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비전하께서 알고 계신다고요? 어떻게……
의외의 말에 리트렌은 눈을 휘 둥그레 떴다.
왕자비께서는 정말 현명하시고 총명하신 분이지만 야금술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제련 한 번 해 보신 적 없는 분이 어떻게 녹이 슬지 않는 합금을 알고 계신단 말인가.
‘아니,비전하시라면……!’
다른 분도 아니고 아리스티네 비전하시다.
분명 확실히 알고 계시니 저렇게 말씀하실 터.
그 믿음에 화답하듯 아리스티네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응,진짜로 알고 있어.”
그렇게 답하면서 아리스티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야. 친숙한 금속이라서.’
아니었으면 화학이나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자신은 잘모를확률이 높았다.
전생의 자신이 어쩌다 신문에서 한 번이라도 스쳐봤길 기대 하면서 찾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지구,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거의 없는 금속이었다.
‘스테인리스 스틸!’
흔히들 스텐 혹은 스뎅이라고 줄여 부르는 것.
스테인리스 냄비나 스테인리스 텀블러,스테인리스 주전자 같은 생활용품부터 시작해서 자동차 부품이나 항공기,산업 설비에까 지 다양하게 쓰인다.
그리고 무엇보다一.
‘전생의 의료용 메스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지!’
진작에 소재를 신경 썼다면 좋았을 텐데.
‘날만 교체하는 일회용 메스. 거기다가 녹이 잘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스틸까지.’
완벽하다.
그야말로 이 시장의 판도를 단 번에 뒤엎을 수 있는 최강의 메 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스테인리스 스틸을 안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니야.’
대장간에 들어오기 직전,아리스티네는 제왕안을 통해서 스테인리스 스틸에 대해 꼼꼼히 조사했다.
만약 제왕안으로 보는 게 감각의 인지 영역이 아니었다면 사흘 밤낮을 찾아도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교과서,구겨 버렸던 스테인리 스 스틸 성분 표시 표,신문,인터넷 기사 등등.
교과서만 봐도 스테인리스 스틸이 철에 크롬과 니켈을 섞어 만든 합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비율은?’
비율을 찾기 위해 다른 장면을 훑어봤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어쩌다 비율이 적힌 장면을 찾아내도 장면마다 니켈과 크롬의 함량이 달랐다.
심지어 그 와중에 새로운 스테인리스 스틸 가공법에 대한 인터넷 기사 제목을 봤다.
그 말인즉슨,합금으로 가공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라는 뜻이다.
물론 전생의 자신은 기사를 클릭해 보지 않았다.
아마 그런 기사 제목을 스치듯 봤다는 기억조차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서 온갖 글을 한번 눈도장이라도 찍어 볼걸. 읽을 필요조차 없었는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스테인리스 스틸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전생의 자신이 스쳐 지나가며 본 정보는 그 정도로 끝이었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관련해서 전생의 자신이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딱 하나였다.
스테인리스 스틸 냄비와 양은 냄비로 끓인 라면 중 뭐가 더 맛있는지.
‘전생에서도 먹을 건 굉장히 좋아했구나. 난 내가 어렸을 때 부터 잘 못 먹어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쨌거나 스테인리스 스틸에 관한 조사는 성과가 있긴 했지만,고민을 더하며 마무리되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해.’
흑연을 가공해 4B, 2B, HB 등 다양한 강도의 연필심이 만들어 진다.
그처럼 스테인리스 스틸도 어떻게 가공하냐에 따라 성질이 달라질 터.
그러나 한정된 전생의 정보로는 의료용 메스에 사용되는 이상적인 합금 비율도,가공법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내게는 아주 든든한 조력자가 있지.’
아리스티네가 리트렌을 보고 씩 웃었다.
“리트렌.”
“네,비전하.”
“조금 지루하고 짜증 나고 어려운 과정이 될 텐데 그래도 나랑 같이 만들어 볼래? 새로운 합금.”
그 말에 리트렌의 얼굴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비전하. 저는 방에 틀어박혀서 수많은 합금을 만들며 실험해 보았지만,그 과정을 지루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짜증 났던 적은?”
아리스티네가 장난스레 물었다.
“그건 좀 있지요.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가 종종 있으니 까요.”
리트렌이 부끄럽다는 둣 웃었다.
“그러니 제게 가르쳐 주세요. 반드시 비전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저 같은 놈을 믿기 힘 드시겠지만, 꼭.”
리트렌의 올리브빛 눈이 올곧 게 빛났다.
승리와 평화를 상징 하는 과실의 빛깔다운 눈동자였다.
“리트렌.”
리트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 켰다.
그를 바라보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에 햇살이 물드는 것 같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나는 널 믿어.”
단순하지만 무게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리트렌은 그 묵직한 무게감이 기분 좋으면서도,버거웠다.
존경하는 스승님께 한숨만 안겨 드리고 선배와 동기,후배들에게 손가락질당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리트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저 그의 안에서 피어오르는 철의 노래를 계속해서 뽑아낼 뿐.
“저는 카탈라만의 수치라 불린 부족한 자입니다. 비전하께서 그렇게 신임할 만한 사람은……”
“내가 믿을 사람은 내가 정해.”
아리스티네가 툭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도 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 못 해?”
그럴 리가.
리트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아리스티네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으니 까.
〈난 내 눈을 믿어.〉
‘……정확히는 그렇게 말씀하셨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중해서 리트렌의 입술에 엶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믿어 달라며.”
“제,제가요?”
리트렌이 화들짝 놀라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제가 감히 왕자비께 그딴 망발을 했단 말인가?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말이 그 뜻 아니야?”
“아……”
리트렌은 탄식을 홀렸다.
꽁꽁 싸매 숨겨 왔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사실은 내가 믿어 줬으면 좋겠지?”
리트렌은 염치가 없어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스스로를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 봐.”
아리스티네가 그를 향해 웃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를 찾아낸 내 눈을 믿어.”
리트렌은 숨을 삼켰다. 손끝이 뜨거웠다.
그는 자신 앞을 막아서며 햇빛을 이고있던 아리스티네의 뒷 모습을 기억했다.
그녀가 뒤돌아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햇살이 마치 날개처럼 그녀의 등에서 뻗어 나오는 것 같았고, 닿은 손은 안온하고 상냥했다.
절대 잊지 못할 구원의 순간.
리트렌은 스스로를 믿을 순 없 었지만,그의 구원자는 믿을 수 있었다.
그녀가 믿으니,자신은 수치스 러운 존재가 아니라 어엿한 한 사람의 대장장이일 것이다.
그것도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존재.
리트렌의 눈빛에 빛이 반짝였다.
“좋아.”
아리스티네는 고개를 끄덕이고 씨익 웃었다.
“그럼 어디 한번 해 보자구.”
Chapter 20. 뒤끝 있는 변태
“비전하.”
우미루가 우아하게 아리스티네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아,어서 와. 우미루.”
우미루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아리스티네는 그녀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아리스티네의 손을 살짝 문지르다가 손등에 입을 맞 췄다.
“이런 예는 생략해도 되는데. 좀 귀찮잖아?”
그 말에 우미루가 펄쩍 뛰었다.
“생략하다니요! 절대 안 됩니 다! 하나도 안 귀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아리스티네의 손을 놓아주지않고 계속 쓰다듬었다.
“우미루.”
타르칸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묘하게 경고가 섞인 음성이었다.
“아이쿠,무서워라.”
우미루는 과장스레 어깨를 움츠리며 아리스티네의 손을 놓았다.
“그런데 웬일이야? 메스에 대한 소견과 검표는 새로운 메스를 줄 때까지 잠정 보류하기로 했잖아.”
그 말에 우미루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비전하,정말 너무하십니다.”
“응?”
“막 자리에 앉았고 아직 차도 나오지 않았는데,맨 먼저 왜 왔냐고 물으시다니.”
제가 그렇게 싫으십니까?
우미루의 불꽃같은 눈동자가 침울한 빛으로 반짝였다.
아리스티네는 재빨리 손사래 쳤다.
“아,그게 아니라……. 궁금함이 앞서서 나도 모르게.”
워낙 사업 쪽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보니 메스에 관해 서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어서 듣고 싶었고.
우미루가 싱긋 웃었다.
“물론 용건이 있지만,일단은 저도 그 유명한 파티시에의 디저트를 먹고 싶네요.”
그 유명한 파티시에.
그렇게 말할 때 우미루의 눈빛이 은근슬쩍 타르칸을 향했다.
타르칸은 히죽 웃는 우미루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우리 파티시에가 유명해 졌구나!”
그에 반해 아리스티네는 반색 했다.
“하긴 그때 전사들이 케이크를 한 입씩 맛봤으니……. 다들 맛 있었다고 자랑하기 바빴겠네.”
그 말에 우미루는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때 케이크를 먹은 장군급 전사들은 바쁘게 파티시에에 관해 이야기했다.
‘맛있다는 것보다 타르칸 전하가 과연 왜 그 파티시에를 섭외 했는가,하는 토론으로 바빴지만.’
우미루의 시선이 타르칸을 향 했다.
그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흐흥,나는 알 것 같은데에.’
우미루는 샐쭉 웃었다.
곧 차와 함께 디저트가 나왔다. 상큼달콤한 레몬 샬럿이었다.
음,과연과연.
우미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레몬 샬럿을 음미했다.
어째서인지 우미루의 시선이 계속해서 타르칸을 향하는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아리스티네는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 보았다.
물론 아리스티네 역시 맛있게 디저트를 즐겼다.
마지막 한 입까지 다 먹은 후, 드디어 우미루가 용건을 꺼냈다.
“일전에 메스를 많이 주십사 요청드렸던 건이 새로운 메스를 개발하느라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응,새 메스를 개발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떤 메스입니까?”
우미루가 눈을 빛냈다.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티네가 고안해 낸 메스는 그 자체로 혁명이었다.
실무에서 메스를 쓰는 사람이니 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또 개량을 한다고?
“그건 비밀.”
아리스티네가 입술 위에 검지 를 가져다 댔다.
“에이,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알려 주세요.”
“어차피 개발하고 나면 우미루 경이 가장 먼저 써 보는 의사가 될 텐데.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자구.”
그 말에 우미루가 입을 쭉 내 밀었다.
아리스티네가 만나 본 적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 신기했다.
“그게 궁금해서 온 거야?”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다른 용건 이었다.
바쁜 사람이 이렇게 찾 아올 정도의 일인가 싶기도 하고.
“그 핑계로 비전하를 한 번 더 뵙고 싶기도 했고요.”
“말은 잘하네.”
“저는 진심인걸요.”
우미루가 아리스티네에게 윙크를 날렸다.
타르칸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 해졌다.
“우미루,바쁠 텐데?”
목소리에 꽤 진심 어린 짜증이 섞여 있었다.
화를 피하려면 슬슬 자리를 뜨 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위대하신 전사분들 때문에 항시 바쁘지요. 비전하,아쉽지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나중에 새 메스가 나오면 연락할게.”
“나오기 전에 연락 주셔도 괜찮습니다.”
떠나려니 아쉬웠다.
타르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만큼,마지막 할 말은 해야겠다.
“정말……. 비전하께서 저 책임지셔야 해요.”
“응?”
생뚱맞은 말에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가웃했다.
타르칸의 눈동자가 찌를 듯 우 미루를 노려본 것은 물론이다.
“비전하께서 주신 메스 쓰다가 다시 원래 메스 쓰려니까 제 연약한 손목이 비명을 지르는 기 분이에요.”
아리스티네가 픽 웃었다.
그만큼 메스가 좋다는 뜻이니 기분이 좋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리스티네가 궁인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메스 한 세트 이 방에 놔둔 게 있을 거야. 처음으로 완성한 시제품은 내가 기념으로 보관 중이거든.”
아리스티네의 손짓을 받은 궁인은 눈치 빠르게 곧장 메스를 보관하고 있는 서랍장으로 다가 갔다.
우미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걸 저한테 주셔도 돼요?”
“내가 보관하고 있느니 사용할 사람이 갖는 게 낫지 않아?”
아리스티네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타르칸의 입꼬리 가 올라갔다.
안 그래도 리트렌이 준 것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게 짜증 났던 차다.
‘내가 준 보석들은 전부 그냥 드레스 룸에 있는데.’
차곡차곡 드레스 룸의 옷과 잡 화와 장신구가 늘어나고 있거늘 아리스티네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리트렌이 만든 것을 아리스티네의 방에서 치우게 됐 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런데.
“비전하.”
서랍을 연 궁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리스티네를 불렀다.
“여기 메스가 없는데……. 혹시 빼 가셨나요?”
“아니? 나는 건든 적 없는데. 청소하다가 누가 옮긴 거 아냐?”
그 말에 궁인이 고개를 저었다.
“메스를 보관하던 함은 그대로 서랍 안에 있습니다.”
“뭐?”
아리스티네의 깨끗한 미간에 금이 갔다.
“그 말은…… 메스만 없어졌다고?”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