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리스티네는 마차에서 내려 신기한 기분으로 연무장을 둘러 봤다.
‘생각보다 훨씬 넓네.’
실바누스의 연무장 규모와 차원이 달랐다.
부지도 훨씬 넓고 건물도 여러 채인 데다가 훈련장의 용도 역시 더 세분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실바누스는 황궁 통합 연무장이었고 여기는 왕자궁의 연무장인데도 규모가 이렇게 다를 줄 은 몰랐다.
‘물론 다른 왕자가 아니라 타르칸의 궁이니 이런 거겠지만.’
달군 쇠 냄새가 날 것 같은 옹 장한 건물이 드넓은 부지의 중심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려 하는데,건물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선두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익숙했다.
“타르칸?”
타르칸은 잠시 아리스티네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여름에 가까워져 가는 정오의 햇빛은 나날이 그 찬란함을 더 하고 있었다.
그 속에 서 있는 아리스티네의 모습은 유독 더 생생하고 선명 했다.
라일락 꽃물이 든 것 같은 은 빛 머리칼에는 햇빛이 깃들어 있었고,드러난 팔은 눈부시게 희었다.
금 허리띠와 암 링,바디 체인, 투명도 높은 유색 보석과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비단.
그 모든 것들이 아리스티네에 게 완벽하게 어울렸다.
늦봄의 향기와 초여름의 싱그 러움을 담은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타르칸은 멀찍이서 이곳을 바 라보는 전사들이 모두 제 아내에게 넋을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지?”
타르칸은 아리스티네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의 시선이 아리스티네의 뒤 에 서 있는 궁인들을 향했다.
벨벳으로 만든 함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벨벳함의 정체는 뭔지 모르겠 지만 바구니는 확실했다.
식후 디저트를 가져왔나 보다. 같이 먹자고.
타르칸의 입꼬리가 썰룩했다.
“아,혹시 방해됐어? 점심시간 이라고 들어서 온 건데.”
아리스티네가 걱정스레 물었다.
다가오는 타르칸의 표정이 좋 지 않았던 게 신경 쓰였다.
“딱히 방해는 아니야. 아직 시간도 꽤 남았고.”
전혀 남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다 끝나가는 참이다.
전사들은 모두 믿기지 않는 눈 으로 타르칸을 바라봤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니 자신의 눈과 귀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래? 다행이다.”
아리스티네가 웃었다. 햇살이 살짝 솟은 그녀의 뺨 위를 수놓았다.
“그럼 사람 좀 빌려 갈게.”
그녀의 말에 타르칸이 왼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
‘……사람을 빌려 간다고?’
이건 그의 예상 어디에도 없던 말이다.
“무칼리 경.”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의 뒤에 서있는 무칼리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비전하.”
무칼리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며 아리스티네를 향해 슬쩍 허리를 굽혔다.
반사적으로 마주 미소 짓긴 했 지만,속으론 진땀이 흘렀다.
‘왜,왜 이 상황에서 나를……’
아리스티네가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역시 오랜만에 보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라는 게 말이지……’
아무리 눈치 없는 무칼리도 알 수밖에 없었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주군의 시선에 이대로 화상을 입을 것 같았으니까.
“오랜만이야.”
“예에,오랜만이오. 그냥 그게 반가워서 인사하신 건가 보오. 딱히 이 무칼리에게 볼일이 있진 않을 테니.”
볼일이 없을 거야. 없어야만 해.
그런 속마음이 뒤에 생략되어 있는 말이었다.
무칼리는 아리스티네에게 눈짓했다.
‘주군을 뵈러 온 거라 믿소! 안 그러면 이 무칼리는 죽소!’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너무나 가뿐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칼리 경을 보러 온 건데?”
무칼리는 타르칸의 시선에 목 이 졸렸다.
그저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게 아니라,진짜 시선에 어떤 물리력이 있어서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사들도 몸을 사리며 슬슬 타르칸의 눈치를 봤다.
오로지 아리스티네만이 해맑게 웃으며 무칼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디저트도 가져왔어. 기대해도 좋아. 얘기하면서 먹자.”
“그,비전하.”
“그리고 무칼리 경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어.”
아리스티네가 까치발을 들고 목소리를 낮춰 무칼리에게 속닥속닥했다.
타르칸의 시선이 더 뜨겁게 타올랐음은 당연했다.
무칼리는 파스스 재가 되어 흩날렸다.
* * *
“그러니까 이게 메스라는 거지?”
“완전히 형태가 다른데요?”
전사들은 모두 부상에 친숙한 지라 외과용 메스에도 익숙했다.
그들은 벨벳함에 놓여 있는 메스 여러 자루를 들여다보며 이러저러한 말을 주고받았다.
아리스티네는 덩치 커다란 전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빼꼼 구경하는 것을 바라보다 흠,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원래 무칼리 경과 둘이 만날 생각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무칼리는 사색이 되었고, 다른 전사들도 창백해져선 자신들에게도 비전하와 함께할 영광을 달라 아우성 쳤다.
뭔가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마치 죽음이 코앞에 드리운 순간,전우를 구하려고 하는 듯한 결사가 느껴졌다.
‘왜 그렇게까지……?’
전사들은 전우애가 깊다더니 모든 것을 함께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아리스티네는 고민했다.
메스 디자인이 유출되는 것은 마음에 걸렸지만,그래도 이 자리에 모인 것은 타르칸의 최측근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걸 무칼리에게 보여 주려고 했다고.”
타르칸이 낮게 읊조렸다.
‘왜 내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리스티네가 제가 아니라 무칼리를 보러 왔든 말든 무슨 상 관이란 말인가.
딱히 아리스티네가 저를 보러 오길 바란 것도 아니다.
“.............”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절대로 바라지 않았고,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칼리보다 사업 파트너인 자신에게 먼저 말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리트렌은 첫 번째 직원이라면서 그렇게나 챙겨 주더니,첫 번째 사업 파트너에 대한 예우는 이래도 되는 것인가.
타르칸의 눈빛이 뾰족해졌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에 타르칸은 울컥했다.
“왜?”
“무칼리 경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까. 같이 카탈라만에도 가 줬고.”
“그건 나도……!”
“응?”
“……아니다.”
타르칸은 팔짱을 낀 채 획 고개를 돌렸다.
‘쟨 또 왜 저러지.’
아리스티네는 어깨를 으쑥이곤 신경을 꼈다.
그녀의 최대 관심은 오늘 막 완성된 메스에 집중되었다.
“이 상태로 선보여도 기존의 메스에 혁명이겠지만.”
아리스티네가 상자 안에 담긴 메스를 들어 올렸다.
반짝,실내등의 빛을 받은 메스가 깨끗한 빛을 반사했다.
“그래도 그 전에 테스트는 해 보고 싶어.”
“테스트?”
타르칸의 물음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기존 메스와 형태만 다른 거니까. 그 형태를 완전히 뒤바꾼 게 대단한 거지.”
“응, 하지만 내가 메스에 대해 잘 모르잖아.”
기존의 메스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형태의 문제뿐이다.
단도 형태로 생긴 데다가 날이 두꺼워 정밀한 작업이 힘들다는 것.
아리스티네는 그 문제를 보완 해 메스를 만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면 출시 전에 보완하고 싶으니까.”
덧붙여 테스트해서 결과를 내 놓으면 이후에 의료 과실에 대한 실랑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터.
아주 좋은 증거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一.’
아리스티네는 씨익 웃었다.
“기존 메스에 비해 어떤 식으 로 좋은지,어떤 우위가 있는지 자료를 확실히 준비해 놓는 게 좋잖아?”
그야 누가 봐도 직관적으로 이 메스가 기존의 메스보다 월등히 좋다.
사람들 눈을 우선 사로잡게 되는 디자인부터 차별화되었으니까.
하지만 뭐든 객관적인 자료를 덧붙이면 더더욱 신뢰도가 높아지는 법이다.
타르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괜찮은 전략이군.”
“그렇지?”
아리스티네가 타르칸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어때, 나 이렇게 능력 있다고. 정말 괜찮은 파트너지?’ 하고 말하고 있었다.
타르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테스트하려면 사람을 모집해야 하잖아.”
“그렇지.”
타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내가 나설 때인가.’
무칼리가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특별 취급을 받고 있으니, 자신이 도와준다면…….
마침 아리스티네가 고민된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타르칸은 극적인 순간에 도움 의 손길을 뻗기 위해 타이밍을 쟀다.
“디자인 유출이 안 되는 사람으로 모집해야 할 텐데,그게 걱정一.”
갑자기 구경하고 있던 전사들 중 한 명이 자신을 가리키며 외쳤다.
“응?”
“저 여기 손가락에 사마귀가 났는데 이거 째야 합니다!”
“뭐?!”
“이 자식 치사하게……!”
주변에 있던 다른 전사들이 아우성을 치며 그 전사의 머리를 눌렀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그는 신경 쓰지 않으며 아리스티네에게 손을 들이밀었다.
무쇠 같은 손에는 과연 자그마한 사마귀가 나 있었다.
“이거 째야 하는 건가? 그냥 안 째고 다른一.”
“아니요! 째야 합니다! 무조건!”
그가 외치며 가슴을 당당히 폈다.
‘비전하께서 내게 관심을 주신다!’
그는 턱을 치켜들며 다른 전사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즐겼다.
“앗,저는 여기 염증을 째야 하는데!”
다른 전사가 제 뺨을 가리켰다.
아무리 봐도 째야 할 정도의 염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 그럼 저도!”
다른 전사는 멀쩡한 손을 내밀었다.
“왠지 피가 맑지 않은 느낌이라 살을 갈라서 피 좀 흘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리스티네는 흐린 눈으로 전사들을 바라봤다.
이들은 모두 타르칸의 최측근으로,실바누스군을 격퇴시키고 평원의 무시무시한 마수를 몰아 낸 자들이다.
그야말로 아이루고 최강의 무력.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나--.
‘이래도 괜찮은 걸까,이 나라……’
왠지 갑자기 엄청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이 사람들한테 당한 실바누스는 얼마나 바보인 거지…….’
애정 하나 없는 모국이었지만 이쯤 되니 조금 측은해지려 했다.
어서 자신을 메스로 찔러 달라 아우성치던 전사들은 뼛속까지 한순간에 얼리는 한기를 느끼고흠칫했다.
‘이 살기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국 확인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커다란 전사들이 바들바들 떨 며 돌아가지 않는 목을 돌려 살기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히이 익!”
그곳엔 괴물이 있었다.
마수보다도 더 흉악한 괴물이!
그늘진 얼굴로 금안을 번뜩이며 자신들을 노려보는 타르칸을 본 전사들이 깨갱 꼬리를 말았다.
자신의 열 배나 되는 몸집을 가진 마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전사들이 한순간에 울상이 되었다.
“응? 왜 그래?”
전사들의 이상한 반응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타 르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타르칸?”
타르칸이 여상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른한 얼굴이었다.
‘평소랑 똑같은데?’
별로 특별할 건 없었다.
아리스티네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전사들을 바라봤다.
전사들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 차마 믿기지 않는 끔찍한 것을 봤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리스티네는 더 아리송해졌다.
힐끔 타르칸을 봤지만,그는 불러 놓고서 왜 말이 없냐는 얼굴이었다.
“아,이거 먹으라고.”
아리스티네의 눈짓에 궁인들이 바구니에서 디저트를 꺼냈다.
무칼리가 저번에 스콘을 많이 먹어서 일부러 잔뜩 준비해 온 덕에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한 조각씩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봄 딸기가 가득 얹어진 근사한 생크림 케이크였다.
촉촉하고 폭신한 시폰 시트와 오늘 아침 목장에서 가져온 신선한 우유로 만든 생크림. 거기 다가 새콤하고 단 봄 딸기.
“진짜 맛있어. 우리 파티시에 정말 최고거든. 다들 먹어 봐.”
영업은 많은 사람에게 할수록 좋다!
‘비전하께서 손수 가져오신 케이크……!’
전사들은 황공해하며 케이크를 받았다.
커다란 그들이 디저트 플레이트를 잡으니 소꿉놀이용 접시처럼 자그맣게 보였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영광입니다,비전하.”
전사들은 한 입 거리로밖에 안 보이는 케이크 조각을 최대한 아껴서 포크로 살짝 떴다.
“이건..!”
전사들이 눈을 홉떴다.
아리스티네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때? 최고지?”
하지만 전사들에게 그 질문은 들리지 않았다.
‘이거 아무리 봐도 타르칸 전하의 명으로 섭외해 온 그 파티시에 솜씨 인데..
이런 기본적인 디저트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낼 수 있는 파티시에는 그밖에 없다.
‘전투 식량을 개발 중인 게 아니었나?’
‘왜 비전하의 디저트를 만들고 있지?’
전사들의 시선이 타르칸을 향했다.
타르칸은 태어나 처음으로,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