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리트렌 ”
“ 비 전 하. ”
리트렌은 아리스티네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인 것 같아 시무룩했다.
자신은 아직 수양이 부족하다. 이러니 스승님이 한숨을 쉬셨지.
대체 비전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볼까?
“고기 사 줄까?”
하지만 아리스티네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리트렌의 예상과 전 혀 달랐다.
“예?”
얼떨떨하게 되묻자 아리스티네가 씨익 웃었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야 하는 법이거든.”
자고로 모든 근심과 걱정은 탄 수화물과 단백질, 기름과 설탕에 녹아내리기 마련이다.
적어도 제왕안으로 본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전생의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리트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내가 진짜 맛있는 고기 사 줄게. 나 돈 많아.”
한없이 진지한 아리스티네의 말에 리트렌의 웃음이 깊어졌다.
어쩐지 어깨에 꽉 들어갔던 힘이 빠졌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티네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스트레스 받는 리트렌이 안쓰 러웠다.
‘혹시 믿는다는 내 말이 부담됐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리트렌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으니까.
아리스티네는 완성한 스테인리 스 스틸 중 가장 평이 좋았던 것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 정도면 나는 그래도 합격인 것 같은데. 내열성도,내식성도 좋고 강도도 높잖아.”
“아니요.”
리트렌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 그의 모습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했다.
“조금만 더 하면 더 완벽한 것을 찾아낼 수 있어요.”
리트렌이 합금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율이나 첨가물,가공 방법을 바꾸면 바꾸는 대로 다른 결과가 나오니 포기할 수 없다.
그게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의 료용 메스같이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도구에서는 중요했다.
“보다 고온에 잘 견딜 수 있는 것도 찾아냈잖아요. 그럼 병원에서 소독하기도 훨씬 쉬울 거예요.”
“옹,날은 일회용이지만 손잡이는 계속 같은 것을 쓰니까. 소독이 덜 귀찮으면 위생도도 올라 가겠지.”
아리스티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인은 타협하지 않는다는 건가. 으음,그래도 리트렌이 너무 스트레스 받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리스티네는 고민했다.
사원 복지를 잘 챙겨 주는 것 도 사장이 해야 할 일이었다.
‘역시 돈을 더 많이 준다고 할까.’
월급 인상.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가는 마법의 단어 아닐까?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리트렌이 너무나도 올곧은 눈을 한 채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비전하께서 오직 상처받은 사 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리 노력 하시는데 제가 부족한 물건을 만들 순 없습니다.”
“으응?”
“반드시 완벽한 메스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음,그래……”
아리스티네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있는지도 몰랐던 양심이 콕콕 아려 왔다.
‘이대로 계속 오해하게 두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리트렌이 다소 실망하더라도 진실을 밝혀야 할 것 같았다.
“저,리트렌”
“네,비전하.”
아리스티네의 심각한 얼굴에 리트렌은 자세를 바로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계속 오해하는 것 같은데,나 는 딱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며 메스를 제작하는 게 아니야.”
“네? 그럼……”
“돈을 벌고 싶어서 하는 거 야!”
아리스티네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하게 말했다.
돈 벌고 싶어서 노력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돈이요?”
“응! 그러니까 손해를 감수할 생각도,내 노동력과 자금을 희생할 생각도 없어.”
리트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제 똑똑히 알겠지!’
숭고한 일이니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압박에서도 좀 벗어 나게 될 거다.
“난 부자가 될 거야!”
몇 차례 올리브빛 눈동자를 깜 빡깜빡하던 리트렌이 푸스스 웃었다.
“아,그러시군요. 음..”
리트렌은 웃음기를 담은 채 아리스티네를 바라보았다.
살짝 처진 눈매 속 둥그런 눈 동자가 다정다감했다.
“역시 비전하께서는 상냥하고 다정하시네요.”
“어?”
아리스티네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방금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보고 메스 만든다고 말하지 않았나?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아니요.”
리트렌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으냐 는 말에 답했을 때만큼이나 확 고한 얼굴이었다.
“비전하의 뜻을 잘 알아들었어요.”
“내 뜻?”
그건 건물주가 되겠다는 건데.
“제가 계속 압박받으니까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부담 갖지 말라고.”
“아니? 전혀 아닌데?”
그야 부담 갖지 않기를 바라긴 했다.
하지만 그보단 양심에 찔려서 이실직고한 게 맞았다.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제 마음을 보듬어 주시다니……”
크윽,리트렌이 눈시울을 붉혔다.
“아니,그게 아니라고 했잖아. 진짜로 돈방석에 앉을 생각으로 시작한 거라고.”
아리스티네가 정색하고 말했지만 리트렌에겐 들리지 않는 건 지,감동한 눈으로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역시 비전하께서는 정말이지……”
리트렌은 말을 못 이었다.
아리스티네는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는 정말 못난 놈입니다. 초조해하기나 하고,그래서 비전하께서 그런 말이나 하시게 만들다니. ”
올리브빛 눈동자가 울망울망해지니 내포물 하나 없이 투명한 투르말린처럼 보였다.
아리스티네는 깨달았다.
‘더 말해 봤자 내 입만 아프다.’
현명한 자각이었다.
“그래,그냥 네 마음대로 생각 해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아리스티네는 빠르게 포기했다.
* * *
합금을 연구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리스티네는 거의 매일같이 대장간에 박혀 리트렌과 함께 각 표본의 차이를 체크했다.
‘직원이 열심히 일하는데 사장이 놀고 있을 순 없으니까!’
“으아,피곤해.”
하지만 몸은 솔직해서 누적된 피로가 몰려왔다.
점심도 먹었겠다,소화시킬 겸 조금 쉴까 싶었다.
아리스티네는 몸을 쭉쭉 늘이며 기지개를 켜곤 소파에 늘어 졌다.
‘그나저나 이곳에도 크롬과 니켈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것도 오래전에 발견되어서.’
아리스티네가 제왕안으로 전생을 봤을 때 지구에서 두 물질을 발견한 건 18세기 정도였다.
‘내가 사는 곳이 지구의 어느 시대라고 딱 말하기는 힘들지 만.’
문명의 발달 과정은 전생과 확연히 다르다.
‘그야 포털과 마수가 있는데 같을 리가 없지. 주 에너지원도 다르고’
천장에 매달린, 마력을 사용해 밝힌 상들리에를 바라보던 아리스티네가 눈을 감았다.
일과 관련된 생각은 잠시 접어 두고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어렴풋한 인기척이 느 껴졌다.
아리스티네는 눈을 반짝 떴다.
‘누가 왔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누운 상태 그대로 고개를 돌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브로디?’
실바누스에서 온 아리스티네의 시녀 중 한 명인 브로디였다.
“황녀 전하.”
아리스티네가 몸을 일으켜 세워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녀라고는 하지만 브로디가 제대로 된 시중을 든 적은 한 번도 없다.
쉬려는 타이밍에 들어온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내가 분명 사람을 모두 물리라고 했을 텐데. 잘 거라고.”
“황녀님과 꼭 독대하고 싶어서요.”
브로디가 그렇게 말하며 한 발 짝,한 발짝 아리스티네에게 다 가왔다.
아리스티네는 그 행동에서 무 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브로디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 보다 들떠 있었다.
아니,몽롱해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역시 들떠 있는 듯했다.
기묘한 열기가 브로디의 전신에 고여 있었다.
그녀는 흥분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브로디가 혀를 내밀어 바짝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뭐지?’
아리스티네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감이 좋지 않았다.
“독대는 왜?”
위계를 무시하고 아리스티네에게 따지는 것조차 남들 앞에서 했던 브로디다.
새삼 독대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황녀님,왜 제게 신관을 보내 주시지 않았어요?”
“신관?”
“제가 황녀님 대신에 화상을 입었잖아요. 그럼 책임을 지셔야지요”
브로디가 아리스티네가 화상 자국을 잘 볼 수 있도록 얼굴을 틀었다.
흉은 하얀 데다가 화장으로 가 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그래도 우툴두툴하게 빛이 반사되는 부분이 있었다.
“날 대신해서 화상을 입은 거라고?”
“네,그때 화상을 입어야 할 사람은 황녀님이었잖아요. 제가 아니라.”
‘……뭐지?’
위화감이 아니라,브로디의 상태는 확연히 이상했다.
행동도,말도,눈빛도 불안정하다.
태도 역시 예전에 이 문제에 관해 얘기했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그때 브로디는 일부러 끓는 물을 가져왔다는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대화를 피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리스티네는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니까 제게 싹싹 빌며 용 서를 구하시고 신관을 불러서 이 흉측한 상처를 없애 달라 하 셨어 야죠.”
“내가 왜?”
아리스티네는 호구가 아니었다.
그녀는 브로디가 자신에게 화 상을 입힐 생각으로 끓는 물을 들고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성공했을 거라는것도 알았다.
‘내가 제왕안으로 보지 못했다면.’
아리스티네는 브로디가 입은 화상보다 더 큰 화상으로 온 얼굴을 다쳤을 것이다.
“내가 입힌 상처도 아닌데 왜 내가 책임져야 하지?”
“그러니까 역시 책임질 생각 따위는 없다는 거군요.”
“책임질 이유가 없으니까.”
대답하면서 아리스티네는 브로디의 기척을 예민하게 살폈다.
실수인 척 끓는 물을 들이부으 려 했던 전적이 있는 상대인 만큼,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성장기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갇혀 살았던 아리스티네로서 는 브로디를 힘으로 당해 낼 수 없다.
아리스티네가 조심스레 소파에서 일어나 브로디와의 거리를 벌리려던 때였다.
“그러면.”
브로디의 양쪽 입 끝이 기묘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눈이 광기 로 번들거렸다.
“억지로라도 책임지도록 하세요!”
그 말과 동시에 브로디가 달려들며 품에서 무언가를 휙 치켜 들었다.
너무 빨라서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은빛으로 차갑게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아리스티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 이었다.
아리스티네가 소파에서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날카로운 은빛 칼날이 쇄도했다.
홈결 하나 없는 여린 피부가 붉게 난도질당하려는 찰나,
탁!
눈앞에서 칼날이 멈췄다.
아리스티네의 눈에는 바로 앞에 있는 칼날보다,그 뒤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더 선명히 박 혀 들었다.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금빛 눈 동자.
“타르칸……?”
타르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무표정했다.
아니,그가 무표정했을 때는 많았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이렇게 모든 감정이 배제된 것만 같은, 무기질적인 얼굴이라니.
분노조차 드러나 있지 않은 얼 굴에 아리스티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챙그랑一.
브로디의 손에 있던 칼이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손목을 얼마나 꽉 잡은 것인지 그것만으로 손에 힘이 풀려 칼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타르칸은 브로디의 팔을 뒤로 꺾은 뒤 찍어 눌렀다.
“아악!”
브로디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바르작거리지도 못했다. 압도적인 힘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었다.
고작 팔 하나로.
그 모습을 본 아리스티네가 후 우하아,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하려고 했지만 심장이 정신없이 요동쳤다.
‘괜찮아. 타르칸이 왔잖아.’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시선을 돌려 떨어진 칼을 내려다보 았다.
‘메스?’
아리스티네가 리트렌에게 부탁해 만든 그 메스였다.
‘메스를 훔쳐 간 범인이 브로디였어?’
아리스티네의 시녀는 비교적 자유롭게 방 안을 드나들 수 있으니 훔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 었을 것이다.
“이,이거 놔! 당장……!”
땅바닥에 납작 눌린 채,브로디가 발악하듯 꽥책 소리를 질 렸다.
핏대가 까득까득 선 그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정상적인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타르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예의 그 무기질적인 표정으로 브로디를 내려다보다가 팔을 살짝 틀었다.
“커흑!”
꾸르륵거리는 숨이 브로디의 입술에서 홀러내렸다.
“아,흐,아파……”
타르칸은 귀찮다는 둣 브로디 의 팔목을 잡고 있는 엄지에 힘 을 주었다.
“아아아아악!”
“시끄러워.”
타르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거짓말처럼 브로디의 비명이 멈 췄다.
브로디는 입을 벌린 그대로 숨 도 못 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타르칸이 낮게 짓씹듯 말했다.
그의 아내가,아리스티네가 다칠 뻔했다.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