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사이 충격을 갈무리했는지, 아리스티네는 창백하나마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르칸은 그녀가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와 한 줌도 안 되는 허리,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 질 것 같은 연약한 팔목.
그의 시선이 떨어진 메스에 닿았다.
저 자그마한 칼날이 얼마나 날카롭고 예리한지 타르칸은 잘 알고 있었다.
브로디는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너덜너덜하게 난도질할 생각이 었을 것이다.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없이 여린 자신의 아내는 그 힘을 당해 낼 수 없을 터였다.
붉게 물든 아리스티네의 얼굴이 타르칸의 눈앞에 스쳤다.
명치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맹수처럼 샛노란 눈동자에 흉흉한 안광이 번뜩였다.
짙고 비릿한 살기에 짓눌린 브 로디가 끽,꺽 숨을 몰아쉬었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포식자 앞의 먹이처럼 몸이 바짝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사,살려, 주……”
겨우겨우 억지로 뻣뻣한 혀를 움직여 말을 쥐어짜 냈다.
“내가 왜?”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잔인했다.
기묘할 정도로 샛노란 눈동자 와 마주친 순간 브로디는 예감 했다.
죽는다.
“……흐,끅,으흑……”
하지만 타르칸은 칫,하고 혀 를 차곤 고개를 돌렸다.
아리스티네가 이쪽을 보고 있 었다.
곱게 자라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그녀 앞에서 피를 보이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딴 버러지한테 신경 쓰는 것보다 아리스티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진정한 듯 보이지만 아리스티네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하였다.
“듀란테.”
타르칸의 부름에 듀란테가 앞으로 나와 브로디를 획 잡아끌었다.
듀란테가 있는지도 몰랐던 브로디는 갑자기 잡아당기는 거친 손길에 꽥 소리를 질렀다.
타르칸의 살기에서 벗어나자 굳었던 몸에 피가 돌며 팔다리가 저릿저릿했다.
“아,안 돼……”
브로디가 끌려가며 덜덜 떨리 는 몸으로 버둥거렸다.
아까 느낀 죽음의 냄새가 선연했다.
이대로 가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시,싫어……. 싫어!”
패닉에 빠진 브로디가 온 힘을 다해 구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 쳤지만,듀란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내가,나는……! 내가 아니야!”
브로디의 눈이 획 돌아갔다. 흰자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그녀는 정확히 아리스티네를 노려봤다.
마치 이렇게 질질 끌려가야 할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아리스티네라는 것처럼.
“잘못됐어! 바뀌었다고……!”
듀란테가 눈썹 끝을 까딱이더니 브로디의 입을 막았다.
브로디가 아무리 반항을 해도 그는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그녀를 끌고 사라졌다.
달칵.
문이 닫히자 방 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언 제나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네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늘어질 수 없었다.
잠이 싹 달아났다.
성큼 다가온 타르칸이 아리스티네의 턱을 잡고 획 들어 올렸다.
“타르칸?”
그녀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쪽,왼쪽으로 돌려 가 며 혹시라도 상처가 있는지 확인한다.
유심히 살펴보는 진지한 모습 에 아리스티네는 어쩐지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칼날이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막았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안한 지.
그를 바라보자 시선을 눈치챈 타르칸이 뺨을 살피던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운 거리였다.
타르칸은 움찔하더니 잡고 있던 아리스티네의 턱을 놓았다.
그는 차마 아리스티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머리끝까지 치솟는 분노에 아까는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했다.
타르칸은 제 살기가 위압적이다 못해 폭압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모습을 봤으니 아리스티네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움에 떨며 그를 꺼리거나, 외경해서 삼가며 우러러보거나.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리스티네는 제멋대로인 여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엉뚱한 말을 툭툭 내뱉던 여자.
이상하게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변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딱딱 하고 투박한 그의 손끝에 닿았다.
타르칸은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놀라 아리스티네를 바라봤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고마워,타르칸.”
一그렇게 말하면서.
타르칸은 입을 벌렸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 여름이라 그런지 날이 더웠다.
그는 그 상태로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손끝에 닿은 온기를 느꼈다.
길고도 짧은 찰나가 지나고, 갑자기 닿아 왔던 손은 또 갑자기 멀어졌다.
타르칸은 사라진 온기가 아쉬 워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역시 믿음직스러운 파트너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아리스티네가 씩 웃었다.
처음 동맹을 맺자고 했을 때 그녀가 내건 조건이었다.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는 것.
타르칸은 무언가 거슬림을 느꼈다.
그는 그런 것 때문에 움직인 게 아니었다.
아리스티네를 지킬 때,계약이나 조건,요구, 정치적 결탁 같은 건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一.
“그런데 타르칸.”
아리스티네가 웃음을 지운 채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브로디가 메스를 홈쳤다는 거,넌 알고 있었지.”
확신을 담은 눈동자였다.
“……그래.”
타르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티네는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타르칸이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브로디가 메스를 홈쳤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까지 무방비하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타르칸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나타났더라도 조금만 늦었더라면--.
“왜 말하지 않았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말하지 않을 사항은 아닌 것 같은데.”
타르칸은 잠시 침묵했다.
“말했으면 네가 조심했을 테니까.”
“뭐?”
더 이해할 수 없는 답이었다.
“……넌 갇혀 살았잖아.”
타르칸의 금빛 눈동자가 아리스티네의 얼굴을 천천히 응시했다.
“행동을 제한당하고 생활 반경도 한정적이었지.”
비좁은 골방에 갇힌 채 십수 년을 살았다.
“그건……”
아리스티네는 하던 말을 멈추 고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타르칸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어쩐지 가슴 아래로 획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어쩌면 따스하기도 한 바람이.
그녀와 그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리스티네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타르칸은 그녀에게로 뻗어 나가는 손을 막을 수 없었다.
타르칸의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여기선 그 누구도,그 무엇도 네 행동이나 자유를 제한하지 않아.”
새까만 그의 머리카락이 그녀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그 그늘 아래에서 빛나는 태양같은 타르칸의 눈동자가 아리스티네에게 내리쬐고 있었다.
“제한하지 못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다짐이라기엔 너무 강해,결의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설령 아리스티네의 목숨을 노리는 살수가 오더라도 자유를 줄 것이다.
원하는 대로 돌아다니고,원하는 것을 하도록.
그녀가 갖지 못했던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보호를 위해 안전한 방 안에 있으라며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싶지 않았다.
“넌 앞으로 평생,조심할 필요 따위 없어.”
“그러면 네가 더 힘들텐데?”
그 말에 타르칸의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사납고 방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리스티네의 입 매 역시 서서히 올라갔다.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아리스티네가 뭘 하든,어디를 가든 타르칸은 그녀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녀가 조심하지 않는 만큼 그가 그녀를 더 지킬 것이다.
“이상하지.”
아리스티네가 중얼거렸다.
“하나도 걱정이 안 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웃는 모습에 타르칸은 작게 숨을 삼켰다.
아리스티네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누가 나를 해칠까,또 칼로 찌 룰까, 오늘 같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방 안에 혼자 있기 무섭다거나,밖에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싫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동요 했으면서.
“네가 날 지켜 줄 테니까.”
그에게 지켜 달라고 요청했던 예전과 다른 느낌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안심됐다.
창백했던 그녀의 팔다리에 따 스한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양 뺨에도 생기가 올라왔다.
아리스티네의 뺨을 감싸 쥔 타 르칸의 손이 미끄러져 내리며 그녀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래.”
“오늘처럼?”
“오늘처럼.”
아리스티네가 웃었다.
“내가 파트너 하나는 참 잘 골랐지.”
“언제는 손이 많이 가서 성가시다며? 자존심도 센 데다가 좀 유치하고,수줍음도 많다고.”
거기에 변태라는 말까지 했다.
타르칸은 차마 그 말만큼은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아리스티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다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어?”
타르칸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은근히 뒤끝까지 있네?”
“야.”
나지막한 부름에 아리스티네가 피식 웃었다.
“그런 점도 포함해서,잘 골랐어. 괜찮은 파트너라고 말했잖아?”
아리스티네가 자신의 어깨를 잡은 타르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설마 계속 칭찬이 듣고 싶어서 일부러 투덜댄 건 아니겠지.”
살짝 타르칸을 흘겨보며 말하 자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타르칸은 고개를 획 돌렸지만, 그녀를 잡고 있는 손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그 심통 난 얼굴에 아리스티네 가 푸스스 웃음을 홀렸다.
“앞으로도 믿고 맡길게, 칭찬받을 만한 내 파트너.”
Chapter 21. 그의 취향
아리스티네는 턱을 관 채 로잘린을 내려다보았다.
로잘린은 잘 훈련된 말 잘 듣는 개처럼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떤가요,황녀 전하. 제 실력이.”
짙은 녹색 눈동자가 포상을 바라고 반짝거렸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시녀를 사냥했어요.”
브로디는 시녀이면서 감히 주인을 헤치려고 했다는 죄를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 한마디로 정리됐지만,참 많은 일이 있었다.
브로디는 이 대륙의 평화를 깨트리려 한 극악무도한 역적이 되어 아이루고는 물론이고,실바누스에서도 힐난당했다.
‘황제가 다시 전쟁을 벌일 생각 만만이라는 건 일반 국민들은 모르니까.’
실바누스 백성들도 평범하게 평화를 바랐다.
당연하지만 황제는 브로디를 버렸다.
〈감히 이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내 소중한 딸을 해하려 하다니,그 악독함에 치가 떨린다. 죄인은 다시는 실바누스 땅을 밟지 못할 것이며,죄인의 가문 은 귀족원에서 제외돼 평생 부역하며 살게 될 것이다.
죄인에 관한 모든 처분은 사돈이자 동맹 우호국인 아이루고에 맡기겠다.〉
실바누스 측이 아이루고에 보내온 공식서한에는 그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물론 이 역시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누가 보면 황제가 누구보다 아리스티네를 사랑하여 이 사태에 엄청나게 분노한 줄 착각할 내용이었다.
‘그야 물론 엄청 분노하긴 했겠지.’
다른 방향으로 분노했겠지만.
실바누스가 군사력 준비를 마칠 때까지 아리스티네를 잘 감시하다가 죽여서 전쟁의 불씨가 되게 하라고 명했는데,오히려 물의를 일으키다니.
황제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일이었을 터.
황제가 발광하며 날뛰었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런데 브로디의 가문이 이 일에 가만히 있을까? 분명 폭로할 것 같은데.’
딸 하나가 아니라 가문 자체가 역적이 되었으니 황제가 사실은 전쟁을 원하고, 제 딸을 죽일 생각이라고 밝힐 법했다.
‘아,이미 폭로할 수 없는 상태겠구나.’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영애를 골라서 보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다른 시녀들의 가문도 입을 다물었겠지.’
브로디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신문사가 신나게 감히 아리스티네를 해하려 한 브로디의 악랄함과 잔악무도함 에 대해 떠들었다.
마지막은 꼭 성스럽고 고결한 왕자비를 차마 범접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말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타르칸이 아리스티네를 구한 게 또 세기의 로맨스처럼 포장되어서 널리널리 퍼졌다.
벌써부터 이 일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과 희곡이 나오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사람들이야.’
아리스티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잘린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이게 네 공이다?”
“브로디는 황제 폐하가 친히 임명한 사람인데 그냥 시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순 없으니까요.”
로잘린의 붉은 입술이 자신만 만하게 올라갔다.
“이런 일을 벌이는 편이 확실하게 물어뜯을 수 있죠.”
그러니까 브로디가 실각한건 자신의 공로이니 어서 칭찬하라는 뜻이었다.
아리스티네는 씨익 웃었다.
‘아하,네가 메스가 있다는 것을 브로디에게 알려 줬구나.’
남편은 됐고,돈이나 벌렵니다