄했다.
햇빛을 받은 칼날이 은빛으로 반짝 빛났다.
단도를 쥐는 것과 다르게 연필 잡듯이 쥐자,서늘한 철의 감촉이 손에 착 붙어 왔다.
‘그래,이거지.’
훨씬 안정감이 있다.
아리스티네는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이에 대고 메스를 그었다.
한번 슥 긋는 것이 아니라,연필로 선을 긋듯 원하는 모양대로 그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도 나지 않고 메스가 움직였다.
단 한 번의 걸림도 없이 매끄럽게.
어찌나 절삭력이 좋은지 종이 아래에 따로 덧댄 거칠고 두꺼운 천이 함께 잘렸다.
아주 살짝만 더 힘을 주면 테이블에까지 흠집이 날 것 같아 아리스티네는 조심조심했다.
그녀를 위해 준비된 테이블은 커다란 카넬리안을 통으로 깎아 만든,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리트렌이 만든 메스는 그립감과 절삭력 모두 우수하니 간단한 테스트만 거치면 바로 판매품 생산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돈방석에 앉는 거지!’
마음이 설랬다.
딸깍.
메스를 내려놓은 아리스티네가 테이블가에 서 있는 리트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만들고서도 리트렌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게 재밌어서 아리스티네는 조금 뜸을 들였다.
“리트렌.”
“네,비전하.”
리트렌이 한층 더 긴장했다. 사근사근한 얼굴에 답지 않게 미간 주름이 잡혀 있다.
아리스티네는 굳은 얼굴로 그 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받아들 일지 모르겠지만,직접 써 보니까……”
꿀꺽,리트렌의 목울대가 위아 래로 요동친다.
“정말 너무 좋다!”
딱딱했던 게 거짓말처럼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만개했다.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서 다루기 쉬운데,절삭력까지 뛰어나다니!”
아리스티네가 잘린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아……”
리트렌은 겨우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한 박자 늦게 그가 고개를 숙 였다.
“감사합니다.”
알아주었다.
인정받는다는 건 이런 거였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감사하긴,내가 고맙지. 이런 좋은 상품을 만들어 줘서. 날붙이를 잡아 본 적 없는 내가 다 루는데에도 아무 문제 없으니 의사들은 더 잘 다룰 거야.”
“네,비전하의 뜻대로 이걸로 더 많은 환자들이 살아날 수 있겠지요.”
“음...........”
아리스티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무게를 가볍게 만든 건 그편이 더 섬세하게 다루기 좋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응,무게까지 압력이 들어가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내가 말 한 대로만 만드는 게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했구나.”
항상 골몰하고 연구한다.
이건 리트렌의 방에 있던 수많은 합금을 통해 보았던 특성이었다.
그의 재능을 더 갈고닦아 보다 높은 경지로 이끌어 준 특성.
‘그리고 앞으로도 더 발전하겠지.’
아리스티네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직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뽑았어.’
사장이 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 가 직접 발전시키는 직원이라니.
“역시 넌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거야.”
리트렌의 빨이 기쁨과 부끄러 움으로 살짝 붉어졌다.
“……비전하께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후후! 물론 그렇게 말은 하겠지만!”
아리스티네가 자신만만하게 착,손가락을 세웠다.
“성과급은 있어야지. 그렇지?”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트렌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아,저는 괜찮은데……. 정말로 비전하께 도움이 되려고……. 이미 전에 주신 돈도 있고.”
아리스티네는 빈말로 리트렌을 스카우트한 게 아니었다.
리트렌의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큰돈을 이미 계약금으로 치루었다.
대장간의 수치로 취급당하던 리트렌은 이렇게 많이 받을 수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을이 어떻게 갑을 이기겠는가.
갑의 의지대로 어마어마한 돈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계약금이고 이건 성과급 이지!”
아리스티네는 자랑스럽게 서랍을 열고 준비해 뒀던 금일봉을 꺼냈다.
무엇으로 사람을 이끄는 게 가장 올바른가.
훌륭한 인품? 압도적인 카리스 마? 탁월한 능력?
다 틀렸다.
‘돈이지!’
자고로 사람은 돈으로 부려야 하는 법!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노동력 착취를 위해 시기적절할 때마다 돈을 먹여야 한다.
“자,수고했어.”
“아니,그래도……”
리트렌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 이 되었다.
‘비전하께 도움이 되면 그걸로 만족한다’라는 말을 아리스티네는 그저 아부나 빈말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리트렌은 진심이었다.
이걸 받으면 정말 빈말이었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나 팔 아파.”
아프다는 말에 리트렌은 깜짝 놀라 서둘러 주머니를 받았다.
아리스티네의 팔이 너무 가늘 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리트렌은 주머니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순간 아차,했다.
하지만 이미 손에 있는 걸 다 시 돌려 드릴 수도 없는 법이었다.
왕자 비께서 친히 하사하시 는 걸 거절하는 것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리트렌은 어쩔 수 없이 주머니를 받기로 했다.
제법 묵직했다.
“여기서 열어 봐도 돼.”
권유이긴 했지만 어쨌든 윗사람의 말이었다.
리트렌은 살며시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아리스티네의 오해가 깊어지는 것 같아 조금 시무룩했다.
그러나 주머니 안에 든 것을 확인한 순간,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치 칠면조 힘줄로 만든 개껌을 발견한 강아지 같은 얼굴이 었다.
‘……열심히 해야지.’
리트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도 사람이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큰 액수였다.
아리스티네는 보이지 않는 꼬리를 정신없이 휘휘 젓는 리트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삥을 뜯…… 아니,합의금을 받아 내길 잘했어.’
기사들은 실바누스에 도착하자마자 아리스티네에게 막대한 피해 보상금과 합의금을 보내왔다.
모르긴 몰라도 있는 것,없는 것 탈탈 다 털었을 것이다.
‘목숨값보다는 싸지.’
고자에, 빈털터리에,기사 직위 까지 잃었다.
거기다 황제의 진노도 피할 수 없을 테니 앞으로 인생이 꽤나 고달플 터였다.
그놈들의 재산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첫 직원의 배 속으로 들어가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역시 마음은 돈으로 표현해야 하는 법이야!’
사과도,고마움도!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